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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8일 11시 07분 등록
 

해외수업 : 2009년 8월 6일(목)-- 8월 14일(금)

주제, 제시어 :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여행지의 역사



크로아티아를 다녀오겠다고 지인들에게 말했다.

떠나기 전에 잘 다녀오겠다고 열흘 후에 , 다시보자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세르비아, 잘 다녀와라.” “발칸반도 위험하지 않니?” “유고슬라비아 말이지?”

아무도 단독 크로아티아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크로아티아는 남동유럽 발칸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HRVATSKA" 그 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쓴다. 세르보-크로아티아어다. ‘흐르바츠카’ 라고 읽고 줄여서 “HR" 이라고 쓰기도 한다. 물론 공항에도 이렇게 써 있다. 정식 명칭은 크로아티아 공화국이고 유고연방 6개국가운데 하나였다가 1991년 6월에 독립하였다. 우리나라와는 1992년 수교하였다.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역사를 읽어보자.


옛날에 일리리아족(族)으로 구성된 크로아티아주민들은 BC 3세기에 해안과 내륙지방에서 로마·켈트족과 교류하였다. 4세기에 고트족, 5세기에 훈족의 침입을 받았으며 6세기에 북쪽으로부터 슬라브인과 아바르인이 유입되었고 7세기 중반에는 남(南)슬라브계 크로아티아인이 사바강 상류지역 주변에 정착하였다. 9세기에 처음으로 크로아티아라는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925년 족장(族長) 토미슬라브가 왕위에 오르면서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하여 그 뒤 약 200년간 존속하였다. 11세기 후반 크로아티아의 가장 위대한 영웅인 P. 크레시미르 4세 통치시기에는 황금시대로 불릴만큼 번창하여 달마티아까지 지배하였다.


1102~1527년까지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고, 그 시기 가운데 1202년 베네치아가 달마티아 일부를 차지하였으며 1242년 몽골의 침입을 받았다. 15세기 후반 모하치싸움에서 오스만 투르크에게 패하여 항가리 합스부르크가(家) 페르디난도 1세에게 왕위를 빼앗긴 이후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제국 영토에 속해 있었다.


나폴레옹이 이 지역을 일리리아 제주(諸州)로 통치하였던 1809~1813년까지 항가리 통치에 반대하고 크로아티아의 자치와 슬라브민족 단결을 도모하는 민족의식이 싹터, 일리리아 운동이 일어났으며 1848~1849년에는 크로아티아군이 항가리혁명군과 대치하기도 하였다. 1868년 헝가리 일부로 편입되었으나 헝가리와 협정을 체결하여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헝가리와의 불평등한 지위관계가 지속되자 크로아티아인의 불만이 확대되어 독립 요구 운동과 유고슬라비아 통일운동이 전개되어 1918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왕국(1929년 유고슬라비아로 개칭)으로 통일되어 1945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하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세르비아공화국과 민족분규를 일으켜 오다가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공화국과 함께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다.


여기에서 잠깐 발칸반도의 역사가 설명되어야 할 것 같다.


*발칸 반도(Balkan peninsula, 영어로는 보통 Balkans)는 유럽의 남동부에 있는 반도이다. 또 여기에 위치한 국가들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보통 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터키의 유럽 부분, 그리고 구유고연방의 일부였던 나라들이 발칸 반도에 포함된다. 루마니아가 포함되기도 한다.


발칸 반도는 불가리아 중부에서 세르비아 동부에 걸친 발칸 산맥에서 이름을 따왔다. 발칸은 "산"을 뜻하는 터키어에서 나왔다.


아드리아해, 이오니아해, 에게해, 마르마라해, 흑해에 둘러싸였지만 유럽 대륙과 확실하게 구분짓는 지협이 없기 때문에 발칸 반도의 범위와 지형적 경계를 정하는 기준이 언제나 일정한 것이 아니다.

최근 시사적으로는 보통 발칸 반도에 포함되는 국가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

마케도니아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불가리아

세르비아 (코소보 포함)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터키 - 이스탄불 주변에 있는 유럽에 속한 부분만 여기 포함된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루멜리아 또는 동트라키아로 불린다.


*발칸 반도 분쟁사


1. 그리스 터키 분쟁: 키프러스 섬의 영유권문제로 분쟁 현재는 유엔 중재 하에 자치독립국


2. 유고 분쟁: 유고분쟁은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분쟁,  코소보 분쟁, 마케도니아 분쟁, 등으로 구분한다.


2차 대전 이전에는 사실상 유고라는 나라는 없었고 지금처럼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 6개의 소국으로 분리되어있었다.


조세프 티토라는 빨치산(저항부대)지도자가 종전이 되자 발칸지역 6개 나라를 통합하여 건국한 것이 유고슬라비아이다. 이때 통합을 주도한 나라가 세르비아인데 원래 이 나라가 1차 대전당시 분쟁의 화근이 된 사라예보 총격사건의 진원지였고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계였으며  유고 통합과정에 소련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티토는 유고 건국이후 소련의 위성국가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어냈고 소련공산당과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티토는 새로운 방식의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위해 세르비아 중심으로 국가대통합을 이루었지만 근원적인 민족 언어 종교 등 이질적인 문제는 통합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90년대 티토의 사망 후 다시 6개 나라로 분리되어  카톨릭권은 유럽으로, 동방 정교파는 러시아 쪽으로, 이슬람파는  미해결상태로 우왕좌왕하다가 보스니아 사태, 코소보 사태, 세르비아 인종청소라는  비극까지 낳고 말았다.


