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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5일 10시 59분 등록


피터 드러커는 오래 살았다. 그는 90대까지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했고, 도대체 은퇴를 언제 할 것이냐는 질문에 스케줄이 빡빡하게 적힌 수첩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의 역할 모델인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드러커는 오래 살아남은 만큼 재미있는 책도 남겼다. 바로 이번 주 과제도서였던 <피터 드러커 자서전>이다.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만큼 ‘나는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무얼 했고, 그때 만난 사람은 누구’라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자서전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 속에 생생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자신이 겪어 왔던 시대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인다. 그는 견습생, 증권분석가, 기자, 칼럼니스트, 컨설턴트, 교수라는 다양한 직업을 통해, 그리고 다양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 중에 흥미로운 점이 없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한다. 사람에 대한 무한 호기심이다.

그는 결국 사부님이 늘 강조하시는 미시사의 중요성, 즉 ‘개인들의 역사를 통해 사회가 구성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책에서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한데 합치면, 개인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구성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아흔을 바라보던 이 할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왔던 시대를 ‘살아남아’ 저술하고 있다.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의 상황에 대해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유럽에서 살았던 이로서 증언하고 있다. 살아남아 기억한다는 점에서 <살아야한다 나는 살아야한다>의 저자 마르틴 그레이가 떠올랐다.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다. 프로이트와 슬론 정도를 제외하면 한 시대를 풍미했더라도 지금까지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거의 없다. 이들은 드러커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었고, 그 기억 덕분에 부활해 빛을 보게 되었다. 드러커에 의해 잘못 기억되고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더라도 이미 망자가 된 이는 할 말이 없다. 오직 드러커에 입에 의존해 기억될 뿐. 그런 점에서 나는 살아남아 기억하고 글로 이를 남기는 사람이 바로 승자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나의 역사를 남기고,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일 테다. 나이가 들면 추억을 곱씹으며 살게 된다지만, 최대한 객관적인 기억을 남기기 위해 미리부터 인상적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남기고 이를 파일로 체계화해야겠다. 혹시 아는가? 나도 어쩌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100세쯤 오래오래 살아서 나의 동시대 사람들을 통해 사회까지 비출 수 있는 이런 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꼭 기억할 점이 있다. 기억하는 자의, 살아남는 자의 기본적인 도덕성과 책임감의 문제이다.

이 책의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GM의 경영자 앨프레드 슬론의 자서전 출간에 관련한 에피소드였다. 그는 약 5년 간에 걸쳐 <제너럴모터스와 함께한 나의 삶>이라는 책을 완성했다. GM을 떠나던 때 거의 완성된 그 책을 가지고 그는 GM의 이사들을 찾았다. 책에서 그들 자신이 거명된 부분을 일일이 보여주고 사실이 맞는지 확인해달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뭐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는 자신의 책에 우호적으로 묘사되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책을 발행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때 슬론의 나이는 이미 일흔여덟 살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예전 동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대신 출판을 하기까지 10년을 더 기다렸다고 한다. 독촉하는 편집자에게 “내가 끝까지 살아남는 요행을 바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라고 말했던 그는 결국 자기가 책 속에 언급했던 모든 사람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책을 출간하고 난지 1년 후에 눈을 감았다.

이 대목에서 누가 떠오르는가? 바로 지난주 과제도서의 주인공이었던 칼리 피오리나가 아닌지. HP에서 축출되고 난지 1년 만에 회고록을 써 감정의 소용돌이가 채 정화되지도 않은 채 자신의 옛 동료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사람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평가를 해서 독자들을 당황시켰던 그녀. 국내에서도 얼마 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소설가 공지영씨가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을 출간한다고 하자 전 남편이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했던 일이 있었다.

실은 나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어떤 이의 책에 누구의 사례라며 사전 허락도 없이 나의 개인적 삶이 실린 적이 있다. 다행히 좋은 의도로 쓴 사례였지만, 그리고 책은 별로 많이 팔리지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내 사례로 자신의 책의 한 장을 거침없이 채워 넣은 그런 경우를 보면서 나는 참으로 그 사람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 좀 더 망설이고 또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주춤하게 되는 데 이 사건은 크게 한 몫을 했다.

자신의 경험은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기억은 자신의 주관적 감정과 상황이 뒤섞인 것이다. 자신은 유명인이라, 글을 쓰고 파급효과를 줄 수 있지만 상대편은 평범한 소시민이라 어디에 자신의 처지를 변호할 수도 없을 때, 살아남아 기억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일방적인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 글을 쓰고 책을 남기려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기억하고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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