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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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수녀원에 들어가겠다는 친구의 ‘선포’를 들었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모자라, 친구까지…… 올해의 마감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충격 선언’으로 점철되는듯했다. 이미 성인인 본인들이 결심하고 내지른 이상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그 두 가지 일 때문에 가뜩이나 내 몸도 추스르기 힘든데 정신은 온통 그 쪽에 쏠려 있었다. 1월에 동생을 시집 보내고, 3월 초에는 그 친구를 수녀원에 들여보내야 하다니, 그 엄청난 상실감은 또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싶은 이기적인 생각이기도 했을 것이다.
같은 대학 성당 관련 모임에서 만난 그 친구와 나는 참 많이 닮았다. 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안 계신다는 점도, 학문으로서의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면서도 사회적 성취욕구가 매우 높아 그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데다가 사회의 적당한 부조리를 그냥 넘기지 못하고 분개한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아마도 우리가 믿는 종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희망을 바보처럼 아직도 품고 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닮았다는 사실을 몰랐던 우리는 대학 시절 지금처럼 절친하지는 않았다. 사회에 나와서 여기저기 부대끼고 깨져가면서, 또는 조심스레 만났던 남자친구 이야기, 거기서 받은 상처를 꺼내며 점차 우리가 참 닮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영혼을 나누는 친구처럼 우리는 서로를 척 보면 척 할 정도로 잘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친구가 수녀원에 가겠다는 결심을 나에게 가족이나 신부님보다 먼저 말한 것도 아마 그런 믿음이 있어서였을 테다.
사람에 대한 평가가 무척 인색한 편인 나이지만, 이 친구의 지적 능력에 대해서는 대학 시절부터 경외감을 가져올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농담처럼 그녀를 ‘천재’라고 불렀다. 그녀가 서울대 대학원이나 유학을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공무원이 되고 방송통신대학에 편입해 관련 공부를 이어갈 때 가장 안타까워했던 사람도 나였다. 그 머리에 행정고시를 보지 않고 한두 달 만에 후딱 공부해 9급 공무원으로 서둘러 들어가버린(전공자도 아닌데 한두 달 공부해 합격했다는 데서도 그녀의 비상한 머리를 엿볼 수 있다) 직장도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의 다른 친구는 2년을 투자해 5급으로 들어갔으니까. ‘너는 공부를 해야 할 사람인데……’라고 내가 말할 때마다 자신을 그렇게 높이 평가해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며 고맙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부양해야 하는 엄마와 오빠가 있었다.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가는 것조차 가족 때문에 주저했던 그녀였다. 이제 좀 직장에서 안정을 찾아가는가 싶더니 돌연 수도자가 되겠다니,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수도자들의 삶을 존경하지만, 그녀의 능력은 사회에서 발휘해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생글생글 웃으며 “너한테 이렇게 두 시간 넘게 설득을 당했는데도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정말 이 길인가 봐”라고 말해 내 속을 뒤집어놓았던 그녀가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그제서야 나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슬며시 웃었다. 그리고 “네 생각대로 그렇게 수월하게 풀릴 줄로만 알았니?”라고 말했다. 웃음이 나왔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내가 3년 전 대학원에 전업학생으로 돌아가면서 당했던 수모를 그녀도 겪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곳에 다가가면서 당한 상황이 너무 똑같아서 우습기까지 했다. 젊은 여성 치고는 나름 사회에서 한 자리씩 하며 떵떵거렸던 내가, 그리고 그녀가 그 정도의 ‘걸림돌’에 지나치게 당황하고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리라. 그녀 역시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안 해도 될 직급을 가졌었으니까. (그게 새파랗게 젊은 내게 독이 될 줄을 알고, 그 곳을 빠져나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지.) 그녀에게도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냉정하기만 한 사회의 그 수련 과정이.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행보를 보일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는 이번 과정을 통해 무언가를 많이 배울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 배움이, 이번 ‘일탈’적 행동에서 얻는 최대의 수혜일지도 모르겠다. 아프고 같이 깨져나가면서도 친구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보람된 일이구나. 이런 과정을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나는 그저 그녀가 어디서도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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