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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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들어본 두 가지 경험
나의 첫 책을 쓴다고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겪으며 돌이켜 보니 내가 이미 책을 만들어본 경험이 두 번이나 있었다. 지금 나는, 엄연히 말하면 내 인생의 세 번째, 네 번째 책을 기획하는 중인 셈이다.
첫 번째는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생일 선물로 영어책을 만들어 주었던 기억이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빳빳한 도화지를 마련해 책의 속지 모양을 만들었다. 거기에 내가 직접 배워보니 이런 게 꼭 필요하겠더라 싶은 내용을 직접 지어 하나하나 손으로 적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초록색, 하늘색 표지를 한 수십 년 전통의 ‘OO종합영어’ 따위가 나를 괴롭혔기에 내 동생에게는 좀 더 쉽고 재미있는 영어 책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손으로 쓴 책은 또 손수 본드 제본을 했다. 본드를 발라 표지를 붙이고 수정액으로 제목을 그려 넣어 주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 책의 표지는 내가 좋아하는 진한 보라색이었다. 직접 지어 제본까지 해준 나의 한 권뿐인 첫 책은 동생의 부주의로 지금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걸 만들었던 추억만은 깊이 남아있다.
두 번째 책은, 2년 전의 일이다. 회사를 휴직하고 대학원으로 돌아와 공부에만 전념하자니 몸과 마음은 공부에 피폐해져만 가고, 일을 하지 않고 있으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때마침 학교 내 경력개발센터에서 해외 인턴십 관련 일을 해줄 파트타임 연구원을 구한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연구원’이라는 직책을 가져보지 못한 터라 그 이름에 대한 괜한 로망도 있었고, 해외 인턴십 관련 일을 하는 것이 향후 외국에서 일하는 데 좋은 발판이 될 거라고 했다. 이듬해 교환학생으로 출국하는 것이 확정되었으니, 이후 커리어에 아주 도움이 될 만한 길이었다. 촉박한 시간에 한영, 영한 번역 시험과 진땀 나는 영어면접을 거쳐 드디어 일을 하기로 확정됐다. 내가 가장 먼저 맡은 일은 그 동안의 프로그램 성과를 묶어 책을 내는 일이었다. 해외 인턴십 나갔던 학생들의 수기집인데, 책의 기획부터 인터뷰 대상자 선정, 섭외와 취재까지 내가 도맡아 했다. 교내 기관에서 펴내는 것이라 비매용으로 기획했으나 워낙 이 분야 책이 없었던 터라 추후 판매용 단행본으로까지 염두에 두게 되었다. 출판사와 단가 관련 회의를 하고 인쇄 과정을 논의하는 것이 나에게는 모두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하면서 가슴 벅찼던 경험으로 나는 ‘공부를 안 하게 되면 어쨌든 책 만드는 일을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 번째 책 후보는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책이다. 이번에도 가장 사랑하는 동생에게 주는 나의 사랑 가득한 마음이 책을 만드는 동력이 될 것이다. 동생이 예상보다 일찍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조금 골치가 아파진 상황에, 책을 생각보다 빨리 써야 할 것 같다. 처음 이런 책을 쓰겠다고 발표를 할 때보다 더욱 절박한 마음으로 말이다. 결혼을 준비하는, 내가 딸 같이 키운 동생에게 주는 사랑 혹은 잔소리로 가득한 책이 되리라.
또 하나 생각하고 있는 비밀스런 책이 있다. 나의 개인사를 내 아이에게 주는 식으로 바꾸어보는 것이다. 물론 양도 늘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지만 내 자식에게만큼은 ‘엄마가 이렇게 살아왔었다’고 고백하는 책으로 말이다. 이건 흘러가버리는 부모, 조부모의 역사를 하나라도 놓치기 싫고, 취재(?)하고 싶었던 나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해 생일을 맞은 동생에게 골라 선물한 책이 있는데, 제목이 <매뉴얼>이다. 영국 여성이 쓴 소설이지만 돌아가신 아버지가 죽기 직전 어린 딸에게 ‘몇 번째 생일에 이걸 보거라’ 하는 식으로 글을 남겼다는 설정인데, 아버지의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느껴져 나뿐만 아니라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동생에게까지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내 뱃속의 아이에게, 엄마의 역사를 일일이 알려주고 이 시기에는 이런 일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러고 보니, 결국은 아주 구체적인 ‘사랑’만이 답이다. ‘사랑하는 대중’이라는 추상적이고 보이지도 않는 대상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서,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쓰고 싶은 것만이 터져 나오니 말이다. 결국은 사랑만이 이 무뎌진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그 만고의 진리를 지난주 니체의 사상(‘아모르 파티’)과 이번주 장영희 교수님의 번역시집에서 다시금 배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