 유고는 공산화 되는 과정에 다른 나라와 특별한 과정을 거친 것은 국가 통합 쪽에 무게를 두어 정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민중 탄압이나 다른 국가처럼 공산당식 혁명은 없었다. 그래서 서방세계에서도 티토의 위대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유고는 발칸의 화약고, 혹은 123456의 나라라고 했다.

사분오열되어있던 나라를 2차 대전이후  티토라는 용장이 나타나 국가를 통합하여 유고슬라비아라고 했다가 티토사후 자유화 물결에 힘입어 나라가  6개로 나누어저버린 비운의 땅이다.


1. 유고라는 한나라 

2. 두개의 언어 슬라브와 이슬람

3. 세개의 종교 카톨릭, 이슬람,  동방정교

4. 4개의 인종 슬라브족, 세르비아족, ,이스람족, 게르만족

5. 5개의 국가연합체(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6. 6개의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하여, “ 1-6의 나라 ” 라고 하였다.


티토사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로 분리되었다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은 일찍이 독립하여 유럽 쪽으로 붙어버렸고

나머지는 유고의 주축인 세르비아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반대  일으킨 전쟁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태 이며,  세르비아내 알바니아 계와 싸운 전쟁이 코소보 전쟁 이다. 인종청소기 라는 밀로세비치가  학살하여 보스니아 사람 30만 명과 알바니아주민 일부가 난민신세가 되고 말았다.


UN은 1998년 3월 부터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고 이어  6월부터 코소보사태에 대한 개입을 선언한 미국과 유럽연합은 나토군을 코소보에 파견하여 세르비아의 작전을 중지할 것을 요구, 이에 불응하자 나토는 세르비아에 공중공습을 감행하여 사태발전 3개월 만에  세르비아와 평화협상을 이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복잡한 민족적, 종교적, 언어적 다양성에 기인한 충돌은  결국 유엔의 강력한 제지와 밀로세비치(얼마 전 감옥에서 사망)의 퇴진으로 코소보가 독립하고 이어서 몬테네그로도 국민 투표에 의해 분리 독립했다.  결국 신 유고연방은  완전히 분해되어 3등 국가로 전락했다. 코소보는 유엔의 승인 하에 2008년 2월17일 독립을 선언하였고, 몬테네그로도 분리독립했다.


 이상이  유고 분쟁의 약사이다.


 크로아티아의 의회는 양원제이며 1992년 8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민주크로아티아공산당(HDZ)의 프란요 투즈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원으로서 티토대통령 지도 아래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유지하였으나 경제난과 소련 및 동유럽 변혁의 영향을 받아 1991년 6월 슬로베니아와 함께 독립을 선언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연방파인 세르비아는 슬로베니아의 독립은 묵인하였으나 크로아티아에 대해서는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정부 아래에서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단체인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인 수십만 명을 학살함으로써 시작된 민족감정의 대립 때문이었다.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내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에 민족분규가 재연되자 세르비아인 보호를 목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개입하고 EC가 중재를 하였으나 실패하여 1991년 9월 전면전에 돌입하였다.


그해 11월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1992년 1월 EC와 영국·프랑스·벨기에 등 유럽기구와 국가들이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1992년 4월 유엔평화유지군이 배치되었지만 충돌은 계속되었으며 5월 국제연합에 가맹, 7월에는 세르비아와 전쟁 종결을 선언하였다. 1996년 신유고연방과의 분쟁을 끝내고 1999년 7월 보스니아와 국경 협정에 서명했다.


주민은 남슬라브계 크로아티아인 77.8%, 세르비아인 12.2%, 기타 민족 13%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며 라틴문자를 쓴다. 크로아티아는 748년 프랑크왕국 통치를 받아 카를대제 때 로마 가톨릭교를 받아들였고 남동부에 있던 세르비아인들은 비잔틴제국의 영향을 받아 세르비아정교회를 받아 들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서 자그레브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공항에 머물렀다. 여기 저기 다니다가 처음으로 소통을 시작했다. “굴라시”를 두 그릇 주문했다. 굴라시....굴라시... 우리나라 육개장에 가장 가까운 맛인데 한 그릇은 젊은 부부에게 사이좋게 나눠먹으라고 권하고, 한 그릇은 그야말로 모두 모여와서 한 숟갈씩 맛을 봤다. 이국땅에서는 처음 먹게 된 음식이었다. 흔히 여행의 맛은 음식과 함께 온다고 했다.


굴라시는 항가리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흔히 유럽에서는 항가리 이야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것이 둘 있는데 곧, 굴라시와 집시 바이올린이다.  굴라시는 항가리어로는 구야시(gulyas)인데, 말 그대로 해석하면 ‘목동’ 이라는 뜻이 있다.  굴라시는 본래 양치기가 먹던 음식으로 소고기 ,양파, 감자, 파브리카를 넣고 끓인 진한 스프다. 조리법이 매우 간단하 다. 여러 가지 퓨젼이 있지만 원조 굴라시에는 밀가루가 들어가면 안되고 파브리카 이외의 감미료는 미나리의 일종인 캐러웨이만 허용된다. 전통 무쇠솥에 끓이면 훨씬 제 맛이 난단다. 푹 끓인 국물에 파브리카나 고추를 넣어 매운맛을 낸다. 얼큰하게 끓인 우리 육개장과 비슷하지만 소고기가 조금 더 들어있고 매운 맛이 모자란다.


