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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1일 00시 56분 등록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

몇 십 년 만에 큰 눈이 내렸다. 밤새 소리 없이 내린 그 작은 눈들이 커다란 도시를 하얗게 덮었다.  사무실 창 밖으로 비쳐지는 거리는 아직도 치워지지 않은 눈으로 덮여 있다.  찻길 옆 인도 위에는 두툼한 눈이 쌓여있고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녹지 않은 인도를 비켜서 차들이 만들어 놓은 도로 위의 딱딱한 눈 위를 종종 걸음으로 지나다니고 있다.  테이블 위에 열쇠를 아무 생각 없이 올려놓고 의자를 뒤로 빼내어 앉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거리로 보내어 둘러보고 있었다.

저 만치 길 모퉁이에 시선이 멈추었을 때, 까만 바바리를 입은 키 큰 남자가 발이 푹푹 들어가는 인도의 눈 위를 걸어 지나 갔다. 그러고 나자, 사람들이 그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맞추어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커피를 다 마셨을 즈음에는 키 큰 남자의 발자국은 사라지고 눈 덮인 인도 위에는 좁다란 새 길이 나 있었다.

 

전화가 왔다.

선생님! 어디세요? 저희들 다 모였는데요 희애가 마지막으로 곧 도착할 거 같습니다.

그래, 알았다, 정인아,  나도 곧 가마…”

전화를 끊고 테이블 위의 장갑을 들어 손에 끼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고개를 돌려 흘낏 눈 위에 나 있는 길을 보았다. 그리고 그 길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작은 길이 나 있고 조금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다시 그 길 위로 내리고 있었다.  언듯 입가에 작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차장 쪽으로 난 문을 향해 걸어갔다.

 

펜싱클럽이 있는 지하실 입구의 인터폰의 벨을 눌렀다.

네 선생님!

흥분해서 들떠 있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여왔다. 클럽의 문을 열고 들어 섰을 때 모두들 달려와 인사를 했다.

선생님, 잘 자내셨어요..  다들 모였어요 벌써 난리에요

신이 났죠 오랜 만에 이렇게 다들 모였으니, 자리에 앉자마자 옛날 이야기하느라 신이 났어요.. 정인이 말했다.

희애, 난지. 연정 모두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팔을 붙들며

선생님, 빨리요..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 출전했던 그들은 몇 해 전부터 해 마다 겨울이 되면 한 번씩 모여서 조촐한 파티를 열고 그 때를 기념하고 있었다. 이제 모두들 아이 엄마가 되어 각자의 생활에 바쁘지만 이렇게 일 년에 한 번 모여 이야기 꽃을 피웠다.

1995년에 있었던 작지만 소중한 승리를 기념하는 모임이었다. 올림픽 본선 출전은 그 당시 상황으로서는 불가능한 목표였다.  모두들 올림픽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올림픽 본선 티켓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마가 복음 9 29-

 

 

1.

 

!

전 지금, 두렵습니다.

선생님은 대표팀에 다시 복귀해서 올림픽 팀을 맡을 것을 말씀하셨지만, 나는 망설였습니다.

이유야 형도 잘 알고 있듯이 86년 이후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약체로 알려졌던 일본에게 까지 져버린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의 실패로 선수들의 사기는 완전히 무너졌고, 회장마저 공석인 협회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고 체육회로부터 유럽으로 전지훈련을 갈 수 있는 지원은 커녕, 코치들에게 지급할 급여마져도 어디서 충당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거기다가 내 후년의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예선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비대해진 올림픽은 제한된 경기일정에 시합을 마치기 위해 그 규모를 제한하게 되었고 펜싱 종목은 300명만 출전할 수 있게 규정되었습니다. 그 숫자를 펜싱의 남녀 플러레, 남녀 에뻬 그리고 남자 사브르의 세부 종목별로 나누면 한 종목당 대략 10여개 팀만이 출전할 수 있습니다.  아직 세계 무대의 개인전에서 성적을 내기 어려운 우리는 그래도 가능성이 조금은 더 나은 단체전에 희망을 걸어 왔는데, 이젠 그것마저 어렵게 되었습니다.  올림픽 본선은 주최국을 제외하고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결승 8강에 들어간 나라 중 7개국만이 참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세계선수권대회는 대략 60여 개국이 출전하는 데 우리가 결승 8강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시드 1. 2위 팀 중의 한 팀을 이겨야만 합니다.  그리고 아시아지역 와일드 카드로 출전할 수 있는 나라가 종목당 한 팀입니다. 거기에는 중국과 소련연방의 해체로 아시아로 편입된 카자흐트탄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지난 아시안 게임에서 모두 패했습니다.

