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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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떠났다.
두 아이와 내가 덩그러니 남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아내는 지난 금요일 2박3일간 育我 휴가를 내 홍콩으로 떠났다. 당신은 위의 두 문장을 보고 파국 같은 불경스러운 사건을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당신은 이렇게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흔하게 쓰는 <여행>이라고 하지 <떠남>이라고 했냐'고. '떠남이라고 하니 뭐가 있어 보이지 않냐'고. 핏대를 세워 말하지 않아도 당신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 당신의 그 말이 내게 필요했을 뿐이다.
떠남은 극적인 용어다. 일상회화에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거기에는 주체의 의지와 소소한 격정이 묻어 있다. 입국장과 비교되는 출국장의 풍경을 보라. 후줄근함과 설렘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제공항과 버스터미널에서 각각 지인에게 전화하는 두 사람이 있다. “8시에 떠나.”, “8시에 출발해.” 어느 쪽이 공항에서 전화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가. 신화로의 입문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눈 딱 감고 뛰어내리는 번지점프대 같은 것이다.
2박3일의 기간이 아내에게나 나에게나 거추장스러운 일상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본질에 몰입할 수 있는 통과제의가 됐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니 제단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구석에 쳐박혀 있던 여행용 트렁크가 며칠 전부터 거실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트렁크가 사람 누울 자리를 며칠이나 차지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가구의 하나인 양 예사로 봤다.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이 구절을 진작 봤더라면…『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다가 발견한 이 문구는 내 얘기였다. ‘트렁크’가 바로 상징이었다. 개수대에 떨어지는 수돗물방울처럼 트렁크는 고요와 침잠으로, 누군가 지퍼를 열어젖히고 모험의 세계로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지금 이 땅에 없다. 함께 살아온 세월이 수 천일인데 떠나간 사람의 빈자리는 남은 자들의 기억에서만 태가 난다.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아이들은 긴가민가할 것이다. 그러다 우려가 현실이 되면 어른이나 아이나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머리를 가로젓다가 이윽고 자신의 심장에 분노의 수류탄을 까는 게 이런 얘기의 극적인 내러티브 공식이다. 아이들은 밤의 일수에 따라 사태의 중대성을 판단한다. 아내는 아이들과 사흘 밤을 자고 오기로 약속했다. 다행이다. 사흘은 쥐도 새도 모르게 종적을 감추기에는 황망한 기간이다. 씩씩한 딸아이가 아침에 깨자마자 의외로 눈물을 보인다.
“엄마 언제 와?”
“이틀 밤 자면 와.”
“보고 싶어.”
버들잎처럼 부르르 떠는 마음을 알기에 안아줘 보지만 그 눈빛을 풀어주기에는 쌓인 시간들이 적다. 아들애 어린이 집에 다녀온 사이 딸내미는 공놀이를 하다가 넘어져 앞니가 부러졌다. 다쳤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일상은 보이지 않는 긴장의 관계망으로 유지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녀가 떠나자 아이가 다쳤다.
“공포는 그 본성에 있어서 파괴적이고 고통스러운 재앙이 임박해 있다고 생각될 때 느끼는 일종의 고통이며, 연민은 마땅히 고통 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 재난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러한 일이 우리 자신이나 우리와 가까운 자들 중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런 공포와 연민의 감정들이 일깨워져서 예술적 기교에 의해 해소될 때 카타르시스의 쾌감을 느끼게 되고 말야.
그의 말처럼 난 2박3일을 의식적으로 일종의 제의기간으로 설정하고 압축기에 넣어 짜보려고 한다. 캠벨이 동의할 지 모르겠지만, 일상을 압축하면 질서를 위협하는 욕망과 그 근간을 이루는 정서들이 참기름처럼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을까. 그래도 본질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액기스는 좋은 것이다. ‘떠났다’고 했을 때 당신이 느꼈을 불안의 종자를 화분에 담는다. 지퍼를 열고 들어가 화분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몸을 만 후 트렁크의 지퍼를 닫는다.
삶은 공주의 잠이고 죽음은 공주의 깨어남이란다. 출발할 수 있을까. 불안의 종자에서 희망의 꽃을 피워 돌아올 수 있을까.

누군가는 호탕하게 아이들과 함께 혼자 남겨진 사실에 기반을 두고, 누군가는 한번쯤 자아와 정체성 및 믿음에 기반을 두었을 시간과 공간의 암전 하나.
그러면 그렇지... 라는.
무엇을 하던지 간에 일상의 붙박이를 떠나 모처럼의 2박 3일 간의 부재라는 명제 하에
어떤 이에게는 아이의 앞니가 부러진 사실보다도 순간 온통 깜깜하게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을 보이지 않으나 어딘가로부터 들려올 비명에 더 귀 기울이게 되었을지도 모를,
어떤 이는 순간의 죄의식을 유발하게 되고야 마는 헛헛한. 暗轉 둘.
아이에게 벌어진 상황에서만 비추어본다면 떠남이라는 단어는 누군가에게는 무지 억울한 표현일 수 있겠다는 암전 셋.
매일 문밖만 나서면 멀리 떠나, 아니 곁에 바싹 들러붙어 있는다고 하여도, 설령 오감이 모두 아이나 가족에게만 꽂혀 있는 듯이 보이고 주장함에도, 심지어 둘만의 그 짓거리를 하고 있을 때 조차도
정작은 자신에게만 몰두해 있는 사람처럼 전혀 낯선 이방인의 모습을 하는 것을 본인은 이해나마 할 수 있을까? 암전 넷.
암전은
.....
.....
시공간을 통해 풀기도 하고 묶기도 하는 끈 또는 매듭? ^-^*

풀기도 하고 묶기도 해야 하는 혼돈을 질서 있게 정리해 가는 간결한 삶을 우리는 배우고 싶은 것은 아닐까?
이 날들이 쌓이고 모아지면 융통성의 하늘하늘 휘는 허리를 낭창낭창하게 간직하게 되기를 바라며.
부드럽되 맥없이 부러지지 않는...
끈 또는 매듭은 눈빛만으로나 무덤덤한 온기만으로도 너무 충분한,
상대에게(1차적인 관계에서 나아가 그대안의 무리들에게 점차 그대의 빛으로 물들여질... ) 또는 상대로부터 흘러드는 이심전심 불필다언(不必多言) 의 교감, 진한 생명력 같은 것들이 아닐까?
그것은 또한 그대안에 담겨 있는 연두빛 세상으로부터 흘어 나오는 향기=글발(心願) 들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