 굴라시는 선홍색 파브리카 가루를 넣어 만드는데 그 바람에 항가리는 세계적인 파브리카 생산지가 되었다. 파브리카 식물세포에서 비타민 C를 발견하고 추출하는데 성공한 엘버트 센죄르지교수는 1937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는데 그가 바로 항가리인이다.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다시 우리끼리 모여앉아서 아이리쉬 크림을 한잔씩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자그레브로 떠났다.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의 수도로 러시아를 횡단해 런던까지 가는 Oriental Express가 지나는 동서양의 가교이며 철도의 요지였다.


자그레브는 1094년에 주교구로서 역사 깊은 두 개의 언덕인 그라덱(Gradec)과 캅톨(Kaptol) 부근에 세워져서 메드베드니차 (Medvednica) 산과 사바강 사이의 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자그레브는 마치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세 개의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상부도시(Upper town)는 지난 시절의 평화와 고요가 매혹적인 곳이고 하부도시 (Lower town)는 유럽의 거대 상업도시에 비길 만큼 활기찬 지역이다. 그리고 신 자그레브(New Zagreb)라고 불리는 지역은 현대건축과 도시화의 전시장을 연상케 하는 상큼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한때 아그람이라 불렸던 반 옐라치치 광장은 자그레브 중앙광장이며, 자그레브 시민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만남의 장이다. 이 광장의 주인 이름이 반 옐라치치이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장군이었던 요시프 옐라치치 백작(1801-1859)으로 1848년 유럽 대혁명 때 크로아티아의 독립과 농노제 폐지를 위해 항가리 제국에 맞서 싸웠던 국민영웅이다.


반 옐라치치 광장은 지난 250년간 자그레브의 심장이었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시내전차는 도시의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며, 동시에 수많은 거리와 대로가 광장으로 집결된다.


광장의 약간 뒤쪽에 자그레브 대성당이 있다. 대성당의 탑 두 개는 각각 104미터와 105미터로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솟아있다. 탑에서 울리는 은은한 종소리는 분주한 광장의 번화가에 마치 신의 축복처럼 울려퍼진다.


1622년부터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 지도자를 뜻하는 '반Ban'의 본거지 였으며, 1776년부터 크로아티아의 수도가 되었다. 1848년 유럽 대혁명 때, 크로아티아도 헝가리 제국에 대항해 봉기하였다. 당시 크로아티아 지도자 ‘반’으로 선출된 옐라치치 장군이 크로아티아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념비는 오스트리아 조각가 안톤 도미니크 페른콘의 작품이며 작품을 의뢰한 주체도 오스트리아 당국이었다. 바로 이점 때문에 1947년 크로아티아에 집권한 유고슬라비아 공산정권은 반 옐라치치를 오스트리아 정부에 협조한 반역자로 치부하였고, 기념비도 광장에서 제거하였다.


1990년 크로아티아가 다시한번 독립국이 되자, 반 옐라치치는 과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았다. 기념비 또한 제자리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과거 북쪽 항가리를 향해 서있던 모습은 현재 남쪽을 향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와 세르비아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이어 크로아티아는 1991년 독립 공화국으로 재탄생하였다. 자그레브는 여전히 수도의 지위를 지킬 수 있었다. 광장 북쪽 바로 뒤에는 전통시장 돌락(Dolac) 마켓이 있으며 자그레브 인근 농장에서 생산되는 신선하고 다채로운 과일과 야채 노점상이 수백 개 늘어서있다. 광장의 다른 쪽은 즈린예바츠 공원이 차지하고 있다.


*다음은 자다르로 이동했다.


Zadar는 인구 8만 355(1991). 달마티아지방의 해안에 있고, 아드리아해(海)에 면해 있다. 해안이 후미져서 천연의 양항(良港)을 이루고, 일부는 어항(漁港)으로 이용된다. 철도·도로·해안항로 등의 교통망으로 주변지역과 연결된다. 주변의 언덕에서는 포도·올리브 등을 재배하며 마라스키노·체리주 등의 리큐어가 특산이고, 이 밖에 담배·조선·어업용기기·편물기계 등의 공장이 있다. BC 4세기에 일리리아인의 도시로 건설되어, 야데르(Jader)라 일컬어진 오래된 도시이다. BC 2세기에는 로마의 식민도시였고, 비잔틴·베네치아의 지배를 거쳐 제1차세계대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1918∼1945년 이탈리아령, 1946∼1991년 유고슬라비아령이었다. 로마 유적이 남아 있고, 13세기에 은으로 세공한 성드나트의 대성당 등 많은 중세교회가 있는 관광휴양지이다. 크로아티아국립대학의 철학부, 고고학·민속학박물관도 있다.


