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엽
- 조회 수 4340
- 댓글 수 10
- 추천 수 0
*
여기, 한 소년이 있다. 다른 국적의 아이들이 모여 ‘A아.B베.C세.D데.’ ‘봉쥬르 Bonjour- 마드모아젤 Mademoiselle’을 배우고 있다. 코끝에서 나오는 비음을 발음하기 어렵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가운데서도 수업 분위기는 좋다. 모르는 언어로 된 음악에 맞추어 소년 소녀들은 율동을 따라한다. 때로는 바닥에 뒹굴기도 한다. 억지로 커다란 액션을 취하는 선생님이 무섭지 않다.
여기, 한 청년이 있다. 군대에서 말년 휴가 나온 친구와 만난 곳은 시내의 한 대형 서점. 군인 친구는 휴가 이후에 복귀하여 여유 시간이 많다며, 이문열의 ‘삼국지’를 고른다. 너는 무슨 책을 고를래? 라는 질문에 대답은 못하고 소심하게 얇은 책 하나를 선택한다. <악의 꽃>.
17년 만에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힘겹게 해독하고 있다. 모르는 단어, 문장, 문구로 헤매다가 결국엔 서점으로 간다. 서점의 안내 데스크에서 세 가지 종류의 번역판이 있음을 확인하고 동시에 집어버린다. 계산하고 그 길로 세 가지 번역의 시를 읽어 내린다. 책장을 덮는 순간, 쓴 웃음을 지었다. 17년 만에 이 시를 다시 접하네.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하얀 책에 검은색 꽃이 그려져 있는 민음사에서 나온 <악의 꽃>을 처음 읽었던 대학 1학년 때, 나는 첫 번째 시, <알바트로스 Albatross> 를 읽고는 더 이상 읽지 않고 집어던져버렸다. 일단 소설처럼 읽는 재미도 없을뿐더러 온갖 추상적인 단어의 조합과 번역에서 오는 이질감으로 인해 독서를 해 나가기 힘들었다. 서점에 가서 환불을 할까도 생각했는데, 이런 책 한권 쯤 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책꽂이에 꽂아둔다. 그 후로 <악의 꽃>은 내 서재의 ‘가구’처럼 존재감 없이 한쪽에 위치했다. 두꺼운 책이라면 제목이라도 보일텐데 이 시집은 그나마 얇아서 보이지도 않았고 안읽는 책들을 정리 할 때도 보이지 않아서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 그런 내가, 다시 이 시집을 꺼내들게 된 것은 순전히 한 문학 강좌 때문이었다.
한 대형 서점에서 열리는 문학 강좌에 우연히 들렀다가, 미국 작가 ‘애드거 앨런 포 Edgar Allen Poe’의 삶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의 삶은 굉장히 불운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작품은 사후에 빛을 보게 되었다는 것, 그것도 미국 작가에 의해서가 아닌 프랑스 작가에 의해 재조명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악의 꽃>의 작가 보들레르라는 사실을, 그 강좌는 내게 말해 주었다. 나는, 정작 그 강좌의 중심이었던 애드거 앨런 포가 아닌, 대학 1학년 때 시집의 첫 번째 시를 읽고는 던져버렸던 그 책, <악의 꽃>을 서재에서 뒤지기 시작했다.
*
다시 접한 시집 <악의 꽃>은 여전히 어려운 숙제였다. 자꾸 시 그 자체보다는 시를 해설해 놓은 뒤편 주해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제대로 한번 읽어나 보자, 라는 오기가 발동했다. 첫 번째 시를 읽는게 힘들어 사무실에서 A4 복사용지를 꺼내, 연필로 적어내려갔다. 첫 번째 적은 시는 뭔가 좀 부족한 듯했다. 번역투의 단어 조합이 불편했다. 서로 다른 번역본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퇴근길에 대형서점에 들렀다. 그리고 나와 있는 번역본들을 모두 집어 들었다. 모든 시가 다 겹치진 않았지만, 번역본들끼리 대조해보니 오히려 좀 더 혼란스러웠다. 혹시 영문번역본과 비교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 flowers of evil을 찍으니 몇 개의 영문 번역 시편들이 쉽게 검색되었다. 영문 번역본도 다섯 가지 이상 되었다.
