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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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애 1 - 문상을 가야 하는데
부활절 아침이다. 오늘은 젊은 친구들과 강원도 인제로가서 꽃놀이를 하고 진달래 화전을 부치며 놀기로 하였는데, 갑자기 못 갈 이유가 생겼다. 중요한 모임을 급소집하는 바람에 선택을 그쪽으로 했기 때문이다. 양쪽 머리에서 뿔이 돋아나려했지만 "사람이 공부를 해야지..."하고 참았다. 오후에는 아이의 친구들이 집에서 모인단다. 강남이나 홍대 앞 카페의 소란스러움을 싫어하는 시골 쥐 아들이 10명이 넘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했기 때문이다. 바빴다. 정신없이 일상의 흐트러짐을 몰아서 정리하기 시작하는데...올케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제주도에 계시는 막내 고모부께서 돌아가셨단다. 지난 밤 부활성야 미사를 다녀왔는데 그 밤에 돌아가셔서 지금 연락을 받고 바로 제주도로 내려가려고 한단다. 나는 돌아가신 고모부가 우리 고모에게 청혼을 하러 우리 집에 왔을 때의 모습도 기억하고 있었기에 나도 문상을 가고 싶었다. 그분은 제3 수도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지역사회에서 좋은 일을 무척 많이 하고 덕망이 높았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업적과 상관없이 소탈하고 성실하며 사랑이 많은 그 고모부가 참 좋았다. 그래서 진정으로 애도하고 싶었다. 75세, 아직은 더 일을 하실 수 있으실텐데... 급히 전해오는 소식에는 부활절의 모든 행사를 잘 마치시고 쉬시다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숨이 멎었단다. 몇 년전 친정 식구들이 모두 17명, 모여서 함께 제주도 여행 길을 나섰을 때, 그리 정정하고 아름답게 안내를 해주시고 아이들의 가슴에도 길이 남을 추억을 새겨주신 분이셨는데.....
잠시 모든 전화가 윙윙 거리며 오고가고 분주한 소통 끝에 벌써 공항에 나가있는 올케언니가 마지막 다짐을 한다. 집안의 남자들이 머뭇거리는 모양새를 참을 수가 없어서 먼저 나왔단다. 비행기 표는 당연히 없다. 그러나 공항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부활절의 허리를 자른 모임과 화요일 진행해야 하는 워크샵 때문에 우선 떠나기 힘들었고 설혹 비행기 표를 구한다해도 겨우 12시간 머물 수 있는 이 문상길을 어떻게든 가보려고 했지만 문제해결에 스피드가 나지 않았다. 쥐 죽은듯이 늦잠을 자고 있는 식구들과 최고로 어질러놓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이 총체적 난관인 살림살이와 나도 얼굴을 아는 저녁 손님들과 번복하기 싫은 약속들과 ....나는 그만 모든 일손을 놓고 앉아서 숨만 고르고 있었다.
나는 전부터 경사에는 상황을 따라도 되지만 애사에는 꼭 가야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근무하다가도 병원을 들러 까만 양복을 빌려 입고라도 문상을 하던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그리고 밤늦게 까지 함께 자리를 지켜주고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 내 남동생의 친구가 나보다 더 많이 흐느껴 우는 것을 보았다. 그 동생친구는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을 드나들며 우리 아버지를 자주 보았기에 우리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며 마구 울었다. 사람들은 아주 먼 길도 열일 제쳐놓고 문상을 간다. 그리고 상주와의 친분 때문에도 문상을 오고 간다. 나는 친척이나 아주 가까운 상가만 돌아보는 편이다. 옛 어른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문상을 하지 않으면 그 친구와는 의를 끊으라고 할 만큼 엄격하게 예의를 지켜왔다.