*수페타르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령의 이 섬은 암석투성이의 산악지형으로 최고 고도는 778m로 비도바 산에 다달아 아드리아 해의 섬들 중에서 가장 높다. 섬 주민들의 주요생업은 농업과 어업으로 무화과 열매, 올리브, 아몬드, 포도주용 포도 등을 재배한다. 담수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크로아티아 본토로부터 물을 공급받아야 한다. 기계화된 대리석 채석업으로 대량 수출이 용이하며 소규모의 관광업이 발달했다. 주요촌락은 수페타르이며, 스플리트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을 짓기 위해 석재가 채굴되었던(AD 295~305) 작은 슈크리프 마을에는 옛 방벽이 있다. 이 섬은 고대 그리스·로마에 의해 정복되었고 그후 아드리아 해에서의 세력다툼이 있었다. 짧은 자치기간 후 다시 해적들과 두브로브니크(라구산 공화국), 베네치아, 보스니아,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의 외세에 정복되었다. 1918년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고슬라비아 유격대와 연합군 특수부대의 합동작전으로 1944년 독일군으로부터 브라치를 탈환했다. 면적 395㎢, 인구 13,824(1991).


*아름다운 지중해 도시, 스플리트


20만여의 인구가 거주하는 스플리트는 중앙 달마티아(Central Dalmatia : 크로아티아 남서부, 아드리아해(海) 가장자리를 끼고 있는 해안지방)의 중요한 항구 도시로 카스텔라 만(Kastela Gulf)의 동부와 스플릿 해협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크로아티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다.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어서 유럽에서 가장 태양이 강한 도시중 하나여서 다양한 식물이 이곳에서 서식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아열대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항구도시로 비약적인 발전은 철도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산업화와 함께 인구가 증가하면서 급속도로 도시개방이 이루어져, 현재는 달마티아의 경제, 산업, 문화의 중심지 역활을 하고 있다.


스플리트의 역사는 BC 295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이곳 스플리트에 자신이 거주할 궁전을 건설하라고 명령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BC 313년까지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서 살았고, 그 이후 계속해서 러시아 황제들이 사용하였다. 7세기 그리스와 로마의 몰락으로 고향을 잃은 이들을 받아들이면서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1420년부터 1797년까지 이탈리아 베네치아 사람들의 정복을 받았고, 1918년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 잠깐 동안은 프랑스 사람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도시 곳곳의 유적들이 유네스코 지정의 인류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아름답고 뛰어난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오파티아(Opatija) 


Rijeka Bay의 동쪽 40km가 넘게 쭉 펼쳐진 해안을 따라 자리잡고 있는 도시 오파티아(Opatija)는 베네딕트회 사원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도시로 1884년 이국적인 풍경으로 가득한 공원으로 둘러싸인 Angiolina 빌라라는 이름의 여름 별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관광지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그 후로 리조트와 많은 호텔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지금은 동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휴양지로 손꼽힐 정도로 유명해졌다. 과거 특히 겨울철이 되면 오파티아는 유럽의 왕과 황제들의 휴양지로 사랑받기도 했다.


오파티아의 해안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겨울에도 평균 4.7 °C 정도의 기온을 보이는 연중 따뜻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주변의 다른 해변마을에 비해 강우량이 적고, 습하지 않고, 일조량도 비교적 많은 편이기 때문에 해변 휴양지로 각광받을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도시인 것이다. 투명한 바다물이 아름답고, 특히 이곳의 해변은 울창한 나무로 가득 둘러쌓여 있어서 이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이다. 이런한 이유들로 정확히 딱 꼬집어서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계속해서 관광객의 수가 많아지는 관공도시로 자리잡고 있다. 해변에는 따뜻한 태양빛을 맞으며 한가로이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과 푸른 나무와 꽃들이 아름다운 공원을 거닐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축복을 받은 오파티아의 자연환경은 이곳을 역사적으로나 지질학적으로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유럽 각지의 대도시로 운행하는 다양한 철도 노선이 놓여 관광객의 접근 또한 용이해져 더 많은 사람들이 오파티아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슬로베니아


면적은 2만 273㎢, 인구는 194만 8000명(2002)이다. 인구밀도는 96.1명/㎢(2002)이다. 수도는 류블랴나이며 슬로베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정식명칭은 슬로베니아공화국(Republic of Slovenia)이다. 북쪽으로 오스트리아, 동쪽으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서쪽으로 이탈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국경선의 일부는 아드리아해(海)에 면하고 있다.


슬로베니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이다. 북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은 알프스 산맥의 동단에 해당하며 슬로베니아 최고봉은 트리글라브봉(2,864m)이다. 이 산에서 발원하는 도나우강(江)의 지류인 사바강이 북서에서 남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남부에는 석회암 대지가 침식되어 형성된 카르스트 지형이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길이 24km에 달하는 거대한 포스토이나 석회동굴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기후는 대체로 서안해양성 기후이다. 지하자원은 석탄·갈탄·납·아연·석유와 천연가스 등이 매장되어 있다. 전 국토 중 경지는 15%, 초원은 24%이며 산림지대가 54%나 된다. 주로 발생하는 자연재해는 홍수와 지진이다.

슬로베니아의 주민은 6세기부터 거주해온 남(南)슬라브 계통으로 슬로베니아인(人)이 91%를,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이 각각 3%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다. 언어는 슬로베니아인은 남슬라브 어군(語群)에 속하는 슬로베니아어(語)를 사용하고 있으나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어와 세르비아어를 사용하고 있다.


