- 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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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atian Rhapsody
낮에는 태양에 취하고 밤에는 사랑에 취하다
2009
낮이 되어 태양에 취하며 낯선 이국땅을 서성이는 동안 5기 연구원 각자는 자신이 맡은 미션이 있었다. 바로 주제별 크로아티아 여행이라는 미션인데 이를 수행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각기 흩어져 사진을 찍고 메모를 했다. 나의 경우, 맡은 주제가 '현대문화'이다. 현대문화에 대한 해석도 그 범위도 여러 가지겠지만 나는 '노래하고 춤추는 축제의 현장학습' 이라고 의미 정의를 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크로아티아의 현대문화는 미술관이나 콘서트 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 좁은 골목에, 광장에 그리고 따뜻한 태양이 넘실거리는 해변에 있으리라. 그리고 때때로 내가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 서서 이 신나는 주제를 마음껏 즐기고 오리라.
그렇게 태양빛 속을 서성이며 10인 10색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숙소에 들어오면 5기 연구원들만의 비밀스러운 사랑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총 5일 동안 진행되었던 수업은 호텔 세미나룸에서 진행되기도 했고 별빛조차 희미한 밤바다의 해변에서 진행되기도 했으며,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시내 공터의 천막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매일 밤 세헤라자데가 풀어놓는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우리는 사랑이라는 주제 안에서 크로아티안나이트를 만들어갔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고 어떤 이야기를 새로이 만들어 갈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파티야 (Opatija)
오파티야의 세헤라자데
오파티야라는 곳이 내게 의미있는 있는 이유는 이 도시가 아름다운 해변 휴양지여서가 아니라 내 사랑이야기의 리본이 풀어졌던 곳이기 때문이다. 즉 오파티야의 밤을 책임진 세헤라자데는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날 수업은 다소 색다르게 호텔 밖 바닷가 근처의 어느 공터에서 진행되었다. 열명을 웃도는 우리 인원이 들어가기에 딱 맞는 천막이 있어, 우리는 그곳에 둥글게 둘러 앉아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 수업에 앞서 나는 어떻게 내 사랑이야기를 전개해 나갈지 조금씩 컨셉을 만들고 다듬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뮤지컬이었다. 노래와 함께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보다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며, 잠과의 사투를 벌이는 연구원들을 무사히 이야기의 끝까지 함께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총 5개의 곡을 선정했는데, 인터넷이 없이 가사를 온전히 떠올리는데 한참 애를 먹었다. 가사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으면 즉흥적으로 내가 작사를 해가며 노래할 곡들을 완성시켜갔다.
그리고 나, 오파티야의 세헤라자데는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큰 공터의 천막에서 조용한 가운데 나 홀로 노래하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공간 속에서 소리 낼 수 있는 존재가 나 혼자인 것처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공기는 내 노랫소리와 말소리만을 사방으로 울려 퍼지게 할 뿐이었다. 문득 한국에 돌아와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퍼포먼스를 기획해서 실행했는지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순간 나는 너무나 노래하고 싶었던 뮤지컬의 주인공이었으며 바로 그 노래를 통해 내 과거의 연인을 오파티야로 초대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수업 때 사부님은 ‘사랑이 도대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나는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만은 고명한 철학자도 일반인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두꺼운 철학책이 아닌 대중가요집 속 가사 안에서도 발견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더군다나 추억이 담겨있는 노래라면 더욱 그러하다.
열 사람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 열 개의 사랑이야기가 되지만, 그 열 개의 사랑이야기를 하나의 노래 소리로 묶을 수 있는 것이 음악이 힘이다. 모두 다른 사랑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있지만 단지 단 하나의 노래를 통해서도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라며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에 곡조를 붙이면 노래가 되듯 사랑노래에는 사랑의 메타포, 사랑의 시가 녹아 있기 마련이다.
노래를 통해 사랑의 추억을 말한다는 것은 사랑의 전체 스토리라인이 아닌 응축된 감정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마치 영어의 ‘made of’ 와 ‘made from’의 차이와 같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엑기스로 사랑이라는 열병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은유적인 내용 전달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사랑의 추억이 노랫말로 변신한 순간, 노랫말은 우리 연구원들 마음 속에 제각각 아로새겨져 그들의 옛 연인들도 함께 그 자리에 잠시 불러왔을 것이다.
우리의 수업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때로는 눈물겨웠다. 총 5일간의 크로아티안 나이트를 마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열 개 남짓한 사랑에 대한 주제들이었다.
