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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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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15일 12시 00분 등록
꼭지글

PART 2 - 이제 한번 변신해 볼까


새 옷 갈아입기(공간 변신) 셋 - 주방 Dressing

‘외할머니의 부뚜막, 엄마의 부엌, 나의 키친’



초등학교 1학년, 오전반 수업이 있는 날이면 나는 수업이 끝나도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점심도 거른 채 유치원에 다니는 한살 아래 여동생을 데리러 갔다. 동생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면 배고프지 하며 부엌으로 들어가신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상 하나를 들고 오셨다. 안방 뜨끈한 아랫목 이불 속에 넣어 두었던 스텐인리스 스틸 뚜껑이 덮힌 공기밥이 상 위에 얹어지면 갓 쪄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오란 계란찜, 고소한 두부 부침, 김치, 들기름을 발라 바삭바삭 구워낸 김구이가 차려진 소박한 밥상이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진수성찬이었다.


어릴 적 엄마의 부엌은 내게는 마치 동화 속 알라딘의 요술램프 같았다. 아빠와 우리들이 배가 고파질 때면 무언가 먹고 싶다고 소원을 말하면 부지런하고 손이 빠른 엄마는 금새 김장김치 썰어 먹음직스럽게 부쳐낸 김치전이며, 노릇노릇하게 구워낸 가래떡이며, 한판으로 긁어내 모양이 살아있는 기막히게 눍힌 고소한 누룽지하며, 모양이 조금씩 달랐던 도너츠며, 간혹 가장자리가 탄 카스테라를 먹게 되는 일도 있었지만 식빵에 발라먹는 각종 과일쨈까지 모든 간식을 직접 만들어서 먹이셨다.


엄마의 부엌은 하얀색 네모난 타일을 붙여낸 나지막한 부뚜막과 연탄아궁이, 성냥으로 불을 붙이면 석유 냄새가 진하게 퍼지는 작은 곤로, 유리문이 달린 나무 찬장, 수도꼭지 아래에는 언제나 빨간색 고무 함지 하나 가득 물이 담겨 있었다. 그때는 더운 물은 커녕 가스 레인지도 없던 시절이었다. 엄마의 부엌은 작았지만 소박하고 정갈했으며 반짝반짝 윤이 났다.


외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오시면 우리집 부엌은 그야말로 명절날 잔치집으로 변신했다. 지금까지도 이름이 가물가물한 각종 말린 나물이며, 시골표 참기름, 사위가 좋아한다며 늘 잊지 않으시는 땅콩, 첫번째 사랑이 좋아하는 깨강정, 두번째 사랑이 좋아하는 노란 콩고물 묻힌 쑥떡, 시번째 사랑(우리 외할머니는 외손주들인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이렇게 부르셨다)이 좋아하는 번데기까지 금방 잔치상을 차려내도 될만큼 풍요로웠다. 엄마는 무거운데 그만 가져 오시라며 매번 타박이 아닌 타박을 하셨지만 외할머니가 가져오신 재료와 음식을 한 가득 펼쳐 놓으면 우리집 작은 부엌은 그야말로 TV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시골장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풍성했다.