만약에 대표팀에 복귀한다면, 내가 맡게 될 여자 에뻬의 시드 1. 2위는 독일과 헝가리가 될 것입니다. 작년 세계 랭킹으로 미루어 분석컨대 틀림없이 독일과 헝가리가 될 것입니다.  독일은 세계 랭킹 1.3.5.7위가 있고, 헝가리는 2.4.8.12위의 선수가 있습니다.

우리 선수는 세계 랭킹 200위 안에 한 명도 없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선수는 태능선수촌에서 장기적인 집중훈련을 한 적도 없습니다. 여자 에뻬는 이 번 올림픽에서부터 공식종목이 된 터라 그 동안은 세계대회에 출전할 즈음에 3. 4 주 합동훈련을 하고 출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 나는 이길 수 있는 희망이 없는 시합에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전에 말했듯이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는 아무런 대책 없이 시합에 나가서 진다는 것은 죽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무런 대책 없이 대표팀을 맡는다면,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자살하라고 선수의 등을 떠미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빈스 롬바르디가 말했던 winning is not everything but losing is nothing 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코치인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항상 이겨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며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기력하게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벼랑 끝에 내 몰려서 천길 낭떨어지로 밀려 떨어지는 것은 잘못 됐다는 것입니다.

 

, 나는 그저 대표팀을 맡아서 그럴듯하게 폼 잡아가며 내 밥줄을 연명하고 싶지도 않고 죽을 것 같은 선수들의 고통을 담보로 내 가족의 생활을 꾸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한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를 이끄는 자로서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뜻을 세우고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아직 그 뜻이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형이 보내 준 짤막한 글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자다가 깨어 연립의 놀이터를 서성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씁니다.

나는 지금 두렵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7개월입니다. 그 안에 티켓을 따낼 수 있는 대안이 서야 합니다.

이 번 주까지 내 스스로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대안이 서지 않는다면 나는 대표팀을 맡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스스로 배수진을 치듯 자신의 의지로 당당하게 벼랑 끝에 설수 있는 것입니다. 벼랑 너머로 떨어지더라도 천 길 벼랑의 틈새에 칼을 꼽고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는 확고한 신념에 찬 불굴의 정신을 원합니다.      

 

                                       공릉동에서 00  드림.

 

 

2.

 

아우야

내가 주제넘게 네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 부담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난 네가 그저, 아직 살아있다는 것뿐,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는 사막 한 가운데 서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넌 할 수 있어!라고 누구든, 말이야 쉽게 하지 않겠니?.  그러나 난 네게 이 말을 할 수가없구나. 난 모른다, 니가 어떤 전략을 세울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이 도저히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 이해하려고 어설픈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우야! 나는 네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네가 얼마나 펜싱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의 세월을 살아 왔는지 잘 알고 있다. 나는 부족한 잠과 끼니를 거르며 논문을 쓰다가 십이지장 천공으로 수술을 하고도 한 달도 채 안돼서 혼자 우유 죽을 끓여 먹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을 가르치러 가던 너를 보았었다. 척추 디스크를 수술하고 20일만한 훈련을 하러 가야 한다던 너의 일념을 알고 있다. 기회마저 없어 선수의 생활을 포기하면서도 펜싱을 버릴 수가 없어서 독일에 유학을 가서라도 하겠다고 공부를 시작하며 통곡하던 너의 눈물을 보았었다. 그 많은 자료 노트를 읽고 또 읽으며 외우고 또 외워 네 몸에 새기던 너를 보았었다. 너의 삶이 곧 펜싱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나는 네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너를 바라보면 네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나 또한 꿈꾸며 살았다.

나는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그것을 옳은 결정일 거라고 믿는다. 네가 펜싱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너를 믿는다. 세상 모든 사람이 너를 미쳤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믿는다. 단지 그뿐이다.

지금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구나

구로에서 형이.

 

3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

                                               - 히브리서 11장 1절-

!

,  다음 주에 선수촌에 들어갑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공릉동에서..

 

IP *.94.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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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10.01.11 16:13:02 *.72.153.59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

이말을 들어오고 알아온 것은 오래전부터인데요. 접할 때마다 모양이나 크기가 다릅니다.
백산님의 글속에서의 이문장은 비장함과 힘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좀 아프군요. 이 아픔을 먹고 나온 이 말이 전 좋습니다.

제게 가져오니 양날검을 쥔 것처럼 손이 아플만큼 묵직한 느낌.... 이  묵직한 느낌이 좋네요. 이 말을 품고 있는 것이 지금은 좀 아픈데....웃으면서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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