젊은 날, 독일에 있었을 때 성당의 제단을 청소하는 그룹에 속해 매주 금요일 모이던 할머니 친구들이 있었다. 그중 특히 나와 친하게 지내던 앨리체가 있었는데 그이는 객지생활의 어려움을 잘 이해하고 나를 많이 보살펴주었다. 엘리체의 남편은 건축가였는데 영화배우 뺨치게 멋있고 잘 생겼다. 가끔 그 부부는 나와 헤어질 때 나를 꼭 껴안아주었는데, 어찌나 포근하던지 마치 아버지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기분이 좋았었다. 우리는 집이 가까워서 자주 만났었는데 하루는 그 앨리체가 60세가 되기도 전에 갑자기 집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그리고 갑자기 집에 혼자 있다가 사망을 한 경우에는 부검을 해야 한단다. 나는 그때 우리 아이들이 아직 어렸으니 매우 분주했다. 겨우 장례식날 시간에 꼭 맞춰서 갔다.
독일에는 묘지 옆에 교회가 함께 있어서 그 교회에서 장례미사를 거행했다. 그때 내가 성당에 들어가니 그사람 (엘리체의 남편,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이 조용히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나를 맞이하더니 두팔을 벌려 안으며 소리를 내어 흐느낀다. 나는 깍듯이 인사만 했을 뿐 아무 말도 못하고 함께 따라 울지도 못하고 조용히 빈자리에 앉았다. 나는 이때의 일이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나는 분명히 함께 안아주고 함께 울었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딱딱하게 의례적인 인사만 했는지, 왜 그렇게 굳어있었는지....아마 그때도 분주하게 일을 하다가 급하게 그곳에 갔고 그때만 해도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도 인간적으로 그렇게 함께 마음으로 위로해주지 못한 것이 오늘도 마음에 몹시 걸린다.
이제는 그도 앨리체의 곁으로 돌아가 함께 있을 것이다. 그와 앨리체는 참 아름다운 부부였었다. 그들은 사망기사를 신문에 광고하고 신문을 통해서 감사인사를 공식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화환과 조의금은 사양하겠으나 혹시 마음이 나면 제 3세계를 위해 봉헌을 해달라고 쓰여있는 문구를 보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엘리체 부부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다. 지금 깨달은 이만큼의 마음으로 진심으로 애도하고 싶다. 마음을 다해 위로를 해야했는데...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모르는 일이 너무 많았었다고.....
어쨌든 나는 막내 고모부의 문상을 가지 못했고 그냥 미리 정해져있는 시간표를 따라갔다. 마음이 가는데로 행하며 살리라는 나의 원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래 가족들이 이 상장례의 분주함과 충격에서 벗어나 조금 한가할 때 찾아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 "라고 스스로 위로해 보았다. 그리고 1주기에는 꼭 기억하고 미리 계획을 잘세워서 찾아뵈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속이는 방법을 이미 알고있는 나는 어쩌면 이 결심도 실행하지 않을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다행이 오빠와 동생이 모두 지금 그곳에 가있다. 나는 전화로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곳 소식을 듣고있다. 아마 지금쯤 장례미사를 끝내고 묘지에 가 있을 것 같다. 제주도의 무덤들은 바람이 세차게 부는 곳이기에 봉분을 만들고 그 둘레에 돌담도 만들어 놓는다. 나는 가끔 올레길을 걸으며 모르는 사람의 무덤가에 앉아보기도 하고 관심을 가지고 묘비를 읽기도 한다. 햇살이 따뜻할 때엔 좀 오래 머물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목례를 하고 지나간다. 고모부는 사실 돌아가시기 전에 적어도 일년에 한번은 찾아 뵈어야했다. 그러나 아직은 어림도 없는 세상살이의 헛된 분주함 속에 내가 살고있다. 그러니 사실 문상길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정성을 쏟아야 했다. 더구나 내가 그분에게 갖고있는 기억과 추억이 아직 이렇게 생생한데 말이다. 나는 정말 문상을 가야했었는데.....
사랑이 많으셨고 그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길이 기억될 막내 고모부의 영전에 무심한 조카가 무심히 인사를 올립니다. 고모부, 이젠 편히 잠드세요.
*새로 시작하는 글에 우선 죽음 언저리와 내게 닿은 이야기들을 모아놓는다. 보리밭이 푸르러질 때엔 막내 고모부의 무덤을 다녀온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