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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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게 없어요.’
아들의 말 한마디가 유연의 머릿속을 온통 뒤집어놓았다. 샤워하는 내내 메아리가 되어 공허한 마음을 울렸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그토록 유연의 가슴을 헤집는 것일까. 다시금 아들과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아들아, 아빠 왔다. 아빠가 왔는데 인사를 해야지.”
아들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뽀로통한 체 책상에 앉아만 있었다.
“엄마한테 혼났구나. 엄마는 어디 가셨니?”
“엄마는 저녁 모임이 있다고 조금 전에 나가셨어요.”
“그래. 저녁은 먹었고?”
“네.”
“근데 무슨 고민이 있니? 아빠가 왔는데 쳐다보지도 않니?”
“내일 일기 숙제를 가져가야 하는데…”
“일기 숙제면 일기를 쓰면 되잖아.”
“…”
“왜 대답이 없니. 일기장이 없어? 아빠가 일기장 사게 돈 줄까?”
“그게 아니고.”
“그럼 왜?”
“일기를 쓰려고 하는데 쓸게 없어요.”
유연은 아들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일기에 쓸게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면 일기는 알아서 쓸 나이가 되지 않았나.’
“일기 쓸게 없다구?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일기 쓰기 싫어서 그러는구나. 쓰기 싫으면 쓰지 않으면 되잖니.”
“그게 아니고. 그냥 일기 쓸게 없다구요. 근데 숙제라서 꼭 써야 한다 말이예요.”
“쓰기 싫은 게 아니면 일기 쓸게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쓸게 없다는 아들의 말을 유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쓸게 없는데 꼭 써야만 하는 모순된 상황에 빠진 아들이 가엾어 보였다. ‘일기란 그 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일기 쓸 게 없다니. 혹시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유연은 놀란 마음에 얼른 되물었다.
“아들아, 오늘 학교에서 안 좋은 일 있었니? 아빠한테 솔직하게 말해 보렴.”
“아니, 없었어요.”
“근데, 왜 일기 쓸게 없어. 일기는 오늘 있었던 일 중에 기억에 남는 일을 쓰면 되는데.”
“나도 알아요. 근데 쓸게 없는데 어떻게 써요?”
“재미있는 일 없었어?”
“네~에.”
“뭐 쓸 만한 일도 없었어. 친구랑 축구를 했다던가, 감동적인 책을 읽었다던가, 아니면 친구랑 싸웠다던가 말이야.”
“없었어요. 아빠 지금 나랑 축구 할래요?”
“아니 숙제 하다말고 축구는 무슨 축구야. 더구나 날이 어두워져서 축구하기도 힘들어요.”
“그러면, 쓸게 없단 말이예요.”
“너, 지금 아빠랑 축구 하고 그걸 일기에 쓰겠다는 거니?”
“네, 그러면 안 돼요?”
“일기는 그날 한 일에 대해 쓰는 거란다. 지금 축구를 하고 쓰는 게 아니고.”
“그러면 왜 안 돼요? 아직 오늘이잖아요.”
“오늘 일기는 오늘 하루 동안 했거나 느꼈던 일 중에 기억에 남는 걸 쓰는 거란다. 알았지. 아빠는 샤워 좀 해야겠다.”
유연은 아들에게 일기를 쓰라고 하고 얼른 목욕탕으로 향했다. 유연의 등 뒤에서 아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온 몸을 꼬았다. 유연은 하루 종일 회사 일로 시달렸는데 또다시 집에서 아들과 사소한 일기로 입씨름을 하려니 짜증이 일었다. 지난번에 가족에게 짜증을 내지 않겠다던 아내와의 약속도 있고 해서 샤워를 하며 마음을 가다듬기로 했다. 따뜻한 물이 몸에 찌든 피곤을 어느 정도 씻어주니 조금 전 아들의 말이 귓가를 맴돌기 시작하였다.
‘일기에 쓸 게 없으니 쓸 거리를 만들자.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하지만 나도 오늘 하루는 정말 없었으면 좋겠다.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박쥐같은 인간. 내 기획 아이디어를 가로채가. 상사만 아니면 한번 붙어보고 싶은데. 그 인간을 내일 또 다시 봐야 된다니. 내 인생도 참 불쌍하다. 아들처럼 일기장에 하고 싶은 일만 쓰며 살 순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