*슬로베니아의 역사


6세기에 남하한 남슬라브족(族) 중에서 북부 슬로베니아인들은 사바강 유역을 중심으로 627년 슬로베니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8세기에는 바이에른과 프랑켄에 속했으나 그후 카롤링거왕조의 프랑크왕국 치하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서유럽문화권에 편입되었다. 슬로베니아는 10세기에 신성로마제국, 14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슬로베니아는 연합국에 가담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전쟁을 치렀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이 패배하고 민족해방운동이 활발해져 종전의 국가 체제가 해체되자 다민족국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세워졌다. 1918년 12월 베오그라드에서 왕국의 성립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이 왕국의 영토로 그전부터 독립해 있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비롯하여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남슬라브족들의 땅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보이보디나, 달마티아, 슬로보니아와 함께 슬로베니아도 편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이탈리아·항가리에 점령되었으나, 대전 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성립과 함께 그 연방공화국의 하나가 되었다. 1991년 내전을 거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서 독립하였다.


1989년 9월 슬로베니아는 연방으로부터의 이탈을 명시한 공화국 헌법 개정안을 채택하였다. 1990년 4월 슬로베니아 공화국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공산당이 패배하여 5월에 비(非)공산정권이 발족하였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양 선진공화국은 연방 최대의 세르비아 공화국과의 민족대립이 심각하고, 경제적으로도 농업중심의 남부 공화국에 대한 경제부담으로 인한 불만이 컸다.


1990년 7월에는 주권을 선언하고 12월 국민투표 결과 90%가 독립을 지지하여 1991년 6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를 계기로 연방을 유지하려는 세르비아와의 대립이 격화되어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슬로베니아를 침공, 슬로베니아 방위군과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수도 류블랴나 공항을 연방군이 폐쇄하였다. 그러나 곧 휴전으로 10월에 연방군이 철수하였다.


1991년 12월 독일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승인하고, 1992년 1월에 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도 독립을 승인하였다. 5월에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함께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 가입하고, 8월 유고슬라비아가 독립을 승인하여 12월에는 독립 후 최초의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국가원수는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대통령(임기 5년)이고 밀란 쿠찬(Milan Kucan)이 독립 후 초대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997년 재선되었다. 의회는 상·하 양원제이며 주요 정당으로는 자유민주당·기독교민주당·국민당·인민당이 있다. 외교적으로는 EU(European Union:유럽연합),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 가맹이 최대 목표이다. 2001년 현재 국방비는 3억 300만 달러이며 군병력은 육군 약 9,000명이다.


슬로베니아는 발칸반도에서 가장 서유럽화가 먼저 정착된 지역으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6개 공화국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공업화된 선진지역으로 공업생산이 국민소득의 약 2/3를 차지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해체로 원자재 공급원과 제품시장은 상실하였으나, 구사회주의 경제권에 속한 국가 중에서 가장 안정된 경제전환을 통해서 1인당 국민소득도 중·동유럽 국가 중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토지이용은 전국토의 약 50%인 101만㎢가 산림이고 목장과 목초지를 포함한 농경지가 전국토의 27.9%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농작물 생산은 옥수수, 밀, 보리이며 그외에 포도·사과·올리브 등의 과일과 배추·시금치·홉 등이 생산된다. 목축은 소, 돼지가 주종을 이루고, 그밖에 닭과 말, 양이 사육되고 있으며, 우유도 생산한다.


슬로베니아 산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공업인데, 수도인 류블랴나를 비롯해서 예세니체· 마리보르· 트르지츠· 크리니크 등에는 제철·제강·기계·식료품·섬유·제지 등의 각종 공업이 발달해 있다. 주요 공산품은 시멘트, 강철, 알루미늄, 포도주, 펄프, 텔레비전, 면·모직물 등을 들 수 있으며, 그밖에 치즈·설탕·맥주·담배·자동차 등이 생산되고 있다. 광업에서는 탄화도가 낮은 아탄(亞炭)과 갈탄을 포함한 석탄, 원유, 천연가스, 납과 아연이 생산되고 있다.


해외무역은 1991년 수출과 수입이 각각 13억 달러로 국제수지상 균형을 이루었으나 2000년은 수출 87억 3000만 달러, 수입 101억 1000만 달러로 적자를 나타내었다. 1999년의 주된 무역대상국은 수입·수출 모두 독일·이탈리아의 순이며 대(對)EU(European Union:유럽연합) 무역이 3분의 2를 차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수출의 경우에는 공업제품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전기·운송기계를 포함한 기계류와 의약품, 가구, 비철금속 등이 있다. 수입품 역시 기계류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교통설비, 화학제품, 식료품, 연료 등도 많이 수입한다. 관광산업도 활발하다.


1994년 국내총생산은 5.5%, 1995년 8%, 2000년 4.6%의 높은 성장률을 이루었다. 공업 생산과 상품교역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물가상승률도 최근 5년 동안 10% 이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슬로베니아는 EU에 가입하기 위해 공공부문지출을 줄이고 복지예산을 삭감할 계획을 세웠다.


슬로베니아는 공업지역으로 생활수준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안정되어왔으나, 연방으로부터의 분리 후 세르비아와의 전투로 경제가 침체되고 1991년 인플레이션율이 250%를 기록하는 등 사회적 불안이 계속되었다.