‘사랑은 변하는가?’, ‘사랑하는데 준비가 필요한가?’, ‘사랑에 전략이 있을까?’, ‘노력을 하면 사랑을 만들 수 있을까?’, ‘사랑에는 조건이 수반되는가?’ 등등의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나만의 답을 내림으로써 크로아티안 나이트, 사랑 수업의 마지막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쉬베니크 (Sibenik)
훈남 피아니스트 막심의 고향, 쉬베니크
여행을 하던 중 내게는 공식적인 미션이 하나와 비공식적인 미션이 있었다. 공식적인 미션은 크로아티아의 문화 (음악, 미술, 공연)를 중심으로 이곳 사람과 공간을 관찰한다는 것이고, 비공식적인 미션은 ‘크로아티아 훈남 찾기’ 라는 다소 장난기 넘치는 것이었다. 그 미션의 배경에는 직장동료로부터 ‘크로아티아 훈남 100명의 사진을 찍고 돌아오라’는 지령을 받은 이번 여행 포토그래퍼 현주언니의 미션 수행을 전폭적으로 도와 주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까닭도 있고, 바로 이 남자 막심 마라비차(Maksim Mrvica)가 크로아티아 출신의 뮤지션인 까닭도 있다.
막심 마라비차는 1975년 아드리아해 연안의 작은 마을, 쉬베니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9세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 해에 첫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3년 후인 12살 때에는 하이든의 C장조 피아노 협주곡을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정도였다.
막심을 처음 알게 되었던 계기는 ‘왕벌의 비행(The flight of the bumble-bee)’이라는 곡을 우연히 듣게 되면서부터이다. 속도감 있는 일렉트릭 사운드 위에 탄탄한 피아노 연주가 더해진 이런 곡을 연주하는 뮤지션은 누구일까 하는 궁금함에 그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인터넷 서핑으로 찾은 그의 연주동영상을 보고 첫째, 그의 혼들린 연주실력에 놀랐고, 둘째,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그의 빼어난 외모에 놀랐다. 그러나 막심이 여느 뮤지션과 다른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바로 그가 크로아티아 출신의 뮤지션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전쟁 가운데 음악을 공부하고 피아노를 연주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막심과 스승인 마리야 세크소는 계속해서 음악훈련을 했고, 막심은 당시를 이와 같이 회상한다.
"제가 살던 도시에는 매일 수 천개의 포탄이 터졌습니다. 그렇다고 사는 것을 포기할 순 없고, 삶은 계속되어야 하는 거지요. 이때 피아노가 나를 지탱시키는 유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막심이 태어나고 자라왔던 이 곳, 쉬베니크는 현재 평화롭다. 언제 그런 전쟁이 있었냐는 듯이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에게 눈인사를 하며 스쳐가고,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은 카메라에 손이 자동으로 이동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기만 하다. 아름다움에 취해 한껏 골목길을 찍고 사람들을 찍다 보면, 좁은 길 한쪽 외벽에 종종 건물의 외벽에 고스란히 남겨진 포탄 자국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십수년 전에 입은 상처에 남은 깊은 흉터와도 같다. 그리고 그 흉터는 차곡차곡 쌓인 시간의 무게만큼 닳아 건물과 제법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전쟁의 상처도 건물과 함께 낡아가며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흐릿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다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이렇게 낙천적이고, 노래를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한다
살벌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막심은 1993년 자그레브에서 열린 음악 콩쿠르에 출전해 생애 최초의 주요 음악 콩쿠르 우승이라는 영예를 얻었고 이후 국제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연이어 1위를 거머쥐게 된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음악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러한 믿음은 크로아티아 내전 기간 동안 폭탄이 터지는 가운데서도 음악학교의 지하실에 남아 연습을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막심은 여전히 젊은 청중들에게 클래식 음악의 매력을 전하고, 그들과 새롭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교류하는데 열정적으로 관심을 나타낸다. 그의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전쟁과 폭격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남은 음악이라 그렇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폭격 소리 가운데 피아노를 연습해 세계적인 뮤지션이 된 막심 마라비차, 그는 전쟁으로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었으나 다시 꿋꿋이 일어나 다시 웃으며 살아가고 있는 수백만 명의 크로아티아 사람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의 음악와 그의 조국 크로아티아가 아름다운 이유는 상처를 이겨내고 꿋꿋하고 당당하게 살아간 그 과정 속에 있지 않을까 한다.
스플리트 (Split)
황금빛 향기가 나는 항구도시, 스플리트
스플리트는 황금의 빛을 가진 도시이다. 유럽에서도 해가 가장 잘 내려 쬐는 곳 중 하나라는 명성이 헛되지 않게 스플리트 항구에 내려 시내를 바라보니 햇빛을 충분히 머금은 돌바닥이 반짝거리며 황금빛 태양빛을 토해낸다. 오후 6시경에 도착하니 한결 부드러운 빛이 도시를 감싸돈다. 나는 이번 크로아티아 여행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 중에 하나인 디오클래티안 궁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디오클레티안 궁전은 현재 가장 중요한 로마시대 유적지 중에 하나라고 한다. 중세에 들어와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다고 하는데 다시 복원시키지 않고 그것 역시 궁의 일부라고 생각하는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재미난 점은 궁전 안에 있는 200개의 건물에는 아직도 3,000여명의 사람들이 주거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옛 고성의 좁은 길을 걸을 때 빼꼼이 보이는 하늘에 빨래들이질서 정연하게 줄 맞춰 있는 모습이 꽤나 이질적이다. 유명한 문화유적지 안에는 늘상 박물관 직원과 가이드, 그리고 관람자를 위한 안내판만 여행자를 기다릴 뿐이지만 이곳에는 빨래가 있고, 뛰어다니는 동네 꼬마가 있으며, 그윽한 에스프레소 향을 풍기는 카페가 있다. 과거에 현재의 사람들이 사는 디오클레티안 궁전은 그렇게 사람 냄새가 버무려져 있는 곳이다.