까짓것! 이왕 이렇게 된 것, 불어 원본에도 도전해보자!
영문과 불어, 그리고 한글 세 언어로 번역된 10종 이상의 시를 비교하면서 읽어보았다. 무슨 실체를 알 수 없는 성배를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딱히 무언가를 찾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보들레르’라는 인물과 서로 다른 언어체계를 지닌 <악의 꽃>이라는 숲에서 헤매는 사실 자체로 무언가 가슴 깊이 채워져나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A4 용지에 잔뜩 적혀있는 영문 시를 보고 나와 같이 근무하는 장대리는 ‘영문 계약서 작성하세요?’ 라고 물어보았다. 불어 원본을 종이 위에 쓴것을 보고는 임상무님이 ‘어? 정실장! 혹시 불어 공부했어? 모르는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나 불문과 출신이야!’라며 흐뭇해했다. 아마도 그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바로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가 쓴 시 <악의 꽃>을 계약서 다루듯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프랑스 사람도 아닐뿐더러 설사 불어권 사람이라 해도 보들레르가 써 내려간 모든 의미를 완전히 내재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로 다른 번역본을 대조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제 3의 언어인 영어로 번역된 시를 대조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미쳐 원작자도 느끼지 못했을 법한 ‘나만이 발견할 수 있는’ 행간의 의미들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문학작품을 읽어나가는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권리가 아닐까.
다음은 <악의 꽃>중 <교감> 혹은 <상응> 이라고 번역된 다섯 가지 종류의 시의 1연을 비교한 것이다.
1.
자연은 하나의 신전이니, 거기 살아있는 기둥에서
이따금 어렴풋한 말소리 새어나오고,
사람은 정다운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으로 가로질러 그리로 들어간다. (함유선, 밝은세상 2004)
2.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 살아 있는 기둥들에서
이따금씩 어렴풋한 말소리 새어나오고;
인간이 그곳 상징의 숲을 지나가면,
숲은 정다운 시선으로 그를 지켜본다. (윤영애, 문학과지성사 2003)
3.
자연은 살아있는 기둥들이 때때로
어렴풋한 말들을 새어나오게 하는 사원.
인간은 친밀한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통해 여기로 들어간다. (이진수, 살림 2006)
4.
자연은 사원(寺院)이어라. 그곳에 살아 있는 기둥들은
때때로 알아들을 수 없는 애매한 말을 흘려내보내니
사람은 친근한 눈길로 그를 맞이하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리로 들어간다. (이진성, 건국대학교출판부 2003)
5.
<자연>은 하나의 사원이니 거기서
산 기둥들이 때로 혼돈한 말을 새어 보내니,
사람은 친밀한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리고 들어간다. (김붕구, 민음사 1994)
비교문학이다, 혹은 텍스트 비평이다, 라는 거창한 기법을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상식선에서 이 시를 음미 해볼 수 있다. 보들레르가 쓴 불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La Nature est un temple où de vivants piliers
Laissent parfois sortir de confuses paroles;
L'homme y passe à travers des forêts de symboles
Qui l'observent avec des regards familiers.
굳이 불어를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웬만큼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면, 불어와 유사한 영어 단어를 끌어다가 간단하게 순서는 맞출 수 있을 듯하다. 내 마음대로 영역해보면,
Nature is a temple in which living pillars
Sometimes give voice to confused words;
Man passes there through forests of symbols
Which look at him with familiar regards.
정도 될 수 있을 것이고, 인터넷에서 찾아낸 영역시를 보면,
1.
Nature's a temple where each living column,
At times, gives forth vague words. There Man advances
Through forest-groves of symbols, strange and solemn,
Who follow him with their familiar glances.
(Roy Campbell, Poems of Baudelaire (New York: Pantheon Books, 1952)
2.
Nature's a fane where down each corridor
of living pillars, darkling whispers roll,
— a symbol-forest every pilgrim soul
must pierce, 'neath gazing eyes it knew before.
(Lewis Piaget Shanks, Flowers of Evil (New York: Ives Washburn, 1931)
3.
Nature is a temple where living pillars
Let sometimes emerge confused words;
Man crosses it through forests of symbols
Which watch him with intimate eyes.