교육은 7~19세까지는 의무교육으로 무료이고, 일반적으로 교육수준이 높으며 문맹률은 1% 이하이다. 슬로베니아 통신(STA)이 1991년 6월에 발족하였고, 주된 일간지로는 《제르》를 들 수 있다. 2001년 인구증가율은 0.14%, 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9.32명, 사망률은 9.98명, 유아사망률은 4.51명, 평균수명은 75.08세이다.


슬로베니아는 역사적으로 인근의 독일문화, 로마문화, 슬라브문화의 교차지로서 그 문화에 인접 3개 문화와의 연계된 요소가 많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은 슬로베니아인들의 문자해득과 문화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켰다. 1518년 주리즈 달마틴(Jurij Dalmatin)은 성경을 슬로베니아어로 최초로 번역하고 아담 보히릭(Adam Bohiric)은 슬로베니아어 문법서를 저술하여 문화적 기초를 세웠다.


한국은 1992년 4월 슬로베니아를 승인하였고 1992년 11월 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한편, 슬로베니아와 북한은 1992년 6월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수도인 류블랴나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 사무소가 설치되어 있다. 양국간에는 1994년 과학·기술협력협정, 1997년 문화협력협정, 2001년 원자력안전협력협정이 체결되었다. 2000년 현재 대한(對韓)수출이 1299만 달러이고 대한수입이 6323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제약원료, 회전기기이고 수입품은 자동차부품, 핸드폰 등이다. 한국인 교민 16명, 체류자 16명이 있다.


위로부터 하양·파랑·빨강의 3색기로서 왼쪽 위에 이 나라의 국장(國章)을 배치하였다. 국장은 이 나라 최고봉인 트리글라브(Triglav)산(2,864m)을 형상화한 방패 모습이며 파랑 바탕에 흰색의 산으로 구성하였고 산 그림의 하단에는 바다와 강을 나타내는 2개의 파랑 물결선이 있다. 국장 상단에는 3개의 노란색 6각 별이 있는데,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초까지 대(大)슬로베니아왕조를 이룬 첼레(Celje) 백작 집안의 문장(紋章)에서 유래한 것이다. 1991년 6월 27일 내전을 거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제정하였다.


유고슬라비아가 그들 연방에서 가장 작은 공화국이 붕괴의 현장을 떠나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던, 1991년 6월과 7월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슬로베니아에서는 일체 분쟁, 전쟁, 테러가 없었다. 반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에서 가장 쓰라린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슬로베니아는 부를 축적하며 주목의 대상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6개의 주요 지역으로 슬로베니아를 나눌 수 있다; 알프스산맥지역, 알프스 산맥부근 구릉지대, 구릉 아래 디나리치 카르스트(Dinaric karst ; 동굴과 땅밑으로 흐르는 강들이 있는 석회암지역), 47km의 아드리아 해안선을 끼고 있는 슬로베니안 리토랄 (Slovenian Littoral), 전 국토의5분의1을 차지하는 주로 동부와 북동부 지역 '저지대' 등으로 나뉜다. 내륙지는 다뉴브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바(Sava)강과 드라바(Drava)강과 아드리아해와 무라(Mura)로 유입하는 소차(Soca) 강에 의해 배수된다. 콜파(Kolpa)강은 크로아티아와의 국경선의 대부분을 이룬다.


2900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상당수는 슬로베니아 고유의 식물이다. 특히 트리그라프(Triglav) 국립공원에는 슬로베니아 토종 꽃들이 풍부하다. 슬로베니아에는 사슴, 산돼지, 샤무아(영양류), 곰, 스라소니 (모두 사냥한다) 등 유럽의 일반적인 동물 종류가 풍부하다. 야생 거북, 동굴 고슴도치, 풍뎅이딱정벌레, 다양한 산쥐류 등의 희귀 동물도 살고 있다. 모양이 변하는 뱀 종류인 '인간 물고기'는 슬로베니아 종유굴에 사는 고유한 동물로 세계적으로 가장 신비한 동물 가운데 하나이다.

다.


 국제 여름축제가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화행사이며, 음악, 연극, 무용공연으로 이루어진 축제는 류블리야나와 블레드(Bled)에서 7월과 8월 사이에 열린다. 보히니(Bohinj)에서 열리는Cows' Ball (Kravji Bal)는 소들이 고지의 목장에서 계곡으로 돌아오는 무렵인 9월 중순의 어느 주말에, 먹고 마시고 민속춤을 추며 흥청대는 축제이다. 가장 많은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이 축제를 즐긴다.


 *율리안 알프스


슬로베니아의 모험가들은 슬로베니아에서 제일 높은 2864m 높이의 3개의 봉우리가 있는 트리글라브(Triglav) 산으로 향한다. 이 산은 슬로베니아의 북서쪽 가장자리와 이탈리아를 관통하는 율리안 알프스 산맥을 관장한다. 주말이면 많은 전사들이 알프스를 찾는다. 하지만 모두가 야심에 찬 트렉킹을 하러 오는 것은 아니다. 옛날 슬라브인들은 이 산에 3개의 머리가 달린 신이 살고 있었으며 이 신은 하늘, 땅, 지하를 지배했다고 믿었다. 합스부르그 시대 이래 트리글라브산의 '순례여행'은 슬로베니아인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트리글라브는 국기에 잘 나타나 있다.


