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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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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5일 10시 48분 등록

나는 지금 프랑스 파리의 작은 호텔 로텔(L'hotel)에 있다.

로텔. 이곳은 여왕 마고가 밀애를 즐긴 장소이자, 오스카 와일드가 일 년치 방값을 채 지불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곳이다. 5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작은 문을 통해 이 호텔에 들어서면, 역사속의 인물들이 하나 둘 우리를 반긴다.

문을 열어 주는 도어맨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서면, 중세 시대로 초대된 듯 현재 세계와의 단절을 일으킨다. 파리의 오래되고 유서 깊은 건물들이 한 둘 차츰 개축과 현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파리가 매력적인 이유는, 역사의 향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로텔과 같은 건물이 남아있고  또 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로비로 들어서서 고개를 들어 보면 살구빛 원형복도가 6층의 투명한 천장까지 시원스레 뚫려있고, 거기서 내리쬐는 햇살이 역사속의 인물이 이 호텔을 축복하는 듯 하다.

좁은 나선형 계단 홀 위로 올라가 오스카 와일드가 살다 세상을 떠난 방에 들어가 본다. 마호가니로 되어있는 객실. 1899년. 이 아담한 객실에 투숙한 오스카와일드는 이듬해 1900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저 끔찍한 벽지를 바꾸어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꺼야', 라는 농담을 했다는데, 지금은 화려한 청색 봉황이 그려져 있는 벽지로 바뀌어있다.

"이 호텔에서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호텔요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오른쪽에는 한 번도 낸 적이 없는 계산서입니다. 지불하지 않은 계산서들이 재미있지요? 그리고 그가 직접 그린 그림들도 좀 있습니다." 라고 객실 지배인은 이것저것 신기한 듯 쳐다보는 나에게 말한다.

19세기의 가장 탁월한 작가라는 찬사로부터 혐오스러운 타락의 중심이라는 비난까지를 한 몸에 모두 받아온 오스카 와일드. 여러 장의 초상화와 소품들이 그의 다양한 면모를 대변하고 있다.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지만, 오스카와일드가 살았던 19세기만 해도 이곳은 싸구려 여관이었다. 하루 일당이 4프랑이었던 시절. 이곳의 여관은 1프랑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스카와일드는 지금 우리 돈으로 120만 원정도 되는 일 년치 방세 180.40 프랑을 끝내 내지 못했다고 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앉았던 책상에 앉아 보았다. 이방인인 내가 오스카와일드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순간을 보냈던 자리에 앉으니 그의 마지막 작품 <레딩 감옥의 노래>가 떠올랐다.

“낯선 이들이 그를 위해 흘린 눈물이 오래전 깨진 연민의 항아리를 채우리라. 그의 애도객들은 버림받은 이들인가. 버림받은 이들은 언제나 애도하리니.”

(그의 작품 <레딩 감옥의 노래> 는 그가 직접 녹음한 음성으로 인터넷을 통해 들을 수 있다.)

그가 앉았던 책상에 앉아 가져간 그의 책 <심연에서>를 읽어본다.

“맨 처음 내가 감옥에 들어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내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도록 애쓰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것은 파멸적인 충고였다. 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분명히 자각할 때만이 어떤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석방되고 나면 감옥살이를 했다는 사실을 미련없이 잊도록 하라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충고를 받고 있다. 이 또한 먼저와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충고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내가 견딜 수 없는 치욕에 끊임없이 휘둘려야 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또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소중한 것. - 해와 달의 아름다움,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경들, 새벽의 음악과 위대한 밤의 정적,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 잎새마다 맺혀서 온 풀밭을 은빛으로 만드는 이슬,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있어서는 더러운 것이 되고, 그것이 치유력을 잃고, 기쁨을 전할 힘을 잃기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경험을 모독하는 것은 스스로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이다.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살아 있는 입술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혼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가 아직 지불하지 못했다는 영수증을 본다. 매일 매일 머물고 있는 방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유미주의의 대가는 과연 이 영수증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루하루가 고통과 비루함의 나날이었겠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묵상하며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버텼던 것은 아니었을까. 밖으로 난 작은 창으로 보이는 시내의 끝자락에 조그만 아이들이 풍선을 들고 지나간다. 이 창문으로 저런 아이들을 보면서 이국의 땅 어딘가에 자신의 성 ‘와일드’을 바꾸며 살아야만하는 자신의 아이들을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그의 책, <심연에서>를 보면 뜻 밖에도 크리스챤으로서의 와일드의 신앙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내면의 고백을 다룬 이 책에도 그의 재치를 발견할 수 있다. 완전한 종교에의 귀의라기보다는, 문학인으로서의 종교, 혹은 예술로서의 종교를 보는 그의 관점이 번뜩인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시인’이고 그의 삶은 ‘완벽한 예술’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즉, ‘인간성’에 대한 예수의 개념은 그 이전까지의 것과는 다른 ‘완벽한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고, ‘예수의 복음’은 하나하나가 ‘예언의 성취’이며, 바로 이 ‘예언의 성취’가 곧 ‘예술작품’이라는 것이다. 예술작품이란 하나의 관념을 하나의 형상으로 바꾸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석방되더라도 그것은 단지 하나의 감옥에서 다른 감옥으로 이동하는 데 지나지 않음을 알며 또한 전 세계가 내게 있어서 나의 감방보다도 크고 감방과 마찬가지로 공포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하느님이 처음에 각각의 인간을 위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그 세계에서 각각 살아가기를 희망해야만 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가 앉았던 책상의 의자에 앉아본다. 의자의 등받이 위에 올라와 있는 꼭지는 입으로 물어뜯은 듯 한 이빨자국이 남아있다. 그는 허물어져가는 자신의 인생을 아쉬워하며, 그가 즐겨 입던 벨벳자켓을 그리워하며, 혹은 창밖으로 들리는 풍선을 든 아이들을 보면서 의자 등받이를 물어뜯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물어뜯는 홈 위에 조그맣게 손톱으로 홈을 내어 본다. 홈 위로 뭉툭하게 들어가는 손톱의 느낌이 왠지 조금이나마 그의 숨소리를 느끼는 것 같다. 이제 곧 밤이 시작된다. 그의 삶은 이 방에서 소리를 죽이고, 자못 비장한 어둠만이 나를 감싼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것은 저 깊은 곳의 스스로의 목소리. 그가 보인다. 악수를 청해볼까, 미소를 지어보일까. 엄지손톱 안으로 파고 들어간 책상의 나무찟거리가 그의 숨소리를 나에게 전하는 듯하다.