(Geoffrey Wagner, Selected Poems of Charles Baudelaire (NY: Grove Press, 1974)
먼저, 국문 번역본과 영문 번역본을 비교해보면, 문학과 지성사본이 가장 직역에 가까운 듯하다. 하지만 시 번역은 단어와 구문을 단순하게 다른 언어로 바꾸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중학교 국어시간에 국어의 언어적 뿌리를 상기시켜보아도 인도-유럽어족과 우랄-알타이어족은 어순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내용도 다소 변형되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시 번역이란 정신적인 상승과 연결되는 것이고, 이 상승을 표현하는 무엇보다 먼저 느낀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고 한다. 시에는 인간과 자연,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는 영혼의 숨결이 스며있기 때문이란다.
문외한이 보기에 <교감>이라는 시는 특별히 각운 등을 맞추고 있지 않으며, 덕분에 영역본 또한 ‘내용’을 이해하는 데 편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이해하는데 가장 쉬운 것은 건국대출판사본이다. 이 번역은 상대적으로 다른 시들에 비해 한국어가 자연스럽다.
먼저, 이 시에서 나오는 주요 단어들을 살펴보자.
1-2행에는 자연 (La Nature, Nature), 신전, 기둥 과 같은 명사가 등장하고, 3-4행에는 인간, 상징, 숲과 같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 쯤 되면 나는 그냥 이 명사만 가지고 내 나름대로의 내용을 조합해 본다. 자연 속에 있는 신전과 기둥이 있고, 한 인간이 그 숲을 거닌다. 그런데, 그 숲의 이름은 바로 상징이다. 어떤가? 너무 나만의 착각인가? 이제, 본격적으로 각 시를 비교해보자.
국문시를 종합해 시의 '내용‘을 정리해보자. 약간 혼동을 주는 단어 un temple 은 ’사원‘보다는 ’신전‘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나을 듯싶다. 왜냐하면, 후에 나오는 '인간 homme'의 존재 때문이며, 제목 자체가 '교감/교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서로 교감하는 대상을 의미할 터인데, 그냥 ‘사원’이라고 하는 것보다 ‘신전’이라고 해야 ‘신’과 ‘인간’이 교감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1행을 찬찬히 읽어보면, 우리는 자연은 곧 신전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자연 = 신전
그리고,
또한 각 신전은 기둥들을 포함하는데, 그 기둥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말’을 흘리거나 애매한 말들을 한다. 즉, 기둥들은 자연이 잉태한 하나의 생명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인간세계에서 기둥들은 누구를 상상해 볼 수 있을까? 말을 흘리는 사람들, 혹은 이웃, 친구.. 아주 많을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을 아직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음 인간이 바라보는 친밀하고 정다운 눈빛을 이야기에 관한 말들이 나온다.
신전 ⊃ 기둥 ⊃ 말 그리고, 인간 ⊃친밀한 눈
일단, 1연의 커다란 주체는 자연과 인간이고, 그 둘 사이의 교감을 나타낸다고 추측할 수 있다. 자연은 말할 수 있는 기둥들이 모여 있는 신전이며, 인간은 그들이 흘리는 말을 따라 상징화되어있는 숲으로 들어가며 서로 교감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럼 자연스럽게 우리는 3행에 ‘인간’이라는 존재
상징의 숲 = 자연
이라는 공식도 도출 할 수 있다. 이러한 극히 상식적이로 몇가지 번역서를 조합한 나만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자연은 살아 숨쉬는 기둥들이 모여있는 사원이어라.
그들은 때때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흘려보내고,
친밀한 눈으로 바라보는 상징의 숲을 통해, 인간은 지나간다.
나는 완벽한 불문학자도 아니고, 불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다. 하다못해 대학때 불문학 수업을 들은 적도 없다. 나는 그저 매달 월급날을 기다리며 행복감에 젖는, 그런 직장인일뿐이다. 그런 내가, 대충 이 정도로 보들레르의 시를 ‘나의 언어’로 바꾸어놓고 나중에 좀 더 손볼 것을 기대하며 잠시 자만심에 빠져본다.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첫 번째 연에만도 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모티브가 있다고 감히 추측해본다. 그 주체는 ‘인간’. 그리고 ‘자연’ 이다. 그런데 자연은 내가 보는 것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집 곳곳에는 이런 인간의 시선을 담은 여러 편의 시가 나온다. 이것은 바로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뜻하기도 하지만, 인간끼리의 교통, 혹은 선과 악, 그리고 아름다움과 추함의 교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해본다.
