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산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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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퇴근길에서 생긴 일이다. 콩나물 시루같이 사람들이 꽉 찬 만원 지하철을 타게 되었는데 얼떨결에 경로석 앞에 서게 되었다. 경로석에는 50대로 보이는 남녀와 60대의 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60대의 또 다른 남자가 탑승하면서 사단이 발생했다. 가만히 앉아 있던 60대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어. 나이 먹은 사람한테 자리를 양보하지를 않아.” 아마도 경로석에 앉아 있는 50대 남녀에게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 같았다. 50대 여자는 듣는 둥 마는 둥 모른 체 했고 마침내 참지 못한 50대 남자가 일어났는데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 “아니, 다리 없는 것도 서러운데 저 다리 없으니까 앉아 있으면 안돼요? 꼭 이렇게 말해야 합니까?” 자리에 앉은 60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이 벌개졌다. 나이 든 것이 무슨 큰 벼슬이나 한 것처럼 자기가 다 옳고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모습에 씁쓸했다. 나이 드신 분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수록 경직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찰스 다윈의 이론인 ‘적자생존’은 ‘환경에 잘 적응하는 생물이 살아남는다’라는 현실 적응력을 높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난 변화에 대한 글을 읽을 때면 늘 등장하는 이 말이 불편했다. 변화의 원인은 외부에 있다는 대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예근성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경험해본 사람은 안다. 외부에 의한 어쩔 수 없는 변화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롭다. 변화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다. 자율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사람의 특성은 대부분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자기 성찰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해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교정시키는 데서 찾는다. “야, 너희들 뭐 하는 거야? 그 따위밖에 일 못해? 내가 왕년에…... 에휴, 아니다, 내가 할게 그거 갖고 와.”
일반적으로 직장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개미 직장인을 선호한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약 20년을 밤낮 없이 일했다. 늘 조급한 마음과 강박관념에 긴장된 나날을 보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결국 에너지가 고갈되어 만성피로 증상을 보여 입원하게 되었고 아내와는 이혼의 후유증을 겪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분이 워크 홀릭에 빠져 있던 이유는 가족과의 불화를 회피하는 데 있었다.
위 세 가지 이야기는 생물학적, 사회적, 가정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거나 회피하고 외적 변화에 살아남기 위한 우리 사회의 쓸쓸한 단편이다. 나는 이런 모습의 원인을 자기 성찰의 부재에서 찾는다. 성찰을 안 하는 사람은 자기반성이 없다. 그래서 고민 없이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엄청 강력하다. 근본 원인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중시한다. 한줌의 성찰도 없는 것은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성찰은 자신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힘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아픈 상처나 감춰진 욕망을 드러내는 자기 고백이 감정의 정화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통찰력을 갖게 된다.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지능은 언어, 논리수학, 인간친화, 자기성찰, 공간, 음악, 신체운동, 자연지능의 8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하는데 난 그 중에서 ‘자기성찰’ 지능이 있는 걸 보면서 약간 의아해한 적이 있었다. 자기성찰이란 지능이라기 보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해야 하는 행위’같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살다 보니 성찰하지 않은 사람을 너무 많이 보게 되어 그것이 특정인에게만 주어지는 재능이라는 데 동의하게 된다. 그렇지만 성찰은 삶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태도다. 지금은 부족할 수 있지만 채워갈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이란 관조적인 삶이라고 말했다. 관조적이라는 말은 자기를 성찰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좋은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며 사는 삶이다. 성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 관계의 바탕 위에서 성찰이 일어날 수 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홀로 고립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없다. 관계라는 빛에 비추어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자신을 역할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남편과 아빠, 상사, 친구 등의 사회적 역할을 자신의 전부라고 간주하지 말자. 가면을 벗고 본래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자.
둘째,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바라보자. 자아도취적인 관점이 아니라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내가 이 책의 저자라면,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나는 어떨까라는 시각으로 일상을 대하자.
셋째, 인문학을 자주 접하자.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책을 거의 읽지 않거나 아니면 영어서적이나 리더십, 자기계발서 등만 읽는다. 삭막하다. 우리 삶과 관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시, 수필, 소설 등을 읽어보자.
스스로 성찰을 통해 자신의 문제에 대해 각성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충분히 빛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면 나는 마음이 푸근해진다. 오늘은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사나이의 부끄러움이 유난히 그리운 날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