이제 나는 페르사세즈 Pere Lachaise로 향한다. 루이 14세의 고해신부의 이름을 딴 이곳은 박물관 대접을 받는 프랑스의 공원묘지이다. 파리시민이 가장 많이 묻혀있다는 이곳은 쇼팽과 발자크에서부터 에디뜨 삐아프와 이브몽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명인들 또 한 긴 잠을 자고 있다. 이 곳은 묘지라기 보다는 공원같은 느낌을 준다. 죽음과 삶은 별게의 것이 아닌 삶의 일부라는 파리 시민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묘에 도착했다.

Respect the memory of Oscar Wilde and do not deface this tomb. It is protected by law as an historic monument and was restored in 1992.

제법 큰 규모의 묘였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빈틈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빼곡하게 키스마크가 찍혀있었다. 자신의 머리를 바치고 있는 하늘을 나는 스핑크스를 상징하는 묘비에 그를 기리는 가지각색의 키스마크가 있다. 이 또한 처음 묘지가 세워졌을때, 한 익명의 방문객이 조각상에 달린 거대한 음경을 보고 분개한 나머비, 망치를 가져와서 그것을 떼내버렸다고 한다. 이 묘지는 2000년까지 계속 중성(?)인 채로 남아있다가 멀티미디어 예술가인 레온 존슨이 순은으로 만든 인공 남근을 와일드의 부서진 가랑이에 붙여주었다고 한다.  

마침 검은색 가죽 옷에 노란색으로 염색을 한 20대로 보이는 한 여인이 그의 묘에 꽃을 들고 온 것을 본다.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항기어린 모습이다. 그녀는 준비한 진한 검은색 립스틱을 입에 바르기 시작하며, 키스할 자리를 찾는다. 자리가 없을 만큼 빼곡이 들어찬 마크에 입을 가져다 대는 것은 쉽지 않다. 허리를 깊이 숙여 깊게 키스를 하고는 그의 묘지 주변을 몇 번 돌아보는 그녀. 나는 차마 그녀에게 어떤 질문도 하기 힘들다. 말을 건다는 것이 약간 무섭기도 하고,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앞에 있으면서 그런 행동에 신기해 한다는 것이 촌스러워 보이기도 할까 싶기도 해 말을 걸어보는 것을 포기한다.

내 키를 훌쩍 넘는 곳에 까지 찍힌 키스들을 보며 저런 자리는 어떻게 올라간 것인지, 라고 의아해 한다. 무덤은 어쩌면 세상을 떠난 사람보다는 아직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의 무덤까지 와서 사랑의 키스를 바치는 이들은 과연 오스카 와일드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행복한 왕자>의 동화작가로 알려진 오스카 와일드. 그는 그 자신이 진정한 '행복한 작가'였다. 그의 삶은 끝이 났지만 그의 죽음은 다른 이들의 삶속에서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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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03.26 01:58:59 *.36.210.18
뭐랄까. 소설책 읽는 느낌이고 어리둥절해 지네.

아우님, 자주 보니 좋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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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엽
2010.03.26 08:16:22 *.216.38.10

대망의 4월8일!! '자.랑.질' 할라면 아직 갈길이 멀~어용~^^  

빨리빨리 힘내서 써야지요. 이제 다음작가는.. 대충 정했는데.. 후후후. 누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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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3.28 09:29:52 *.67.223.107
오스카 와일드는 여태껏 내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재엽씨 글을 읽으니 이 사람, 
요즈음 세상에 태어났으면 깃발 날렸겠다는 생각이 들고
동시에 시대를 조금 앞서 걸어가다가...."서릿발 같은 몰이해속에 죽어갔구나."...싶기도 해요.

이 글이 먼저나오고, 그 다음 앞의 두 글이 따라 나오는 방법으로
꼭지글의 배치를 바꾸어보면  어떨까요? 혹시?

매력을 발산하는 방법...나로 부터 시작해서 일반적인 알림으로....
중심에서 주변부로 나아감.......  > 범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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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엽
2010.03.28 15:47:22 *.166.98.75

아!  좌쌤--. 감사합니다.

흐흐흐. 이 시대에 태어났어도 끝빨날리기에는 아직 좀 더 빠르지 않나요? ^^ 어쨌건, 그가 남긴 책들은 정말 끝빨날리게 재미있습니다.. 몇편의 평론집도 아주 죽여줍니다.

그런데, 아직 오스카 와일드 편은 두 꼭지가 더 남았습니당^^
일단 필(!) 꽂히는대로 써놓고, 글의 배치나 순서는 후에 다시한번 쫘악~~ 정리하려합니다.  

오스카 와일드.. 정말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죠? 앞으로 두편도 기대해 주세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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