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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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반 아이들
죽돌이
회사를 그만 두니 난감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제일 난감한 것은 갈 때가 없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갈 때가 있어야 하는데, 처음 일주일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다. 정말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왜 회사를 그만뒀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빽과 열에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떠났다. 빽과 열은 나에게 묻지 않았다. 아니지 이넘들에게 물을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사라졌으니 친구들의 배신감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처음엔 황당했겠지만 어쨌든 배신은 배신이다. 정아도 이 쯤되면 내가 회사를 그만 뒀다는 것을 알지도 모른다.
한동안 아무말씀 없으셨던 어머니가 일주일이 지나면서 입을 여셨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던겨. 왜 맨날 집에만 있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왜 회사를 그만뒀는지 나도 잘 모르기도 했지만 아직 아무와도 말하기 싫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밥 차려놨으니까 먹고 자. 배고프면 잠도 못 자잔냐......”
끝까지 아무 말 하지 않는 아들 녀석이 답답했는지 어머니는 잠시 잠간 자리를 뜨지 않으셨다. 그러시고는 한숨을 깊게 내 쉬셨다.
“엄마 일 나간다.”
백수다. ‘아! 이런게 백수구나’
앞집 꼬마애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하는 시간은 일정했다. 아침 여덟시다. 엄마가 일 나가는 시간은 정확히 여섯시 삼십분으로 한 시간 삼십분 정도 뒹굴면 슬슬 배가 고파온다. 밥상위의 밥과 반찬은 이미 온기와 찬기를 잃었다. 밥이나 반찬이나 비슷하다. 가스랜지 위에 있는 된장 뚝배기는 데우지 않아도 그냥 먹을 만하다. 급할게 없는데 밥 먹는 속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오전 아홉시 삼십분 동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한바탕 소나기가 훝고 지난 간 자리에 남은 모래알 처럼 주위엔 아무도 없다. 이 시간엔 개도 조용하다. 적막 가득한 골목길을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제법 걸어야 하는데도 보이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들도 백수쯤 되는 것은 아닌지. 정류장을 지나 조금 돌아가면 만화방이 있다. 학교 다닐 때 매일 들르다시피 했었는데 취업 나가면서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아저씨 아줌마는 잘 계시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집을 나와 갈 때를 찾아야 했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이십분 정도 지났을 테니 아직 열시도 못됐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만화방 입구는 녹색 셔터로 굳게 닫쳐있었다. 아직 출근 전인가 보다.
‘하긴 길거리에 사람들이 이렇게도 없으니 만화방이 장사가 될 리 없겠지.’
입구에 기대어 담배를 빼 물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누가 보는 것 같아서 주위는 보지도 못하고 땅 만 보고 걸었다. 담배연기에 가렸다 펼쳐지는 파란 하늘이 보였다. 담배 연기로 도넛을 만들어 그곳에 보냈다. 필터 끝까지 피웠으니 이제 오 분만 더 있으면 열시다. 다시 한 대 더 물었다.
‘오 분만 더 있어보자.’ 만약 그때까지 문이 열리지 않으면 쪽팔려서 여기 더 있을 수 없다. 어쨌든 백수티를 내지 않으려면 걸어야 한다.
하늘을 바라보던 눈을 잠시 땅으로 돌렸다. 깜짝 놀랐다. 잠자리에서 그대로 입고 나온 추리닝은 누가 봐도 확실한 백수 복장이다. 더군다나 머리감기 귀찮아 세수하며 대충 적셨던 풀린 물스 머리는 군데군데 떡저있는게 분명하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넘겨보니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는다. 누가 볼까 무섭다. 와 쪽팔리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야겠단 생각을 하며 느긋하게 담배를 껐다.
“어! 이게 누구야.”
젠장 들켰다. 집나오기 전 거울을 봤어야 하는건데.
“안녕하세요. 형님.”
난감했다. 뭐라며 인사를 해야 하나 생각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럴 땐 그냥 웃으며 빤히 바라보는게 제일이다.
“야. 홍! 그동안 뭐하며 지낸거야. 얌마 난 니가 이사갔는 줄 알았어. 너 우리집 최장수 단골이잖아. 너 학교 다닌 날 보다 우리 집에 들른 날이 더 많잖아.”
“애이 형님은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남들이 들으면 진짠 줄 알아요.”
이럴 땐 말 많은 형이 좋다.
“그래 그동안 뭐하며 지낸거야. 그 좋아하는 만화 볼 시간도 없었다는 거잖아. 얘기 좀 해봐. 거의 일 년 만이잖아.”
“누나 잘 있죠.”
난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형이 알고 싶어하는 그 일 년이 지금 내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년이다.
“어어.. 그럼 잘 있지. 안 그래도 니 형수가 무척 궁금해했다. 뭔 사고라도 난건 아닌지하면서 얼마나 걱정했다고. 그나저나 니 누나가 너 보면 정말 좋아하겠다.”
만화가게 형 이름은 장선수다. 내가 중학교 삼학년 때부터 이집 단골이 되었으니까 벌써 5년째다. 형은 원래 행정고시를 준비했던 고시생이라고 했다. K대 행정대학원을 나와 고시 시험을 몇 번 봤는데 번 번히 쓴잔을 마셔야 했단다. 그러던 와중에 어떻게 저런 이쁜 누나를 만나 결혼까지 했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암튼 여자 꼬시는데 선수인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