*블레드(Bled)의 전형적인 중세시대 성은 약 800년 이상 남부 티롤의 주교좌가 있던 곳이었다. 그 이 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족의 여름별장으로 쓰였다. 블레드 호수 위로 치솟은 절벽 위에 서있는 성은 뛰어난 전망을 가지고 있다. 주로 검과 갑옷이 진열된 성안의 조그만 박물관에서 이 지역의 역사를 가볍게 훌터 볼 수 있다. 호수의 서쪽 끝에 있는 블레드섬에는 '기원의 종'이라 불리는 종이 있는 16세기의 하얀 종루가 있다. 종을 울리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해져서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종을 울리고 또 울렸다. 블레드 남서쪽 30km에 있는 보히니(Bohinj)호수 주변 땅은 개발되지 않았고 웅덩이 모양의 계곡에서 그대로 높이 솟은 높은 산이 아주 아름답다. 트리글라브산으로 가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근처의 사비차(Savica) 폭포와 스타라 푸지나(Stara Fuzina)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블레드는 류블리야나의 북서쪽으로 51km 떨어져 있으며, 버스와 기차서비스가 잘 되어 있다.


*소차 계곡(Soca Valley)


청록색의 소차강이 흐르는 소차계곡은 트리글라브(Triglav) 국립공원에서 노바 고리차(Nova Gorica)의 이탈리아국경까지 뻗어있으며,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장소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세계 1차대전 중에는 백 만 명의 사람이 죽은 악명 높은 소차전선이 있었던 곳이며, 그 후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로 불멸의 장소가 된 곳이다.


소설은 당시 이탈리아 측에 의용군으로 참전, 적십자 병원의 운전병으로 근무하던 헤밍웨이가 부상으로 스위스 병원에 후송됐다가 간호사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진 그 자신의 이야기를 옮긴 자전적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코바리드 전쟁 박물관에는 헤밍웨이의 사진과 책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1917년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슬로베니아 연합군이 전방의 코바리드에서 이탈리아군대를 섬멸했다. 이것이 세계 1차 대전의 전기가 되었다. 상을 받았던 코바리드 반전박물관에서 과거의 이러한 사건들을 돌아보기 위한 방문객들이 지중해풍의 코바리드(Kobarid)로 모여든다. 헤밍웨이에게는 카포렛토(Caporetto)로 알려져 있다,


한편 2차 대전중 사막의 여우로 불렸던 롬멜 장군도 1차 대전당시 약관 28세의 독일군 중위로 이곳 소차에서 전격전(Blitzkrieg)을 이용했다. 즉, 소차계곡을 우회해 아탈리아군의 배후를 공격해서 사흘 만에 전세를 뒤엎는 전과를 올렸고 훗날 이 전법으로 연합군을 파죽지세로 몰아세우며 원수의 지위에 까지 올랐다.


*류블리야나(Ljubljana)


류블리야나는 관광객이 붐비지않는 작은 프라하이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크고 잘 알려진 도시이지만, 국가의 중요기관이 있는 산업화된 행정도시라기 보다는 청결하고 푸른 자족적인 분위기의 마을 같다.


에모나(Emona)라는 로마도시로 출발한 류블리야나에는 시 전체에 로마시대의 유산이 남아있다. 합스부르그왕조가 15세기에 통치한 후로는 희미한 색조의 교회와 저택을 많이 지었다. 그래서 이 도시는 '화이트 류블리야나'라는 별명을 얻었다. 1809년부터 1814년까지 류블리야나는 동부 아드리아 해로 진출하려는 나폴레옹이 일시적인 도약의 발판으로 건설한 '일리안 주(Illyrian Provinces)'의 수도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오랜 영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류블리야나는 그들 고유의 생동감 넘치는 슬라브적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류블리야나 대학에 다니는 약 2만 명의 학생들이 도시의 젊음을 지키고 있다.


 *류블리야나의 프레세렌 광장


프레세렌 광장은 중세시대부터 시장터를 위한 저장소로 설계되었다. 광장 주변에는 노점상이 즐비했으며 류블랴니차 강을 건너 광장으로 이어지는 다리도 그 시대에 이미 완성되었다. 19세기 류블랴나가 확장되면서 시장터는 다른자리로 옮겼고 지금의 프레세렌 광장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1895년 류블리야나는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오늘날의 프레세렌 광장은 지진이후에 새롭게 탄생되었다.  이 광장에 슬로베니아의 낭만주의 시인 프란체 프레세렌(1800-1849)에게 바치는 기념비가 첫 모습을 드러냈다. 시인의 머리위에는 자유분방한 모습의 뮤즈가 공중에 부유하듯 묘사되어 있다. 손에 월계관을 쥐고 시인을 보호하고 있다.


프레세렌의 직업은 변호사였지만 그가 조국에 남긴 유산은 아름다운 소네트(엄격한 구조와 운율을 가진 14행의 시)와 운문이었다. 특히 1844년에 발표한 “축배 Zdravljica"라는 시는 국민들 사이에 인기가 대단했는데 일곱 번째 연은 국가의 한소절이 되었다.