애초에 시 한편을 가지고 서로 비교해보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다. 무슨 이유로 나는 이런 ‘남이 시키지도 않는 일’을 사서 하는지에 대해 나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았어야 했다. 보들레르가 교감을 말하든지, 교태를 논하든지,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정재엽이라는 사람에게 그의 시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명확한 대답은 아니지만, 희미하게나마 먼저 책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위안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진정으로 읽게 되는 것, 즉 책에 대한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보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와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모든 텍스트는 씌여지는 텍스터여야 하며, 다시 씌여짐으로써 비로소 읽히는 것이다. 리뷰는 책읽기를 통해 얻은 걸 베푸는 행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책읽기를 완성해나가는 건 그러한 베풂이 아닐까.
자연은 살아 숨쉬는 기둥들이 모여있는 사원이어라.
그들은 때때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흘려보내고,
친밀한 눈으로 바라보는 상징의 숲을 통해, 인간은 지나간다.
밤처럼 빛처럼 끝없이 넓고
어둡고 깊은 통일 속에
멀리서 어우러지는 긴 메아리처럼,
향기와 색깔과 소리가 서로 교감한다.
아이의 살결처럼 싱그럽고,
오보에 소리처럼 부드럽고, 초원의 푸른 향기도 있고,
썩어 흐르지만 풍요로운 다른 향기도 있어,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하게 확산되어,
정신과 감각의 환희를 노래한다.
- <교감> 정재엽 역
이렇게 보들레르는 정재엽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다. 그의 의도는 <악의 꽃>일 수도 있지만, 정재엽에 의해 태어난 <악의 꽃>은 더 이상 <악의 꽃>이 아닌, <선의 꽃>이 될 수도 있고, <악의 풀>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한, 단, 보들레르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지었을까, 라고 끊임없이 상상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번역하려고 노력했을까, 라고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시하는 한, <악의 꽃>은 보들레르 혼자만의 작품만이 아닐 것이다. 이는 번역을 한 함유선, 윤영애, 이진성, 이진수, 김붕구의 것일 수도 있고, 정재엽의 것일 수도, 또, 이 글을 읽는 독자의 것이기도 할 것이다.

말씀하신 <매트릭스>내의 그 장면이 여러가지 설들이 있는데,
제가 가장 신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한것 처럼,
그 장면은 모든 사물을 수치화, 계량화 해서 보는데,
재미있는 것은 artificial 한 것 뿐 아니라, natural 한 것도 계량화 한다는 것이죠.
일종의 바코드 법칙과도 같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상현님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신성과 자연, 인격과 상징.
그리고 물심동체의 교감을 familiers 그저 '친숙한'이라고 하기엔 좀 2% 부족한 느낌이 나는걸요?.
음- 보들레르의 시를 해석하면서 영화 <매트릭스>를 떠 올리는 것은,
제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영역입니다.
조만간 이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냥 구경꾼 입장에서 보면 서양문학이 그렇지만, 특히 이 시에서는 신화의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자연-->신전-->기둥(나무?)-->신탁-->상징으로의 이미지 전개가 그렇네요 ㅎㅎ
영화 <매트릭스>에서 멀쩡한 거리의 풍경이 開眼한 네오에게는 끊임없이 흐르는 데이터로 보이는
보이는 장면 있잖아요. 인간속에 내재한 神性과 신성한 자연의 인격이 상징이라는 공통어를 통해
어우러지면 아마도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여기서 딱 걸리는 단어가 familiers인데, 여기서 상상력이
어떤 쪽으로 흐르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물심동체의 교감을 횡적인 관계로 표현
한다면 '친숙한' 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자연이 좀더 주도하는 전개라면 "본래 내가 니 애비다.", 또는 "교감의 망(net)에 걸려든 인간' 이라는
뉘앙스가 가미되어 '장난스러운'이라는 표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상 후루꾸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