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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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의만 생기게 해서 회의라는 모양이지.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매번 결론 없이 지루해져만 가는 이런 회의에 넌더리가 난다.’
재미없는 수업에 종치기만을 기다리는 학생처럼 유연은 이번엔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회의가 끝나면 몰래 해장국으로 속을 달랠 참이었다. 그런데 시간은 왜 이리 더디 가는지. 불쑥 불쑥 가슴을 뚫고 나오려는 짜증에, 자신의 아이디어인 양 침 튀어가며 설명하는 김 과장의 면상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내느라 유연은 연신 속호흡을 해대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쩜 저리도 뻔뻔할 수 있을까. 처음에 같이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보자고 꼬셔놓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기획해서 던져주자 마치 자기가 혼자한 양 저렇게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려니 다시 속이 메스꺼웠다. 유연은 배신감에 갈가리 찢긴 마음의 상처를 혼자 달래느라 어젯밤 늦게까지 깡소주를 마셔댔다. 배신을 받아들이는 순간 진정한 인생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그런 기분에 밖에서 술을 마시면 무슨 사고를 칠 지 몰라 일부러 집에 들어가 마신 것이었다. 그런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침에 쓰린 속도 달래지 못하고 부랴부랴 회의에 참석한 길이었다.
발표를 듣는 척 메모를 하는 척하며 다이어리를 넘기던 차에 그 속에서 한 장의 명함을 발견하였다.
라도일 박사.
그 이름 위에는 ‘패러독스경영연구소 소장’라는 직함이 씌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모든 것은 그것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상반된 것을 필요로 한다’라는 문장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술병 때문에 머리까지 지근거리는 통인데다 알쏭달쏭한 글을 보니 더 골치가 아파왔다. 어떻게 이 명함이 여기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웬만한 명함은 부서를 옮기면서 정리하였는데 유연이 자주 사용하는 이 다이어리에 꽂혀 있는 것을 보면 사연이 깊은 명함임에 틀림이 없었다. 지근거리는 머리를 달래가며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연은 얼굴을 찡그렸다. 몇 달 전 아픈 기억과 만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