      

    “  슬로베니아여 영원하라

      밝은 미래를 꿈꾸며 투쟁하는 슬로베니아

      그날이 오면 지구별 모든 대지에

      어떠한 전쟁과 갈등도 슬로베니아를 지배하지 못하리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는 우리에게

      더 이상 적은 없으니, 모두가 이웃이어라.”

                       끝


 *** 일단 11명의 글이 모여야 하니까 자료들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전체적인 틀이 정해지면 조근조근무릎 문체로 다시 써야하겠지요?




IP *.248.9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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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8 13:00:33 *.249.57.210
언제 이렇게 많은 조사를 하셨어요. 여독도 다 안풀리셨을텐데...

선생님.
저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사랑하는 이들을 배려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일인지 참 많이 생각했어요. 어찌보면 인생이란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갈등이 더 많은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랑을 하면 저도 모르게 상대에게 크던 작던 상대도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일어나고
사랑을 하면 저도 모르게 상대에게 다가가기 위해 엄벙덤벙 대기도 하고.

고백하건데, 선생님을 향한 제 사랑이 많이 서툴러요.
그 때문에 저 혼자 당황해 한 적도 있었지만
서투른 저의 몸짓 하나, 표정 하나도 받아달라 말씀드리면 제 욕심이겠죠...

꿈벗에서 시작되어 연구원까지 이어진 선생님과의 인연입니다.
연구원이 끝나고 또 어떤 인연으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선생님을 안아드렸던 그 마음이 제 마음이었습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저를 안아주신 것 처럼요.
그 때 선생님의 품은 참 따듯하고 포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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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09.08.28 15:39:20 *.248.91.49
그래, 알아......
그리고 참 고마웠어.

그렇게 인연따라 강물처럼 흘러가다 보면.........바다도 만나고............등대도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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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8 23:29:43 *.145.58.162
저두 마찬가지였어요 선생님
크로아티아 간다고 하면 사람들이 '응? 어디?' 이랬죠 ㅋ
이번 여행에서 선생님을 더 깊이 알게되서 이해하게 된 것 같아 참 좋았어요
버스에서 음악들으면서 이런저런 얘기 나누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조근조근 문체 버전 여행기 곧 올라오는거에요? 와우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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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30 23:48:39 *.145.58.162
ㅎㅎㅎ 그럴땐 말이죠~ 선생님
더 휘돌아 다니세요~ ^^
그리구 밥 사주신다는건 언제든지 콜! 이죠
밥잘!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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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09.08.30 11:21:40 *.248.91.49
세이야, 나 클났다.
여기 들어오지 않으려면...
손가락이라도 어디 매달아야 하겠다.

무슨 수령동지께 경배하듯 제일 먼저 들르고
또 휘돌아다니니 말이다.

느릿느릿 반응하면서........

시간 도둑을 떠나보내야할텐데.....

세이야, 희석씨 돌아오면 같이 밥묵자.
내가 희석씨가 늘 COMPLETE  !! 를 해주어서 원활하게 그룹이 잘 돌아갈 수 있었기에
밥사줄게요! 했더니 잊어버리질 않더구나.

밥 사줬는데도 잊지않고 있으면 또 밥사줘야지... 너도 함께 사줄께....밥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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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희
2009.08.29 01:08:17 *.12.20.78
몸은 괜찮으신지요?
저자를 알고 책을 읽으면 더 잘 이해가 되듯이 여행지의 역사를 읽으니 더 감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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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09.08.30 11:28:48 *.248.91.49
라 트라비아타......

인터넷 서핑은 어떤 정보가 신뢰할 수 있는 정보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모든 정보를 다 읽어봐야 하는 것이 힘들어요.

덕분에 별별 상식이 많아져서...
동유럽 한번 더 댕겨와야 할 것 같아요.

한겨울 눈이 많이 올때
트리글라브 산에 오르면 그 경치 죽여주겠지?

더불어 사람도 반쯤 쥑여놓겠지만....뭐 ...하늘아래 그런 곳에서 얼어죽으면 ...그냥.10대 풍광에 적어넣을까보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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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9 08:06:08 *.40.227.17
좌샘~ ^^

생각해보니.. 이번 여행에서 좌샘과 이야기를 많이 몬나눈거 같아여..
근데여.. 선생님은.. 속은 여리고 여린.. 여인이시라는 거.. 저는..그걸.. 알게 됐어여.. ^^

크로아티아.. 공부 몬하고 갔는데.. 좌샘 덕분에.. 다녀와서 역사공부를 하게 되니..
오히려 새록새록..  조근조근.. 더 잘 들어 오는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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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09.08.30 11:35:59 *.248.91.49
그래, 혜향

우리는 한마디도 못한것 같아.
한번도 같이 밥 안묵고.....

역사공부하면 글쎄 거리의 포탄 자국들이 눈에 들어와....비장한 심사가 된다니까.....

사람들 마음속에 폭탄이 들어가면 큰일 나는데......

혜향아,

난 보기와는 다르게 여리지 않아 ㅋㅋ
난 폭풍처럼 강하고 호랑이 발톱처럼 사나우며 뱀처럼 길어.....

휘~이익,  어흥, 스르르르르르르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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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3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 - 패턴인식과 선택 숙인 2009.08.23 4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