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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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좋아하는 신화를 정리하기.
여러신화를 읽어도 그닥 맘에 와닿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하고, 三十而立하고 四十而不惑하고 五十而知天命하고 六十而耳順하고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하였고, 마흔 살에 사리에 의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앎이 지극하여 생각하지 않아도 깨달아지는 것),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넘지 않았다.” >라는 흔한 문구를 보고 아하!! 공자님!! 공자의 삶 또한 영웅의 삶이고 신화의 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는 70세에 가까운 아버지 숙량흘과 16살난 어머지 안징재 사이에 태어났다. 공자가 3살 되던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고 어렵게 자라난 공자는 온갖 서러운 일을 겪으며 여러 가지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하지만 언제나 뒤에서 기도하는 어머니 덕분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빗나가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들이 열심히 일한 대가로 굶주림을 벗어나게 되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공부하도록 권유했다. 어머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소년 공자는 눈물을 머금고 학문을 시작했는데,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게으름을 부릴 수 없던 공자는 학업에 정진하고 또 정진했는데, 이때 열심히 공부하는 습관이 생겼고, 그 습관은 평생 습관이 되었다. 2-3년이 지나자 공자의 학문은 눈부실 정도로 진전되어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공자는 19살에 결혼을 하고 이듬해 20세의 나이로 취직을 했다. 공자가 처음 담당한 벼술을 위리(委吏)라는 직책으로 창고의 출납을 관리하는 하급관리였는데, 계산이 분명하고 완벽하게 직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잠심 사직(司職)이라는 가축을 기르는 직책을 맡았는데 얼마나 충실했던지 가축이 모두 무럭무럭 자랐다. 이즈음에 공자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리(鯉)라 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방황하던 공자는 삶의 방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때 요순의 도와 삶의 방식을 접하고, 삶이 허무하고 고통스러울수록 그것이 극복된 요순의 삶은 기쁨의 대상으로 이해가 된다. 그때이후 공자는 방황을 끝내고 다시 학문의 세계로 빠져드는데, 큰 학문의 길에 들어선 공자는 “배우고 제 때에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토로했다.
공자는 28세 때 예의 본질에 관심을 갖고 예의 정신 속에 음악에 의한 화합의 정신이 없으면 올바른 예가 될 수 없는 것을 알고, 29세에 사양자를 찾아가 거문고를 배웠다. 거문고에 열중하여 짧은 기간에 거문고의 진수를 파악하는 수준이 되었는데, 공자의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 예의 형식과 그 형식에 깃들어 있는 내용까지 갖추어 알게 되었다. 이때 공자는 예가 각각의 입장에 대처하는 구별의 윤리라 생각하고, 그 구별에는 하나가 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 정신의 표현이 음악이었다. 그러나 음악은 그 정신 자체라 할 수 없었고, 그것은 바로 요순의 정신으로 인(仁)이라고 이름하는 것임을 알았다. 인의 정신을 갖고 예룰 실시할 때만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 공자는 “사람으로서 어질지 않으면 예를 어떻게 할 수 있으며, 사람으로서 어질지 않으면 음악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렇다면 학문의 궁극적인 대상은 결국 인을 터득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인은 나와 남을 남남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된 공동체로 생각하는 마음이다. 인을 터득하여 실천할 수 있다면 개체적 존재에서 벗어나 남과, 하늘, 모두와 하나가 되는데 이것이 진리의 삶이다. 이를 깨달은 공자는 학문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데 공자의 30세때 일이다.
학문의 전체 내용을 파악한 공자는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허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질문해 오는 제자를 만나면, 그것은 자신의 학문에 지대한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대단히 기뻐했다.
학문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공자도 학문이 간헐적으로 나타나던 즈음 극도로 혼란한 노나라에 비해 비교적 안정되어 있는 제나라로 떠난다. 자기와 같은 학문의 길로 매진하고 있는 동지들을 만나면 힘이 되고 의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데 그의 나의 35세때 일이다.
제나라에서 36세때 순임금의 음악을 첩하고 심취하여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잃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순임금의 음악을 통하여 요순의 도를 접한 공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말고 학문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고 37세때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다.
