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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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블라냐 (Ljubjana)
루블라냐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나는 여행 기간 내내 버스 기사인 스탕코 뒤에서 좌선생님과 함께 큰 앞유리 너머로 펼쳐지는 그림같은 경관에 연신 감탄하고는 했는데 이 순간도 그러했다.
종종 기가 막히게 멋진 풍경이 나오면 나는 옆의 좌선생님께 슬쩍 몸을 기대며 ‘선생님, 우리 자리 정말 명당이에요’ 라며 속삭였고, 그러면 좌선생님은 살짝 미소를 띄시며 맞다고 응수해주신다.
버스가 잠시 정차하면 앞 유리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한 장의 멋진 풍경화가 되고,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면 갑자기 그림이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온다. 초등학교 시절에 놀이동산에서 100원을 내고 들여다 보았던 활동사진이 커다란 스케일로 다시 태어나 눈 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았다. 종종 전날 수업으로 모자란 잠을 버스에서 보충하고 싶은 충동도 일었지만, 아마도 꽤 오랫동안 이렇게 황홀하고 거대한 활동사진을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졸음을 참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니 어쩌면 아름다움에 취해 졸음이 달아났는지도 모른다.
루블라냐에 도착하자 우리 일행은 분주해졌다. 오늘은 여행 마지막날 저녁, 바로 즉석 길거리 공연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기타와 의상, 메이크업 도구를 챙기고 우리는 서둘러 광장으로 향했다.
공중그네를 타는 회화들
광장에 도착하자 마자 내 두 눈을 사로 잡은 것은 공중에 두둥실 떠있는 회화들이었다. 마치 서커스의 공중그네를 타듯 회화들은 아슬아슬하게 외줄에 매달려 광장의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림들을 보기 위해 고개를 젖히니 한동안 잊고 살았던 하늘과 구름까지 함께 두 눈에 들어온다. 언제나 미술관에서 살아오던 그림들이 벽에서 탈출해 하늘로 도망친 것이다. 이제 그들의 뒤에는 표정 없는 미술관의 벽이 아니라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는 자신의 색을 바꾸는 하늘이 있다. 이제 그림들은 하늘의 빛에 따라 다른 표정을 지으며 광장에 오는 사람들을 맞이할 것이다.
‘회화를 전시한다’ 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흔히 미술관의 긴 회랑을 떠올린다. 고급스런 인테리어로 단장한 미술관의 벽면에 아늑하고 부드러운 조명을 받으며 도도하게 걸려있는 그림들은 마치 큰 저택에서 드레스를 입고 품위 있게 앉아 있는 귀족 부인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곳 루블라냐 광장에서 만난 공중 전시회의 그림들은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별 것 아닌 일에도 꺄르르 웃어대는 건강하고 발랄한 말괄량이 소녀를 떠올리게 한다.
하늘의 그림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한껏 젖히니 문득 시선의 변화라는 것이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눈높이에서 감상하던 그림들을 높이 올려다보니, 무엇인가 뭉클한 기분이 든다. 같은 대상을 바라보더라도 이처럼 약간만 보는 각도를 달리하면 그 동안 미처 몰랐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늘 같은 각도에서 고정된 시선을 보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대상의 진실된 모습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스쳐보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선생은 제자들에게 교탁 위에 올라가 교실을 바라보라고 주문한다. 늘 같은 각도에서 바라보았던 교실이 교탁 위에서 내려다보니 새로운 공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만 보는 시각을 달리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달리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난 어린 시절 특히 이 장면을 좋아했는데,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졌던 것이 아마도 어린 내게 큰 깨우침이었나 보다. 그리고 루블라냐의 광장의 하늘을 나는 그림들을 보니 ‘다양한 시선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