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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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애 7 - 명의를 찾아서
나는 산에 머물러 있기를 참 좋아한다. 긴 세월 변함없이 산을 사랑해 왔다. 북한산 가까이 살 때의 일이었다. 그날도 변함없이 오후에 산책을 나갔다. 이리저리 동행인을 찾는 것도 귀찮아서 혼자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북한산 옛 성곽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즐거워할 때였다. 갑자기 왼쪽 가슴에 매우 강한 통증이 왔다. 이제껏 아파본 느낌 중 최고의 아픔이었다. 쿡쿡! 가슴을 찌르더니 멈추었다가 다시 한번 쿡쿡 가슴을 찔렀다. 겁이 덜컥 났다. 평소에 아파 누워본 적이 잘 없었기에 병 걱정없이 잘살아왔는데 어쩐지 이번엔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러나 또 바쁜 일상은 그대로 이어졌고 나는 잠시 그 아픔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해 가을과 겨울에 감기로 인한 기침이 떠나질 않았다. 오래 누워서 쉬었다. 집중이 필요한 일은 모두 미루어둘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침 감기는 기관지가 약한 아버지를 닮은 내력이라고 생각하며 참고 견디며 지나갔다. 그런데 나를 막바지로 몰아 병원을 찾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일이 생겼다.
그날, 늘 하듯이 이문학회에서 한문 수업을 마치고 동료들과 적포도주를 기분좋게 마셨다. 그리고 언제나 나를 집까지 잘 데려다주곤 하던 친구와 차를 타고 오다가 속이 너무 머슥거려서 차를 멈추고 길에서 조금 전에 마셨던 술을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그리고 기분이 몹시 좋지않았고 어지러웠다. 내가 오랫동안 술하고 친하게 지냈었기에 술의 조화를 좀 알고 있는데 이번 증상은 너무나 익숙하지 않았다. 몹시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내 몸을 내가 좀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래 어딘가 좀 이상했다.
그래서 네이버 검색을 하고 내게 나타난 모든 증상을 종합해서 진단을 내렸다. 암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입소문 좋은 개인 병원을 찾아갔다. 중년의 의사는 매우 친절하게 나를 맞이했고 몇가지 검사를 한 후에 정성스럽게 나의 얘기를 듣더니 매우 다정하게 나의 예측이 그대로 맞았다며 성심을 다해 나를 위로했다. 나는 순간 매우 불행했지만 그 의사의 태도는 참 훌륭했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명의라고 알려진" 베스트 5" 를 알려주며 신속하게 수술 일정을 잡으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온갖 정보를 다 종합하고 입지조건도 다 알아보고 닥터를 골랐고 병원을 정했다.
마침 그해에 학회장을 겸하고 있던 내가 선택한 닥터는 그의 아내가 암진단을 받았을 때 누구에게 부탁을 할까 매우 고심하다가 스스로 집도를 해서 매스컴을 타기도 했었다. 나는 운이 좋게 2주 후에 약속을 정할 수 있었다. 나는 위기에 처하면 자동적으로 합리적인 인간이 되어 문제해결에 집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더구나 나에게 국한된 일이기에 감정의 쏠림이 없어 많이 망설이지 않고 결정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이성이 나를 잘 이끌어 나갔다.
암은 무서운 병이다. 나는 나를 돌볼 주치의가 암에 관해 쓴 책을 구해서 읽었고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몰려왔다. 한번도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지않았던 터라 불안을 감당하는 일이 몹시 두려웠다. 그래서 병원의 원목실을 미리 방문하여 수녀님께 도움을 청하고 수술시간도 알려드리고 미사도 드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영혼을 위한 길안내까지 당부했고 수녀님은 그 힘든 시간동안 끝까지 함께 하시며 잘 보살펴 주셨다.
학교는 그대로 다니고 하던 일도 그대로 해나가며 하나씩 둘씩 주변을 정리를 해나갔다. 청소도 잘 해두고 이불도 다 손질해두고...나는 바느질을 싫어했지만 제일 먼저 이불들을 빨아 바느질을 잘 해서 정리했다. 그리고 불필요한 물건들은 모두 떠나보냈다. 사물은 그런대로 정리가 빨리 끝났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는, 도저히 눈에 밟혀서 두고 갈 수는 없는 사람 하나가 남았다. 내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며 내 모든 한숨의 근원이기도 했던 대한민국 육군 졸병 하나가 내 발목을 붙들며 길을 막는다.
유난히 아름다운 심성을 지녔고 탄생의 일화도 드라마틱 했던 까닭에 기대가 컸던 아이였었다. 부모의 꿈이 너무 컸었는지, 아니면 정성이 부족했는지 이 아이는 부모가 내어놓는 가장 좋은 것을 언제나 거절했고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을 항상 골라 가졌다. 자기 고집에 스스로 마음 고생을 많이 한 그놈은 친구들을 따라 군대에 가 있었다. 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놈을 두고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울었다. 길을 가다가 큰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지금은 그 모든 일이 다 지나간 역사가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여유있게 회상을 하지만 그때는 정말 심각하게 죽어가야 할 암환자였다. 어둠이 짙었으니 빛도 강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죽을 것 같던 12사이클의 항암치료도 끝났다. 수술 후 5년을 더 살아 있었으니 암 생존자로 등록이 되었다. 나는 암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다. 지금 명의를 제목으로 하여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만약 내게도 어쩔 수 없는 시간이 다가와 나를 의사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며, 최선의 선택이 될까...하는 생각을 계속하다가 기억에 남는 의사가 있어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다.
