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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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 사이 운전면허도 땄지만 그래도 그건 시험의 가장 큰 요소인 긴장감이 별로 없었으니 시험으로 치기엔 좀 그렇다. 그럼 토익 본 적 없냐구? 본 적 없다. 내가 회사 들어갈 때는 토익이 유행하기 바로 직전이었고, 난 필수가 아닌 시험을 찾아볼 만큼 영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입사시험은? 난 대학 4학년 여름의 인턴체험으로 입사가 확정되어 무시험 입사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 시절은 공급보다 수요가 많았던,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꿈의 시절이었다. 그럼 승진시험은? 내가 처음 다녔던 회사는 좀 많이 특이했다. 물론 승진에 필요한 과제들이 있긴 했는데, 그것이 시험이 아니라, 지정도서 북리뷰와 업무 프로젝트 심사였다. 두 번째 회사에서야 업무 성과와 형식상의 서류 심사였고. 사실, 대학시절에도 나에게 시험은 그다지 중요도가 높지는 않은, 그냥 적당히 치뤄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그렇게 시험과는 먼 곳에서 살아온 나였지만 이번 시험은 달랐다.
그냥 한번 시험 삼아 보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합격하고 싶고, 또 가지고 싶은 자격증 시험이었다.
내가 ‘직업상담사’라는 직업과 자격증을 알게 된 것은 작년 가을의 일이다.
그때 난 <미술을 통한 내 안의 작은 발견>이란 제목의 실업자 교육에 참가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4번에 걸쳐 주제가 있는 미술 작업을 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치유 프로그램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후 끝없이 가라앉는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첫 번째 외출이었다. 첫 외출은 기대보다 성공적이었다. 그곳에서 난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 한 여자 분이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따서 곧 취업을 나간다고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아마 이혼을 하고 힘든 과정 속에 있다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듯했다.
‘잘되었구나, 그런데 집에만 있던 분이라 힘들겠다.’ 그때 유일한 내 생각이었다.
우연히 듣게 된 첫 교육이 좋았던 터라 자연스럽게 다른 교육에도 관심이 갔다.
앞으로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회사에서 일하면서 쌓았던 내 경험, 내 지식들은 이제 아무런 필요가 없을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얼까? 어떤 일을 하면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어디에서 어떻게 첫 시작을 해야 하나? 그 당시 나의 고민이었다.
<핵심역량분석>이란 강의가 눈에 들어왔다.
반나절에 걸친 강의에서 차분히 나의 강점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이 강의를 듣는 사람 중에서 또 ‘직업상담’을 공부한다는 분이 있었다.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무엇을 공부하고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 묻고 이야기를 들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정을 꾸리는 일하는 여성들에게 잠깐의 휴식이 되어주는 ‘북카페’를 하면 어떨까,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두 번째 출근을 하다가, 또는 쳇바퀴 도는 집 안 일을 하다 문득 뛰쳐나와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면 어떨까, 그곳에서 나도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그들의 지친 몸과 마음의 회복을 조용히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막연하던 나의 바람, 그냥 한 번 상상해 보던 백일몽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차와 공간에 더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겠구나! 단순한 도피나 휴식만의 공간이 아니라 희망을 발견해 낼 수 있는 의미 있는 곳이 될 수도 있겠구나!
내가 그동안 했던 것처럼 ‘조직’을 위해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고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나에게 끊임없이 회의를 불러일으켰던 그런 일이 아니라, 그 사람만을 바라보면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도움도 줄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내가 잘할 수 있고 나의 강점과 잘 어울리는 분야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고, 일 자체의 매력과 함께 충분한 시장의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취업 컨설턴트와 면담을 했다. 그녀는 나의 바람과 희망과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고 또한 자신의 이야기도 했다. 그런 공간이 있다면 자기도 즐겨가고 싶고 나에게 충분히 그런 자질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 힘이 되었다.
그녀와 이야기하면서 나도 그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나의 직장 경력과 이직, 흔들림과 갈등, 모두가 앞으로 나의 자양분이 될 거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필요한 누군가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목소리와 느낌이 나에게 있다는 것도 감사했다.
MBTI 검사도 다시 한 번 해보고 스트롱 직업흥미검사도 했다. 이런 도구들도 나를 찾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이런 도움을 첫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처럼 필요한 사람이 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나의 개인적인 체험들을 객관화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또 관련 공부를 하고 훈련을 받아야 했다. 실업자 훈련을 신청했고, 관련 강의를 검색했다. 처음 접하는 분야이니만큼 혼자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참으로 다행히 집에서 10분 거리의 여성개발센타에서 곧 관련 강의가 오픈 예정이었다. 9시부터 1시까지, 교육 시간도 나에게 딱 좋았다.
그때 난 생각했다. 이건 나의 길이 맞는가 보다. 이렇게 나를 위해 모든 상황이 준비되어 있다니...
하루 4시간씩, 3개월에 걸쳐 두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자격증과 실무를 함께 대비하는 강좌였기 때문에 더 좋았다. 공부 자체가 재미있었다. 강사들도 좋았다. 처음 접하는 직업상담과 직업심리 과목을 통해서 나의 체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노동시장과 노동법규도 재미있었다. 직업의 세계가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도 직업정보론을 통해 배워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과의 만남이 좋았다. 다양한 경력과 나이대의 우리들은 함께 공부했고 함께 간식을 먹고 끝없는 수다를 떨며 그 엄청난 눈을 밟으며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새벽엔 연구원 1차 관문인 <개인사>를 썼고 아침에는 신랑과 아이들을 챙겼고 오전에는 강의를 들었다. 오후와 저녁에는 집안일을 했고 아이들과 함께 했다. 아이들이 잠든 후에는 다시 <개인사>를 썼다. 빡빡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연구원 2차 레이스와 강의를 함께 하면서도 힘들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바로 나의 꿈으로 가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3월, 첫 관문인 1차 객관식 시험을 보았고 연구원 2차 레이스를 마쳤다.
시험은 아주 좋은 점수로 통과했고 제일 힘들었던 면접여행을 거쳐 연구원도 최종합격했다. 나에게 봄은 찬란했다.
너무 일찍 기뻐했던지 본격적인 연구원 활동이 시작되고 또 강의가 끝나면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시간에 쫓기기 시작했고 덩달아 마음도 바빠졌다. 쉬운 길로 손짓하는 한 두 번의 유혹에 마음도 흔들렸다. 다행히 냉정한 신랑의 충고와 변경연 홈페이지의 글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길을 새로운 방법으로 즐기며 걷겠다고 다잡을 수 있었다.
단순히 책만 보고 자신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할 것을 요구하는 연구원 생활은 내가 꿈꾸던 것인 동시에 적응시간과 새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2차 주관식 시험이 다가오면서 준비를 못해 조급해지고 이번에 응시를 포기하고 다음으로 미룰까 고민도 잠깐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시험을 이틀 앞두고 다시 책을 폈고 이틀 내내 종이에 빼곡히 써나갔다.
지난 일요일, 시험을 끝내고 나오면서 공부가 부족했음을 알 수 있었다.
벚꽃이 휘날리는 여의도를 걸으며, 그래도 기뻤다.
나는 꿈을 향해 또 한 발을 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