열심히 학문에 몰두하고 있던 공자는 어느덧 40세가 되었고, 공자의 40대는 학문의정상을 향하여 오로지 매진하는 시기였다.
공자는 <주역>에 학문의 정상에 도달하는 마지막 관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공부에 매진하는데, <주역>을 꿰맨 가죽끈이 끊어지고 잇고 하기를 세 번이나 되풀이하였다. 공자는 “나에게 몇 년만 공부할 기회가 더 주어져 50세 쯤 되어서 이 <주역>을 다 터득한다면 나에게 아무런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자는 50세가 되자 학문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마음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 속에서 변치않는 자신의 본마음을 발견하고, 그 본마음은 알고보니 모든 사람과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공자는 시공간을 초월한 그 본마음을 당시 사용하는 말로 天이라 부르고, 천은 만물의 삶을 관장하므로 天命(천명)이라 했다. 공자는 50세에 천명을 알았고 실천하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공자의 삶은 내용이 바뀌었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는 천명이 자신의 본질임을 자각하고 천명의 입장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공자는 세상사람들을 행복의 길로 인도할 방법을 생각했는데, 최선의 방법은 자신이 도달한 학문을 통한 방법을 택하는 길밖에 없을 것같았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방법으로 일시적으로 많은 선생을 양성하고 많은 학교를 설립하여 대대적인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정치에 종사하게 된다.
공자가 70세 되던 해는 생애에서 가장 불행한 해가 되었다. 사랑하는 아들 공리가 죽었고 아끼던 제자 안회가 죽었다. 아들은 생명을 이어주는 자이고, 제자는 진리를 이어주는 자이다, 세상을 구제하는 일이 쉽지는 않아도 안회의 시대에는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안회가 갑자기 죽은 것이다. 공자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했다 “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 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절대절명의 위가가 닥쳐도 흔들림 없던 스승의 이런 모습을 본 제자들은 의아해서 물었다. “선생님께서도 통곡을 하시는 때가 있으시군요.” 공자는 “내가 통곡을 했었구나, 그를 위해 울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해 울겠는가!” 공자의 행위는 이제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자연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공자는 자신의 모습을 “내 마음이 하고 싶은대로 하니까 그것이 모두 진리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공자의 삶은 이제 생각하고 헤아려서 행위하는 차원의 삶이 아니라, 무심히 흘러가는 물의 흐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공자가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 이유를 물어보면 자연의 이치에 비추어본 뒤에야 답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공자의 나이 73세가 되었을 때 “태산이 무너지려하는가. 대들보가 부러지려는가. 철인이 시들려는가”라며 노래를 읊었는데,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거룩한 생을 마감했다.
2. 왜 특별히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지 해석하기.
공자는 성실하게 온 정성을 다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매진한 사람이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가는 동안에 경험하는 삶의 굴곡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그는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추구한 사람으로, 삶을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 예와 음악을 통하여 인을 이루고자 노력한 사람이다.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고 그것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그는 진정 낭만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누구에게나 나눠주려 하였던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자기를 위한 학문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전체를 위한 학문을 추구한, 전체는 부분의 합이라는 원리를 깨닫고 스스로가 실천한 사람이다. 학문 탐구를 통하여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공자는 인간미와 자연미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멋진 삶의 모델이다. 공자가 학문에 뜻을 두고, 정진해 나아가 마침내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내 삶의 모델로 삼고 싶다.
3. 자신이 바라는 '나의 신화' 만들기 - 과제를 하는 동안 여러 질문을 만들어, 스스로 자신에게 적용해 보고, 동료들은 그것을 어떻게 풀어 갔는지 주시하라. 이때 좋은 질문과 통찰이 나올 것이니, 그것을 동료 하나씩에게 comments 의 형태로 전달해라.
<낭만공자 따라쟁이 낭만연주의 여행>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하였고(뜻을 두어 행함에 흔들림이 없음), 마흔 살에 사리에 의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앎이 지극하여 생각하지 않아도 깨달아지는 것),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넘지 않았다.”