궁전 안의 성당 입구 옆에는 종탑이 있는데 약간의 입장료를 내고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중앙의 종을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둘러싼 계단이 위로 죽 이어져 있는데, 왼쪽은 종이 내려다 보이는 아찔한 바닥이고, 오른쪽은 큰 창 너머의 스플릿 시내가 있다. 좌우를 돌아봐도 아찔한 기분이 들어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함께 계단을 오르던 현주언니는 겁도 없이 창문 너머로 기어 올라 난간에 서서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닌가? 대단한 프로정신이라고 놀라워하니, 이 곳에서 보는 전경이 너무 아름답다며 내게도 난간으로 기어올라고 이야기한다. 용기를 내어서 조심스럽게 벽에 기대며 난간 위에 서니, 순간 내 두 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전경과 마침 아름답게 하늘을 물들인 붉은 노을에 넋이 잃을 것 같았다. 만약 이 곳에서 자칫 떨어진다면 발을 헛디뎌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에 정신을 팔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한창 눈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막을 찢어놓을 듯이 큰 소리의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바로 옆에서 그렇게 큰 종이 울리니 소리의 파동이 내 몸에 고스란히 전해져 내 몸을 매개체 삼아 거대한 종소리의 울림이 스플리트 시내로 퍼지는 것 같다. 갑작스러운 종소리에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이 얼마나 절묘한 순간의 타이밍이란 말인가? 종소리가 퍼지는 그 순간 종탑의 난간에 서서 스플리트 시내를 바라보니 순간 내가 과거로 여행을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옛 사람들은 노을이 지는 오후 종소리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이는 일을 마무리하고 가족과 저녁식사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보내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로 신께 기도를 올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나는 종소리를 들으며 가슴 벅차 오르는 이 순간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디오클레시예노바 거리로 와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니 황금문(Golden Gate)이 나왔다. 이 문은 로다의 고대 도시 솔린(Solin)으로 출발하는 지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 황금문 앞에 그레고리우스 닌(Gregorius of Nin)의 동상이 서있다. 그는 10세기 크로아티아 주교로 크로아티아인들이 자국언어로 종교 예배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투쟁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레고리우스 닌의 동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만지면 행운을 불러온다는 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손이 지나가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그의 엄지발가락은 두 손으로 감싸 안아야 모두 덮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반질반질한 그레고리우스 닌의 엄지발가락을 보니 문득 우리나라의 돌부처가 떠오른다. 돌부처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게 해준다’ 라던가 ‘시험에 합격한다’ 라는 이야기에 돌부처의 코는 점점 뭉특해져 결국 코의 흔적만 남은 돌부처가 얼마나 많단 말인가? 그레고리우스 닌의 엄지발가락도 돌부처의 코도 그 자취가 희미해질수록 그곳을 지나쳐간 사람들의 마음에는 희망이 쌓였으리라.
그레고리우스 닌의 엄지발가락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광택이 아니라 사람들의 소망이 쌓여 만들어진 빛이기에 더욱 그 빛이 영롱해 보였다.
좋았었어.
어느 날 밤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쎄이와 간만에 새벽까지 이야기 했던 그 밤 말이야.
쎄이가 야무지고 똑똑한 줄을 알았지만, 뭐랄까, 어른스럽고 성숙하기까지 함을 새로이 발견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균형 잃지 않는 사고나 관점도 멋있었고.
솔직히 쎄이는 이 언냐가 아무 걱정 안해.
오히려 가장 막내이면서도 때로는 언냐, 오빠들 등 두드려주니... 참....
이번 여행에서도 눈 부시게 환희 미소짓던 네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해변가에서 너의 사랑을 노래를 풀어 놓을 때는 뭐랄까...
그래, 쎄이도 아프지 않았던 건 아닐텐데...하는 마음이 들었지.
네가 들려주었던 양희은의 노래, 나도 참 좋아하는 노래거든..
쎄이야. 우리 졸업 여행가서도 한 방 쓰자.
그 때는 야간 수업없으니까, 우리끼리 수다 더 떨고 말이야.
음...살면서 언니가 필요할 때는 말이야. 그래도 꼭 뒤돌아보고 손짓하기다. 내가 든든히 버티고 있을께!
이번 여행에서 여러가지로 고마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