그해 겨울, 수술 이틀 전에 이미 병원에 들어가 사전 검사를 하며 입원해 있던 동안 큰아이의 졸업식이 있어서 몇시간을 외출했다가 돌아왔다. 물론 주치의의 허락을 받았던 일이고 데스크에도 양해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삼교대 근무의 병원 시스템은 내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젊은 담당의사는 나를 찾아 병실을 여러 번 다녀갔다 한다. 저녁이 되어 다시 나를 찾은 젊은 의사는 나를 복도로 불러내더니 사방이 훤히 트인 데스크에서 나를 검진하겠다 한다. 물론 그의 진료실이 따로 없는 열악한 우리나라의 병원 환경이라는 건 잘 알겠으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낼 수 있는지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이 불가사의 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에게는 내가 또래가 아닌 늙은 여자에 불과해 사람이 아니고 어떤 사물처럼 보였을까? 그 순간 나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그의 진찰을 거절했다.
그 후부터 그는 매우 눈에 띄게 나를 미워했다. 주치의가 내 의사를 존중 해주며 내게 좀 더 많은 것을 허용하는 듯한 분위기가 그를 분노에 가득차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그에게 특별히 공손하지 않아서 였을까? 어쨌든 그는 나중에 수술실에서 까지 나를 미워했다고 그의 동료들이 알려주었다. 나는 그동안 앓아 누워본 적이 많지 않아서 몸이 아픈 것이 얼마나 서러운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며 체면도 다 잃고 내게 남아있는 모든 것을 등 뒤에 두고 죽어 깨어나지 못할 위험한 수술을 하러 들어가야 하는데,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젊은 의사의 의기양양함과 그가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힘에 살려달라고 매달려야하는 내 운명이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내 친구들은 모여서 나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고 주치의는 정성을 다해 그의 명성에 흠이 없을 성실성으로 나를 위해 집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 5명을 수술해야하고 공사다망했던 주치의는 수술의 마무리는 젊은 후학들에게 맡기는 것이 관행이며 또 정책이라고 했다. 그때 당연히 그 과정에 참가했을 이 젊은 의사는 시체같이 무력한 환자의 몸에다 미운 마음을 잔뜩 불어넣으며 봉합을 했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과장이 아니라 그 후에 그의 친구들이 말해줘서 알게 되었다.
주치의는 수술이 매우 잘 끝났다며 회진인사를 하고 그 후에 그 젊은 의사는 다시 만나는 일이 없이 나는 퇴원을 했다. 그때 그 젊은 의사는 전문의 과정이 모두 끝나서 새로운 곳으로 옮겨간다 했다. 그러니 실습 과정이 모두 끝이 났고 대학이 없는 종합병원이었으니 그런 허술한 태도가 허용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지금은 이해를 한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주치의에게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의사로 커나가는 것이지요.” 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열 번 처신을 잘못했다고 해도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누구나 언젠가는 입장이 바뀌는 때가 있으니 누구든 힘을 가지게 되면 더더욱 자기의 태도를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더구나 생명을 담보로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되는 의사들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기술보다 앞서야할 것 같았다. 오늘 그동안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놓고 보니 새삼스럽게 그때 그 수술자리가 다시 아프고 슬픔이 가슴가득 차 오른다.
명의는 의술과 인술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병원이 정말 싫다. 그 누군들 병원을 즐겁게 들어서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때로는 “아이구 우리 선상님!” 이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따라 나오게 하는 훌륭한 의사들도 많지 않은가? 어쩌면 신의 손길을 따라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제일 먼저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다음에 내가 죽어갈 때에는 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 제발 미움을 받지 않고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평상시와 다름없던 추운 겨울 아침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방문을 연 저는 두려움에 떨며 엄마를 불렀지요.
'엄마, 와보세요. 아버지가 좀 이상해요'
긴 병에 효자없다고 했던가요?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드리지 못하고 아버지를 보냈습니다.
그 때 전 막 회사에 적응하느라 동동거리던 사회 초년생이었고, 남동생은 말그대로 대한민국 육군 쫄병이었지요.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황망하게 집으로 오던 동생의 새파란 머리통과 파랗던 두 손이 생각납니다.
오래 아프신 끝에 편안히 가셔서 다행이라는 말로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오히려 이제 가끔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모두가 힘들던 시절이 지나고 편안해지니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좀더 잘해드릴걸, 좀더 따뜻한 딸이 될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가끔씩 후회가 되네요.
이런게 아마 삶인가 봅니다.
그래도 살아남은 자들은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누며 서로 보듬고 살아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