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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9일 08시 52분 등록
   로고.jpg   심스홈 이야기 3



 ‘봄날의 발견, 나의 집 그리기’


봄엔 집들도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봄에 나의 집을 찾아오는 이들은 딱 두 분류이다. 집 꾸미기에 관심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아니면 이사를 앞두고 집 꾸미기를 급하게 해치우려는 귀차니스트들.^^


몇 년 전 어느 봄날, 나의 집도 새 옷으로 막 갈아입은 참이었다. 한참 정리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열어주는 문 사이로 꼬마 아이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핑크빛 옷차림을 한 꼬마 아가씨, 그런데 으..  꼬마가 손에 들고 있는 빨대 꽂은 바나나맛 우유에 나의 시선이 확 꽂혔다.


아, 소파.. 흰색 옷 입혀서 방금 데려 왔는데.. 저게 쏟아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아, 엄마 뭐야.. 예의도 없으시구.. 뭐라 할 수도 없고 참.. 꼬마 아가씨, 제발 얌전히 있어 주기를..


“얘 방을 꾸미려고 하는데요. 내년에 학교도 들어가고 해서 벽지도 좀 바꾸고, 커튼도 새로 맞춰야 할 것 같아서요.”

“아, 예.. 생각하고 계신 게 있나요? 가구는요? 새로 구입하실 예정..이.. 세.. ... ”


사실 상담은 뒷전이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꼬마 아이의 돌출 행동과 노란색 찐득한 불투명 액체에 나의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수빈아, 이리 와봐. 스케치북 보여 드려야지.”

“(엥? 뭐지?) ”

“이거, 얘가 그린 자기 방 그림인데요. 유치원에서 그린 건데, 이렇게 해 달라네요. 호호..”


스케치북을 펼쳤는데.. 공주풍 화이트 침대와, 벽지에는 알듯말듯한 보랏빛 도트 문양 비슷한 것이 그려져 있고, 게다가 침대 위 벽면에는 그림 액자까지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온통 핑크빛으로 도배한 평면 그림 한 장에 꼬마 아이 손에 쥐어져 있던 바나나 우유의 위태함은 이미 내게 사라지고 없었다.


자신의 살림살이를 크레파스로 빈틈없이 칠해 놓은 아이의 꼼꼼함과 그 정성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멋진 공간을 표현한 안목 있는 꼬마 손님에게 나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좋은 상담은 보기 좋게 정리해 놓은 사진과 뻔한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멋져요. 수빈이가 어떤 방을 원하는지 알겠어요. 수빈이 커서 화가나 디자이너 돼도 좋겠다.“

“그렇게 까지나요. 호호호.. ”


엄마 옆에 바짝 붙어 수줍어하는 핑크 공주와 칭찬에 무척이나 쑥쓰러워하는 엄마, 두 모녀의 모습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보통 아이 방은 엄마의 취향 따라가는 게 일반적인데, 엄마가 알아서 하기 마련인데, 아이의 취향과 의견을 존중하는 엄마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혹시라도 내 집을 더럽히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던 나의 얄팍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집주인의 당연한 배려조차 잊은 채 손님의 예의만을 탓하던 나의 예의없음에 깊이 반성한 하루였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집 그림 그리기에 들어갔던 것 같다. 뭐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다. 전체 평면도를 공간별로 나누고, 가구를 배치하는 정도의 간단한 스케치이다.


미색 A4용지를 펼쳐 놓고 ‘한번 그려 보세요’ 하면 대부분은 ‘못 그려요’ 하면서 쑥쓰러워 한다. ‘그림 솜씨를 보려는 게 아니구요. 집주인이니까 저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집 내부의 가구 배치, 텔레비전 위치, 수납공간 등 뭐 그런거요.’ 그러면 조금 그려보다가 또 ‘아, 그리기가 만만치 않네요.’ 한다. 같이 그려보자며 내 손으로 옮겨와 그리다 슬쩍 펜을 넘겨주면 소파의 형태며, 그림 걸리는 위치며, 바꿀 조명의 모양까지, 공간별로 꽤 구체적인 그림이 된다.


이렇게 나의 집을 그려보면, 좋은 점이 여러 가지 있다.


첫째, 그리면 바로 보인다. 나는 스크랩한 사진, 자료, 샘플 등도 활용하지만 내가 간단한 스케치로 '이렇게 될 거다'라고 하나의 그림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면 손님이 훨씬 빨리 이해한다. 집주인이 서툰 솜씨라도 뭔가를 그려주면 전문가는 훨씬 더 가깝게 짐작할 수 있다. 열 마디 말보다 한 장의 그림이 백번 낫다.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집주인의 마음 속 깊은 데까지 알아차리기란 정말 쉽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같이 그리다 보면 아이디어와 힌트들이 풍성하게 떠오른다. 간단한 그림을 사이에 놓고 ‘이건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 저건 저렇게 하면 더 좋겠다.’ 낙서하듯 끄적이며 함께 얘기하다 보면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더 많은 아이디어를 이끌어낼 수 있다.


셋째, 그릴수록 주문은 더 구체적이 된다. 점점 더 섬세하게 안을 조정할 수 있게 된다. 또 공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예상되는 문제들을 점검해 보는 계기도 되고, 이는 곧 집 꾸미기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려 가면 전문가에게 안목 있는 고객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

‘솜씨 좋은 목수보다 안목 있는 고객이 백번 낫다.’

