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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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애 8 - 따귀 맞은 영혼
만약 내가 쓰는 글을 아무도 읽지 않고 드물게 읽어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내게 말을 걸지 않으면 나는 마음이 무척 상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겠지요. 그러다가 글의 주제가 너무 무거운지, 조근조근 하는 말이 잠이 오는지, 늘 똑같은 말만 되풀이해서 지겨워졌는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다가 그 끝에 "아, 사람들은 나를 싫어 하는구나......." 라는 곳까지 감정을 끌어 올리게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수치심에 어디로 숨어버리든지 두 번 다시 글을 내놓지 않던지 하다가 급기야는 이곳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친 나는 어쩌면 익명의 독자들을 무시할 수도 있을거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모두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도 독자가 가지고 있을 이유는 생각해 보지 않고 홀로 상처받아 상한 마음으로 울고만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상한 마음, 곧 마음을 다친다는 것은 마음에 따귀를 맞는 것과 같다고 게스탈트 심리치료자인 바데츠키는 표현했습니다. 곧, "따귀 맞은 영혼" 입니다.
지난 주말에 계속 이 주제를 생각하며 낙동강을 따라 걸었습니다. 고요히 흐르는 강은 우리 어머니의 젖줄과 같아 우리의 오래된 정서를 안내하는 마음의 고향이지요. 그 강이 지금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소음과 먼지속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흙탕물이 되어 힘들게 힘들게 이 산하를 휘돌아 흘러가고 있습니다. 개울가에 휘늘어진 왕버들과 연록 빛 새순을 되비치던 거울같은 강물은 이제 하나씩 둘씩 사라져가고 앞으로는 옛날 이야기 속에서나 살아남게될 사진 한장, 한장의 그림이 되고 말겠지요.
어떤 사건들로 인해 마음을 다치게 되면 우리는 자기자신을 온전하고 한결같은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감정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깊은 불안에 빠지게 되고 무력감과 실망 고통 분노 경멸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런 감정들은 스스로 자존감을 낮추어 사람과의 관계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왜 저사람이 저렇게 반응하는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고 나는 마음을 열지 않으므로 그래, "저 사람은 나한테는 이미 죽은 사람이야" 라며 관계를 끝내버립니다.
마음이 상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삶의 한부분입니다.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한계 상황이 외부부터 주어질 때 사람들은 "마음 상함"을 경험합니다. 노화도 죽음도 어느 날 이렇게 찾아오게 됩니다. 늙어가는 것은 사실 겁쟁이들의 몫은 아니지요. 왕년의 명배우가 남긴 말입니다. 죽음이라는 실존을 통해 우리는 인간으로서 결코 피할 수 없는 마음 상함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마음 상함"이 우리의 삶에 독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능동적으로 현실에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일에는 공부가 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가끔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소란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한번 고성으로 끝나는 일이 있고 내릴 때까지 끝나지 않는 싸움도 있습니다. 지극히 사소한 문제로 시작해서 논쟁이 심각해져서 사람들을 편갈라 놓기도 하지요. 참을성을 가지고 가만히 들어보면 대개는 나를 알아주고 존중해주지 않는다는 서운한 마음이 바탕에 있습니다.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러서 공감을 얻지 못할 때도 많겠지요. 때때로 열이 많은 젊은 사람은 성깔 부리며 당신이 잘못한거라고 따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그 반응을 두고 또 새롭게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예 일어나서 내려버리는 사람도 있고, 아무도 대꾸해주지 않아 혼자 끝없이 불평을 반복하는 경우가 이어집니다. 이렇게 약간 거리를 두고 벌어지는 사건들은 빨리 지나가 버리고 흔적을 깊이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이런 불운을 처음 겪게 되는 사람은 낯선 사람에게 문을 닫아걸고 자신의 집을 달팽이관처럼 접근하기 어렵게 단단하게 만들어 둘 수 있습니다. ‘도대체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야?’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못합니다. 이 모든 일의 사정이 다 이해될 때까지 말이죠. 어릴 때의 상처는 더 깊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바도 없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돌을 맞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때로는 원인 제공자가 분명할 때조차도 자기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혹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며 감당하기 어려운 정서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동생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며 어쩔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 너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책망을 듣는다든지, 친구와 물에서 놀다가 나만 살아남은 경우라든지... 본인이 미처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 충격이 극심하면 그때 그 장면은 마음 속 저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리고 막연한 죄책감만 남아 나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내마음은 오랫동안 평화를 찾지 못합니다.