내 나이 13살. 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아빠에게 대학교에 가고 싶으니 서울로 학교를 보내달라고 했다. 공자의 시기로 따르면 학문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정진하던 시기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학문에 정진을 하였으나 매양 흔들림이 있었다. 학문을 탐구하려는 목표가 명확하지 않고, 단지 학문을 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었던 20대의 시절은 비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는 배를 타고 있는 듯했다. 심함 배멀미로 중간에 뱃머리를 돌리고 싶었으나, 마땅히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렇게 버티다가 어느덧 정박한 곳, 처음엔 배를 타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는데 살펴보니 그곳의 환경은 내가 진정으로 원한 삶을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곳의 환경을 바꾸던지 내가 그곳을 벗어나던지 결정을 해야했다.
나는 비바람과 배멀미를 다 감수하고 다시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30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에 나라고 인식했던 틀을 깨기 위해 여러 가지를 배우려고 시도를 하게 된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마음이 동하면 실행해 옮겼다. 처음엔 모든 것이 즐겁고 재밌게만 보였으나, 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배움의 길을 언제나 중간에 지루해지기 마련이고, 그것을 견뎌내기 힘들어 다시 뱃머리를 돌려 다른 곳을 향해 가곤 했다. 공자님은 30세에 스스로 뜻을 둔 것에 흔들림이 없이 정진하였다고 하는데, 나는 한곳에 정박할 줄 모르고 이곳저것을 옮겨 다니며 뜻을 이리저리 바꾸곤 했다. 나도 나를 모르는 시기.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시기. 뱃머리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정말 내가 안착하여 살아갈 곳을 찾아내려하는 시기였다.
지금의 나, 34세. 이제까지 여러 곳을 들러보는 여행을 통해, 오래도록 머물지는 못하였지만 어떤 세계가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이즈음에 그 경험들을 종합해본 결과, 내가 오래도록 머물러야 할 곳에 대한 구체적이 이미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전에 막연한 행복에 대한 기대였다면, 이젠 구체적인 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가 그려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공부의 초점이 나를 향해 맞춰진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시선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나만을 위한 공부는 삶의 목표가 될 수도 만족을 할 수도 없었다. 나의 학문은 공자가 말한 仁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적 삶에 초첨을 맞추어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을 아울러 보면, 교사라는 직업을 갖은 것이나 내가 경험하고 경험하고 싶던 모든 것들이 내가 나누며 함께 살아하는 삶을 실천하기 위한 바탕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이제 남은 30대의 나는 형식과 내용의 조화가 이루어진 삶에 대한 모델을 정립하고 그에 맞춰 살아가는 연습을 하는 시기이다. 사회적으로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연구원 생활을 통해 교육관련 책을 쓰는 것 등이 형식이겠고, 이것에 담길 내용은 학생들이 교사들이 살맛나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낭만적인 즐거움의 요소가 가미된 무엇일 것이다.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룬 나의 학문적인 모델이 정립이 되면, 나의 40대는 어떤 외부의 간섭에도 흔들림이 없이, 내가 뜻한 바를 실천하고 확고히 하여 정상을 향해 매진하는 시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의 삶과 교육에 대한 모델이 공동체에 어떻게 적용이 되어 효과를 볼 수 있는 지를 직접 경험하여 그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이룬 학문적 모델이라함은 사람들의 삶속에 자연의 내용을 담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人爲(인위)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교육이라는 틀에 無爲(무위)라는 자연그대로의 내용을 담아내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들이 추구해야할 삶의 모델이며,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근본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바로 내가 삶의 기준으로 삼은 “낭만”의 근간이기도 하다. 공자가 46세 때 노자를 만나 예가 형식에 치우칠 때 그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큰 덕은 텅 빈 것처럼 된다는 말에 동의를 하였다. 이는 정상으로 매진하는 때에도 자신의 길을 수시로 점검하고 수정하여 나아간 겸손한 공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나 또한 내가 정한 삶의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나의 오류를 수시로 점검하고 그것을 겸허하게 수정하여 공자가 도달한 知天命의 단계에 이르는 여행을 하고 싶다.
知天命의 단계에 이른 그 이후의 일은...아직은 모르겠다.
30대 - 꿈꾸기 그리고 교육모델만들기
40대 - 교육모델을 공동체에 직접 적용하여 성과 확인하기
50대 - 감동숲을 조성하여 자연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공간 만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