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 조회 수 2433
- 댓글 수 7
- 추천 수 0
‘적절함’
1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병사에게 상을 주려던 비스마르크는 웃으며 말했다.
“수고가 많았네! 자, 여기 돈 100마르크와 훈장이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참고로 이 철십자훈장은 돈으로 치면 5마르크 정도일세! “
병사는 잠깐 동안 생각하더니 경례를 부치면서 말했다.
“ 그럼, 95마르크와 훈장을 주십시오!”
2
고부간의 갈등이 심해져서 아들이 몹시 힘들어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며느리를 앞에 두고 아들을 몰아세웠다.
“ 내가 더 중요하니, 니 마누라가 중요하니, 누가 더 소중하냐?
만약 나와 네 아내가 죽게 될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고 너는 둘 중에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하겠느냐? 나냐 네 마누라냐?“
아들이 아내와 엄마를 번갈아보더니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 아내를 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죽겠습니다.”
3
치즈케익을 놓고 큰얘와 작은 얘가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운다. 엄마는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 좋다,! 치즈케익을 나누는 것은 형이 하고 고르는 것은 작은얘가 먼저 하도록 해라!”
*** *** *** *** ***
‘적절함’
어쩌면 내가 아주 오랜 세월을 찾아 헤매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나 뿐이겠는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이 아닐까?
‘적절함’이란 문제가 생겼을 때의 답이다. 즉 안정을 잃어버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솔루션이다. 사람에게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늘 우리의 주변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적절함을 경험하고 느끼기에 그것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늘 알듯말듯하다. 지나고 나서야 ... ‘그 때, 그랬어야 하는데...’ 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가?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선수로써 검을 다루는 과정에서, 그리고 Coach 가 되어 검을 다루는 사람과 함께 하면서 늘 해야만 했던 생각?,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이 시합을, 이 상황을, 잘 해결할 수 있을까?
난 늘 길이 없는 막다른 길에 서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길을 찾지 않고 길을 만들었었다.
‘길은 사람이 가야 나는 법, 길이 없으니 이제부터 내가 가겠다. 그것이 길이다.’ 난 늘 정답이 없는 문제를 풀어서 해답을 찾아야 했고 그것이 내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은 늘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것이 최선의 답이었는가? 정답이 될 수 있는가? 해답이 곧 정답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늘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나는 논문을 쓰고, 이야기를 하고, 답을 찾으면서 뭔가 불만스러웠다. 어떤 논리적인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그래! 어쩌면 내가 검을 들고 살았던 30여년 동안의 화두가 바로 이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절함’ 온갖 변화를 일으키면서 잡힐 듯 말듯한 그 분명하면서도 모호한 그 상태를 찾아서 내가 평생을 해메었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15년이 넘었지만, 내가 펜싱검법을 정리하여서 - 한국엔 펜싱의 정통체계가 없다. 유럽에는 크게 5대 주류 즉 프랑스, 이태리, 헝가리, 독일, 러시아 의 펜싱 스타일이 있다. - 스포츠과학적인 방법론으로 체계를 세워보려고 했을 때,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스포츠 과학연구원을 거쳐 서울대에서 연구를 하시던 그분이 그러셨다.
“김선생! 이미 세부적인 연구는 많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통합이 되지 않습니다. 통합을 위한 가설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대립되는 이론들을 통합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질문을 하러갔던 내가 오히려 질문을 받게 되자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도덕(道德)이 아닌가요?”
물론 그것은 내가 정리해두었던 간결한 체계에 나오는 이야기였지만 의식적으로 하는 체계적인 답변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부지불식간에 한 답변이었다.
최근 며칠을 고민고민하다가.... 새벽에 일어나 문득 그 때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 왜 내가 하필 그때, 그 순간에, 그 질문에 그 대답을 했을까? 거기에는 뭔가 융이 말하는 공시성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에 머리 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는 생각이 있었다.
“도덕?! 우주와 인간의 법칙! 아,,, ”
“그렇다면 그것을 명제로 만들려면... ‘있는 그대로’ 그렇지, 도는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근데 그것은 개념으로 만들려면 ... ”
그렇게 며칠이 지나다가 우연히 변경연의 ‘주제’그러니까 이야기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는 글쓰기에 관한 글을 읽다가 생각이 났다.
“맞아... ‘적절함’ 적당하다는 그말, 모순이 없는 그러면서도 분명하고 수없이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바라보는 자-개인의 내적 지식과 경험을 통한 주관적인 관점- 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한 순간이면서도 영원한 ... 그래, ‘적절함’ 바로 그것이다. 내가 늘 중얼거리던 이퀄리브리엄 (Equilibrium) 그래 그것이 중용(中庸)이겠지, 그것이win-win 이겠지 ... 그리고 또..... ”
그렇다.
나는 자다가 깨어나 비몽사몽간에 결정했다. 나의 주제는 ‘적절함’이다.
내가 했던 모든 말, 이야기들이 주인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
꿈 벗 프로그램에서 스승님이 나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러셨었다.
“때로, 우리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발견한 것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거나
평범한 것일수도 있다.“ 라고...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난 늘 길이 없는 막다른 길에 서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길을 찾지 않고 길을 만들었었다.