어빈 얄롬은 아버지가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때 슬픔을 완충시키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던 어머니가 ‘다 너 때문’ 이라고 했던 비난을 30년도 더 넘게 가슴에 안고 살아왔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되고나서도 한참 후에야 겨우 그때 일을 생각해 내고는 다시 그때의 아이로 되돌아가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속 깊은 울음을 토해 내고난 후에야 겨우 그는 자기자신과 화해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면 한 번 쯤은 내게 각인된 죽음의 의미를 공부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상한 마음의 치유는 상처를 입힌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개입하며 관계가 불편해졌거나 상종을 하지 않으며 소통의 가능성을 끝내버린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열정이 많고 기대가 컸던 관계에서는 치명적인 상처가 되어 서로 할켜 피를 보게 될 때까지 계속합니다. 비록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죠. 미진하게 끝이 나는 따귀질에는 아직 뺨을 덜 맞아봐서 그러는 거라고 염장을 질러대며 두고 보자고 벼르기도 합니다. 참 무섭습니다. 하나의 생각과 하나의 각도만을 가지고 사건을 보고 있으면 눈 먼자들의 도시에서 사는 삶이 되고말겠지요.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를 이기지 못해서 자기 자신에게 공격할 때입니다.
따귀를 맞은 영혼은 잃어버린 자신의 부분들을 만나야 합니다. 똑같이 마음을 다치더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대처하는 법을 익히고 덜 파괴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직접 자기 손안에 쥐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책임을 떠맡는 일이 자기앞의 생을 사는 지혜입니다.
죽음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는 건 아닌데, 어쩐 일인지 제 가슴 깊은 곳에 너무 크게 그리고 공포스럽게 그 놈(?분?)이 자리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생기고 나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가끔 자리에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곤 해요. 그러다가 생각하죠. 다행이다. 아직 시간이 있어서. 그리고 또 생각하죠. 잘 살아야겠다. ㅎㅎ
즐거운 어린이날이예요. 주원이는 열이 40도까지 오르고, 짝꿍과 주하도 기침이 심하지만... 나름대로 할 꺼리를 찾아서 잘 놀래요. 선생님~ 일요일에 뵈요~

자꾸만 저를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온전히 저를 위해 띄워진 편지를 읽는 느낌이 드니까요.
특히 이글은 문장 사이사이에 흐르는 선생님의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으니
딱 이순간의 저를 위한 맞춤형 영혼치유토탈패키지같습니다.
세상에 자비가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
무자비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얼기설기 만들어 쓰고 다니던 갑갑한 영혼의 외피.
이 곳에서 느껴지는 따사로운 기운에 저도 모르게 훌떡 벗어던져
속살을 드러내고는
당연히 밀려오는 황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어이없게도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 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아이다. 나는 사랑할 줄 모르는 존재다.
아닌 척 해맑은 미소를 지어대지만 그건 엄청 연습해서 만들어낸 위장이다.
나는 상처투성이다. 나를 안으면 너까지 감염될지도 모른다.
혹시나 나를 사랑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지금이 도망칠 마지막 기회다.
이 고백이 당신이 보여준 호의에 대한 나의 유일한 보답이 될 것이다.'
또 시작이구나..파괴적인 순환의 첫 단계를 벌써 시작해버리고 말았구나..
알아차리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습니다.
여기서까지 그렇게 도망치고나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겠다고 또 그러는 걸까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대처하는 법을 익히고 덜 파괴적인 방법
찾을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것이 제가 선생님의 다음 글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유라면
넘 부담이 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