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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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끼지는 않는다. 아직도 의례적인 모임보다는 혼자 노는 것이 낫다. 사람들이 나누는 친밀감의 위력에 대해 내가 잘 모르나 보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 사이에 속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한 인간은 없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정혜신의 그림에세이를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혜신은 그림에세이 ‘책 한 권 한 줄’에서 자기 주변의 다독가를 소개하며 글을 시작한다. 그는 일단 눈에 들어온 책은 크게 가리지 않고 구입하고 본다고 했다. 씀씀이가 헤퍼서가 아니라 “책 한 권에서 한 줄만 건지면 성공한 것인데 무얼 그리 따지냐, 이것저것 따질 시간에 책을 한 권 더 읽는 것이 낫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어서 정혜신은 ‘책 한 권 한 줄’ 정신을 사람에게도 적용시키고 있었다. 그저 술 한 잔 할 사람을 선택하면서 배우자 고르듯이 하거나, 카풀할 사람을 고르면서 평생지기를 고르듯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서 바람직한 점 한 가지만 있으면 서로 어울릴만하다는 말에 접하며 아차! 싶었다. 나의 과도한 의미중심이 철퇴를 맞는 기분이었다. 딱 내가 그랬다. 좋고 싫은 것이 너무 분명하다 보니, 모든 것을 all or nothing으로 나누곤 했다. 그야말로 어쩌다 술 한 잔을 하는 사이에도 평생지기를 기대한 꼴이었다.
정신분석학자 융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 감추어진 채로 남아있는 인격을 ‘그림자’라고 불렀다. 융에 의하면 그림자는 ‘감추어지고 억압되는 동시에 열등한, 죄 많은 인격으로서 그 가장 밑바닥 단계는 동물의 충동성과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림자는 의식될 기회를 잃었으므로 다분히 원시적인 심리적 특징들이다. 때로 미숙하고 열등하고 부도덕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해서 자아가 자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리게 된다. 하지만 융은 그림자를 상실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구체적인 현실이 상실된 동시에 삶을 인식하는 데 있어 전체성이 파괴된 상태를 뜻한다고 하였다. 영화나 책에 등장하는 ‘그림자 없는 사람’이 유령에 불과한 것처럼, 그림자는 인간의 존재조건인 셈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단점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내가 보고 싶은 모습만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자가 없는 인간이 없는데 그림자를 부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아닌 나의 희망이 투사된 허구를 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단점과 그림자를 동일시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일 수도 있지만, 단점이 억압된 인격 즉 그림자에서 촉발되는 결핍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면 그다지 다른 말도 아닐 것 같다.
누구나 사랑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성숙한 사람만이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한 사람의 그림자까지 껴안는 일은 환상이 아닌 실제로 나아가는 길이니, 성숙한 사람의 표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에는 어떤 사람의 예기치 않은 측면에 접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고 팔팔 뛰다가 마음을 거두어 들였다면, 앞으로는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야말로 한 사람에게서 바람직한 점 한 가지만 발견하면 기꺼이 어울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능숙한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고 한다. ^^
참고도서: 고영건 안창일, 심리학적인 연금술, 시그마프레스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