엄마가 외출하고 안 계신 날이면, 춥고 불이 있어 위험하다는 이유로 들락거리지 못하게 했던 부엌에서 동생들과 나의 위험한 요리가 시작되었다. 연탄불 아궁이에 국자를 올려놓고 설탕 몇 스푼, 소다를 조금 넣고 젓가락으로 살살 저으면 잠시후 그 이름만으로도 달달한 달고나 요리가 탄생했다. 행여나 엄마가 오실까 동생들과 번갈아 망을 보고 국자를 태우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입천장까지 데어가며 나눠 먹던 그 시절 부엌에서의 달콤한 추억이, 스릴만점의 재미난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난 시간 동안 집에서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공간을 꼽으라면 단연 부엌일 것이다. 장작불을 지펴가며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매운 연기에 눈물 흘리며 가마솥에 밥을 짓던 부뚜막으로 대변되는 외할머니 세대의 전통 부엌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구멍 숭숭 뚫린 연탄, 석유곤로의 추억을 담은 엄마의 부엌은 싱크대가 설치된 입식 부엌이 본격화 된 이후 진화를 거쳐 지금의 대중화된 시스템 키친까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식재료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들고 설겆이를 하고 단순히 끼니를 해결하는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디지털냉장고, 식기세척기, 김치냉장고 등 주부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품격 있는 가전들과 친환경 소재를 사용해 가족의 건강까지 고려한 가구, 버튼 하나만 누르면 감춰졌던 식탁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디자인 감각이 더해진 주방 가구들, 음악을 듣고 TV를 시청하고 책장이 들어선 부엌은 최신의 시스템으로 무장한, 첨단 시설과 기술력이 집약된 하나의 문화 공간이 되었다.


부엌의 변화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이제 부엌은 더 이상 주부만의, 여자만의, 공간이 아니다. 맞벌이의 영향으로, 바쁜 생활 속에서 서로의 리듬이 달라 얼굴 마주 하기도 어려운 요즘, 이제 부엌은 단순히 음식을 만들고 식사하는 공간에서 나아가 거실의 확대 공간으로, 가족의 공동 공간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시대일수록 가족이 단합하는 순간, 마음 놓고 만나는 공간이 꼭 필요한데 가족이 모여 앉아 밥을 먹고, 같이 요리하고, 대화하고, 함께 즐기는 생활공간, 자기 가족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공간, 가족의 삶이 풍부해지는 공간, 주방은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최상의 사교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는 주부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눈여겨 보는 공간이 주방일 정도로 부엌은 시간을 따라 세상의 변화를 반영하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왔다. 


세상이 급변하고 그 흐름에 따라 부엌도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오신 우리 엄마는 여전히 주방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엄마는 책을 읽거나 잡지를 읽을 때도 쇼파나 책상이 아닌 식탁에 앉아 읽으시고 각종 영수증을 정리하시기도 하고 친구분들이 오셔도 친한 분들이 오시면 더욱 거실보다는 이곳이 편하다며 식탁에서 손님들을 맞으신다. 우리 가족 모두 주방을 매일 시도때도 없이 드나들지만 아직까지 우리집 주방의 주인은 엄마다. 엄마에게 주방은 음식을 만드는 주부 본업의 작업 공간이자 없는 게 없는 만물상이자 서재이자 친구를 만나고 손님을 맞이하는 사교의 장, 물건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소통의 장이다.

내 미래의 키친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나의 키친은 나 어릴 적 소꿉장난 하던 추억을 되살려 예쁜 살림살이로 꾸민 단정한 멋이 돋보이는 부엌, 벽돌 가루 곱게 빻아 귀엽게 차린 어린 밥상의 추억과 엄마의 정성스런 손맛을 기억하고 따라쟁이한 어설픈 음식이 차려진 식탁, 이 음식을 함께 나누는 가족들의 깊은 대화가 끊이지 않는 사랑 가득한 공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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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2.20 17:31:23 *.67.223.154
혜향,
마치 연금술사의 부엌을 들여다본 것 같은.... 화려한 변신이네...

혜향의 미래의 키친,
쬐끔 앞당겨 보여주면 안돨까?

노란 콩고물 묻힌 쑥떡이 먹고 싶다.   쑥떡 쑥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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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4 07:27:10 *.143.134.217
좌샘~^^

답글이 넘.. 늦었어여..ㅎ
쏘오리.. 봐주세여.. 헤헤^^

아, 치킨.. 맛있져.. 엥? 또.. ㅋㅋㅋ
키친.. 음.. 흠.. 열씨미.. 그려보겠습니다~^^

글구.. 숙떡.. 아직.. 깊이가 부족하여..ㅎ
ㅆㄸ ㅆㄸ..ㅋ 구여우세여.. ^^

선생님~, 여행때 뵈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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