업자들끼리 하는 우스게 소리로, 무색무취의 고객을 만날 때면 종종 하는 말이다.


자기 집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집에 대한 집주인의 관심과 애정만큼 전문가를 긴장하게 하는 것은 없다. 집주인의 애착만큼 전문가를 성실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집주인의 노력만큼 덤탱이를 쓸 확률은 줄어든다.  


집 단장을 위해 가구를 사러갈 예정이라면 자기집 평면도 정도는 그려서 가기를 부탁한다. 인테리어 업체를 방문할 계획이라면 디지털 카메라로(휴대폰 사진도 좋다) 집 안 구석구석을 촬영하고, 각 공간별 대강의 사이즈 정도는 미리 체크해 가는 것이 좋다. 전문가가 이것저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권하는 앞에서 바가지 쓸 위험도 막을 수 있고, 내 돈 쓰러 가면서 귀차니스트 취급을 받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 눈에 반한, 나의 월급과 맞먹는 가구를 보고 미친 듯 몰려오는 물욕 앞에서 내가 그린 그림을 들여다보면 잠시 잃었던 이성을 되찾을 수도 있다. 나의 지갑 속사정을 고려하여 똑 부러지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봄은 집을 청소하기에도, 집을 꾸미기에도, 집을 그리기에도 참 좋은 계절이다.

좁아터진 집구석, 보기만 해도 답답하다고 구박하지만 말고,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은 구조, 비슷비슷한 아파트에 산다고 지레 포기하지도 말고, 지금의 자기 집을 그려보았으면 좋겠다. 다 아는 것 같은 나의 집도 실제 손으로 그려보면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쓸모없다고 버려두었던 공간이 새롭게 보일 수 있고, 숨은 공간을 찾아낼 수도 있다. 요모조모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할까 궁리도 하게 되고, 집에 대한 정도 더 들게 된다.


아직 멀었다고 미뤄두지만 말고, 꿈꾸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도 말고, 미래의 자기 집을 한번 그려봤으면 좋겠다. 상상의 나래 펼치며 손을 써서 그리다 보면 나의 꿈이, 우리 가족의 꿈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 꿈에 살고 싶은 마음은 더 간절해지고, 언젠가 살게 될 자신의 집을 설계해 볼 수도 있고, 꿈에 더 구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모든 집은 다 다르다. 집주인의 관심과 애정에 따라, 집주인의 삶의 모습이 그 집에 어떻게 녹아 들어가느냐에 따라 정말 다 다르다. 혼자서 그려도 좋고, 아이와 같이, 가족과 함께 그려보면 더욱 좋겠다. 모두가 각자 멋진 집을 그려보길 기대한다.


그 봄날 그 꼬마 손님은 한 장의 그림만으로도 나의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 주었다.

일상을 통해 소소한 것들이 주는 자극은 나의 발견이 되어 준다.


IP *.40.2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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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5.20 00:31:12 *.67.223.107
확아 오랫만이다.
향이 보다 확이가 좋아?  확확 그려내려고 ?
이제 곧 방학하면 좀 더 자주 보게되는 거이지? 
확이의 불타오르는  글들을....., 기다려여..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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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2 09:12:14 *.40.227.17
좌샘~ ^^

그져그져.. 무쟈게 오랜만이져..
그동안 잘 지내셨나여.. ^^

근데여.. 좌샘.. 변신? 둔갑?을 넘 마이 하셔서.. 좀 아니, 마이 헸갈려여..ㅇㅎㅎㅎ
사실은.. 무쟈게 재밌어여.. 구여우세여.. ^^

글구.. 정현언니야는 공감이가 좋다 하구여.. 뽕공언니야는 향이가 좋다네여..
전.. 불확.. 딱 2자.. 받침이 똑 떨어지는 거이가.. 어감도 조쿠.. 가장 땡겨서여.. 헤헤^^
편하신대루.. 불러주세여..^^ 전.. 다 좋아여.. ^^ 

글구.. 좌샘.. 말씀드리고잡은 거이가 하나 있는데여.. 바루 헤헤..
쪼께.. 틀리셨는데여?..  ^^  <--- 이거이가 빠졌어여.. 헤헤^^

네~, 자주 뵈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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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0.05.20 08:18:54 *.45.35.54
헤향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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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2 09:16:49 *.40.227.17
백산 오라버니~ ^^

땅큐~ 드려여..^^

거그서는.. 어떤 집에서.. 지내고 계신가여.. 궁금?공금?
그려서.. 담 글에 올려주세여.. (아, 얘가 내헌테두.. 하구 계시져.. ㅎ)
저는.. 이 말씀을.. 드리고잡았어여.. 헤헤^^

잘 지내고 계신 거이 같아.. 저두.. 마음이 좋아여..
오라버니~, 뵙는 그날까지.. 화이팅! 이에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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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5 07:23:48 *.106.7.10
곧 이사를 해야하는 처지로 특히 열심히 불확님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
욕심만 많고 실제로는 귀차니즘을 신봉했던 사람으로,
특히 이 영역은 내가 잘 몰라서...
막연한 생각만 많았는데, 
요즘은 맘에 드는 사진 컷이 있으면 얼른 찍어서 다시 보게 된답니다. ^^ 
계속이어질 좋은 글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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