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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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들이댈 일이 많아졌다. 겨우내 편식에 시달린 시신경들이 동공을 쥐락펴락 하며 부산을 떤다. 봄의 기미들이 동면의 이부자리를 걷어내며 눈가에 자꾸 궁뎅이를 들이민다. 참다 못한 네 가족이 일요 산행에 나섰다. 집에서 15분 거리인 일원동 대모산에는 목련에, 진달래며 벚꽃이 제법 피었다. 앵모나무에는 매화와 닮은 꽃들이 팝콘처럼 열렸다. 평소 걷는 걸 싫어하는 아들놈이 오늘은 왠지 허허실실하며 유랑객 태세다. 산행의 가장 큰 목적을 어찌 알았는지, 기특한 아이에게 연신 카메라를 들이댄다. 찍다 보니 앵글의 무게중심이 어느새 하늘로 향했다. 파란색이 눈에 밟힌다. 아이의 표정을 하늘호수에 담고 싶다. 하늘은 배경인 듯 주인공인 듯 위로 뻗은 꽃가지들 사이로 곁눈질을 하곤 했다.
모처럼의 산행이 파랑에 대한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블루는 10대에서 20대초까지 내 옷의 메인 테마였다. 옷가지라고 해봐야 변변치 않았지만 파란색을 선호한 것은 사실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국방색의 나날들을 보내고 사회에 막 복귀했을 때 누나로부터 10만원권 수표를 받았다. 옷 사입으라고 준 거금을 들고 동방플라자에 갔다. 5월말쯤이었을거다. 스스로 ‘내가 왜 이럴까’ 싶었다. 골라 놓은 반팔티 색깔이 가관이었다. 팔목부근은 파랑, 몸통은 주황, 라운드넥은 초록으로 뜨거운 국민성을 가진 어느 나라의 국기같았다. 옷 뿐만이 아니었다. 검정 브랜드 마크가 찍힌 짙은 보라색계통의 운동화를 매칭시켰다. 다행인지 아닌지 속옷에 대해서는 별 충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훗날 컬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후 색깔에 얽힌 나의 심리를 찬찬히 뜯어본 적이 있다. 나는 A형의 혈액형에 MBTI유형으로 INTP다. 혈액형 얘기는 총각시절에 작업멘트로 활용하긴 했지만 지금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하여간 이 정도 얘기하면 휙 지나가는 이미지. 바로 그게 나였다. 내향ㆍ조용ㆍ과묵. 조용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파랑이 나답다고 생각했다.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하느라 자아를 돌아볼 틈이 없었던 나는 빛과 어둠이 분화되기 전의 배아기에 있었다. 헌데 온통 카키색으로 물든 세상에서 2년을 넘게 지내는 동안 억압과 결핍에 대한 반작용이 뒤늦은 색의 사춘기를 불러 왔던 것 같다. 반팔티는 일종의 무의식의 외면화였던 것이다. 단색의 경계가 일순간에 무너지자 파스텔의 시대가 왔다. 울긋불긋 꽃대궐을 옷에 그려보고 싶었다. 봇물이 터진 파동은 시간이 갈수록 안정을 찾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불 같은 연애의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나는 꽃무늬 티셔츠로 그 기쁨을 드러냈다.
최근에는 4년 전 쯤의 일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나는 팀장과 인연이 맞지 않아 힘든 회사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버거운 일상이었다. 그 때 구입한 짙은 보라색 남방이 있다. 보라는 빨강과 파랑의 조합이다. 색채심리학적으로 보라색은 감정의 앙양과 감정의 침체를 융화시켜 균형을 잡으려는 욕구라는데, 내가 딱 그랬다. 답답한 현실을 딛고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내고 싶었던 마음이 그 옷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 하다.
올해 다섯 살이 된 딸아이는 핑크홀릭이다. 말이 터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유독 핑크를 찾는다. 아이 기호에 맞춰 속옷부터 신발, 젓가락통, 자전거에 이르기까지 온통 분홍 천지다. 주위에서 핑크를 여자의 색깔로 강조한 적이 없으니 타고난 기호색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핑크는 보통 행복의 에너지를 표출하는 색이라고 한다. 그럼 아이는 잘 자라고 있는건가. 색이라는 게 본능적인 감각의 영역이자 이데올로기의 영역이다 보니 컬러를 통해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게 가끔 자연스럽지 않아 보일 때도 있다.
분명한 것은 오늘 대모산의 하늘이 잊었던 무엇인가를 발굴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20여 년 전의 블루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아직은 ‘거시기’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칸딘스키의 한마디로 갈음한다.
“파랑은 깊어질수록 우리를 무한한 것으로 이끌며, 순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운다.”


그런거예요? 나 보라색 아주 좋아하는데... ^^
옛날(?)에 파란색 좋아하다가 그닥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고 붉은 색은 좀 강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듯하고.
언제부터인가 보라색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보라색도 다양한 색감이 있지요. 파랑에 가까운 청보라색도 있고 분홍에 가까운 라일락 색도 있고, 자주도 있고.
전 자주색쪽 보다는 청보라색과 퍼플 쪽을 좋아해요.
오빤~ 음,
파랑색은 너무 차가워서 오빠 색은 아닌 것 같아요. 무언가 좀더 깊은 색이 더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오빠가 찾아가는 오빠의 색이 나도 궁금해지네 ^^
지난 번 시기별 좋아했던 색상에 대한 칼럼 이후 색에 대한 두번째 글 잘 읽었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