‘적절함’ 온갖 변화를 일으키면서 잡힐 듯 말듯한 그 분명하면서도 모호한 그 상태를 찾아서 내가 평생을 해메었는지도 모르겠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맞아... ‘적절함’ 적당하다는 그 말, 모순이 없는 그러면서도 분명하고 수없이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바라보는 자-개인의 내적 지식과 경험을 통한 주관적인 관점- 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한 순간이면서도 영원한 ... 그래, ‘적절함’ 바로 그것이다. 내가 늘 중얼거리던 이퀄리브리엄 (Equilibrium) 그래 그것이 중용(中庸)이겠지, 그것이win-win 이겠지 ... 그리고 또..... ”
.........................
몸과 마음의 일체된 -상하좌우 및 대칭과 비대칭의 연결선상 안에서 모든 것들과 내면에 기의 흐름까지도 따로 또 같이 한데 어우러져 시공을 초월한- 그야말로 중력이나 나뭇잎 하나의 떨림까지도 모두 적당히 안정을 이룬 상태에서의 합일된 균형... 온갖 우주만물이 평형의 상태에서 오는, 뾰족함과 패임이 상쇄되어 조화로운 균형감?
말은 참 쉽다. 중용의 도! 란
얼마나 신비하리만치 가뿐한 힘인지... .
과연 백산 같고 백산 답다.
그려. 어려울 것도 없지.
우리의 삶은 저작거리에서 찾아지는, 저마다의 혼돈으로 시작된 어우러짐이 바로 질서와 균형은 아닐까?
부분의 전체성, 각자의 동시성, 서로 다름이 이루는 조화, 저마다의 기질과 특성과 탐구로 어우러짐이면 가히 족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도를 찾아 떠나 돌아오지 않고
누군가는 자신의 주먹을 도라 여기며 속 편히 자빠지고
누군가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안달하고
누군가는 사는 것이 별거냐며 지지고 볶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길 뿐이고
...
에헤라 디야. 이것이 도 중의 도, 대도도 소도도 아닌 적절함, 중도 아니겠남?
오늘 내가 찾아야 할 도는 까탐이라는 주제 속에서 적절히(?) 뒹굴어야 할 일인가보다.
주어진 상황에서의 최선이고 단계적 마무리가 필요할 수밖에는 없으니까.
그런데 시원하기보다 나는 왜 이리 어지럽지??? 끙!
.................................
왜 무엇을 쓰겠다는 것일까? 어떻게 쓰겠다는 것일까?
왜? 졸업작품. 아울러 빵과 사명이 되면 더 좋음.
무엇을 쓸까? 일과 경험과 관심사를 바탕으로 한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만만한 것- 그거라면 할 말이 좀 있는데(왜? 맺혔거나 의미가 있다고 느낌) 내가 생각하는 그것은 이렇고 저렇고 요래. -> 그것을 한마디로 하면 무엇(이거라고 할 수 있어)이고 : 주제 -> 그럴 듯한 제목(독자 입장에서 구미가 확 당기는 것이던가, 이것만은 꽥 하고 지르고 싶은 것, 혹은 작가의 지향이나 관심사와 정체성; 산형은 그것이 적절함??? )
어떻게 전개해 나갈 수 있을까? 이러 저러 하고 따라서 요렇게 짚어나가고 싶어 : 목차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 내면 좋을까?- 나라면 말야,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 관점을 부각시켜 나가고 싶어.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이 더 필요할까 등을 조절: 컨셉 결정
다시 들어와 윗글을 지우려다 말고 드는 생각을 추가해 봄. ㅋㅋ ^-^*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와서
제가 던지는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으로 돌아오는 네글자였습니다.
수많은 변수들의 상호작용이 상황을 만드는 까닭에
비슷해 보이는 상황도 따지고 들면 전혀 다른 상황
참고할 만한 선례는 아무리 뒤져봐도 없고
適宜 對處 여부를 판별하는 유일한 기준은 결과!
말 그대로 福不福의 세계!
뭐..이런 게 다 있냐고..넘 엉성한 거 아니냐고..
마음속으로만 항의하고 항의하다
그 울분으로 가슴이 온통 굳은 살로 딱딱해지고 나서야
이게 나만 괴롭히려는 계모의 심술이 아니였음을 알았습니다.
適宜 對處는
어른들의 룰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의젓한 어른이 되고 싶은 욕심에
이제사 분노를 거두고
適宜 對處를 연습해 보기로 마음먹은 즈음
멀리서 들려오는 선배님의 포성!
초강력 네비를 손에 넣은 듯 든든하기만 합니다.
발자국을 좇는 후배는 힘이 되는 걸까. 짐이 되는 걸까.
판단은 안서지만서두
최선을 다해 적절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보겠습니다.

원래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닌디
'니도 난중에 커보먼 알어! ' 그러면 더 궁금하고 성질나제요...
적당하게 하라는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회사에서는 뭐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니
복잡해지거나 문제가 되지만 않게 하라는 이야기앙이요?!
답답해서 물어본디
'니가 알아서 적당히 해랴!' 고 하믄 성질나지요...
곧 니맘대로 하고 책임도 니가 지라 는 이야긴지
내가 책임은 질테니 귀찮게 하지 말라는 이야긴지...
는 관계와 인간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죠?
모든 일에 너무 많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엎신께...
가벼운 마음으로만 오소... 구경하는데도 심각할 필요는 없잖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