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 조회 수 3023
- 댓글 수 15
- 추천 수 0
‘콘치타, 너의 죽음이 나의 일생이 되었구나. 평생을 그린 너의 초상화를 받아 주련.’
지중해의 4월은 여전히 푸르구나. 하늘과 바다는 본래 하나였지. 태양의 신이 하늘을 향해 편애(偏愛)의 손수건을 날리기 전까지는. 묵직한 공기 덩어리 너머로 시신경을 자극하는 푸른빛의 비밀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마티스, 블루에 대한 자네의 짝사랑이 조금만 덜했더라도 마티스 블루란 명칭은 존재하지 않았을거야. 자네의 블루는 너무 순진무구해. 영원을 꿈꾸는 건 좋지만 목마른 입술을 채울 뜨거움이 없다는 건 참 심심한 일이지.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면 ‘욕망’이라는 재료를 살짝 첨가했을거야. 블루가 욕망의 빛을 띨 때 얼마나 섹시한지는 자네가 누구보다 잘 알거야. 분노의 황소라는 영화에서 힌트를 얻어 ‘Raging Blue‘라는 이름까지 만들어 놨지.
하여간 그림에 관한 한 나를 앞서간 인간을 보지 못했는데 자네는 좀 특별했어. 신은 기린과 코끼리와 고양이를 발명했고 나는 기린과 코끼리와 고양이의 이미지를 재구성했는데, 자네는 새파란 색종이를 대충 이리저리 오려낸 후 기린과 코끼리와 고양이가 춤춘다고 우겨댔으니 말야. 존재가 있기 전에 색이 있었다? 자네의 그런 투가 내겐 충격이었지. 외통수에 걸린 느낌이랄까. 나만큼이나 전통을 무시하는 태도는 미술계에 충격을 주었지. 명암과 데생은 물론 입체감, 공간적 깊이, 정교한 붓질 등 전통 미술이 추구한 미적 가치를 한 순간에 허무는 행위는 평론가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야만적이라는 비판을 받을만 했어. 얼굴에 초록색, 파란색을 덕지덕지(미안! 평론가들의 표현을 옮기다 보니) 바르는 건 뭐 하자는 시츄에이션이야-자네의 그림을 처음 접한 평론가들의 얼굴이 지금도 선하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감정을 묘사하기 위함이며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가 색채’라는 자네의 생각에 나는 시쳇말로 뻑이 가고 말았네. 사람의 얼굴 또한 감정을 표현하는 도화지에 불과하다니. 그 충격에서 회복되는 과정에서 자네의 잔영이 좀 배어나온 걸 가지고 도둑 운운한 건 지금 생각해도 섭섭해. 자네도 내 그림을 흉내내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겠지. 그럼에도 점잖은 외모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혁명적 기운을 나는 사랑했네. 우리는 닮은 데가 있어.
사람들이 심심풀이 땅콩으로 자네와 나를 비교하기 좋아한다는 걸 알아. 그런데 교수 풍모의 자네에 비해 나는 상대적으로 악역을 맡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의 행로를 충실히 따라온 나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란 걸 이해는 하지만서두. 많은 여자를 사랑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牛頭人身의 괴물 미노타우루스에 비유하는 건 한국에서 ‘하체 튼실’만으로 마당쇠를 떠올리는 것처럼 유치한 발상이 아닌감. 나를 열정과 재능은 되지만 머리는 좀 떨어지는 예술가로 보는 시각은 공감하기 어렵네. 나는 이미 십대 초반에 조숙한 천재란 버려야 할 유산임을 깨달았어. 그 이후의 성공은 오로지 그림에 대한 남다른 집중과 고뇌에서 나온 성과물이지. 나의 스승이자 자네의 스승인 세잔 사부에게서 배운 게 바로 그거야. 내 앞에 있는 사물을 한눈 팔지 않고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내 그림에 등장하는 미노타우루스는 바람처럼 방랑하고 변신하는 원시적인 에너지를 상징하는거야. 내 마음속의 소용돌이를 형상화하면 아마 그런 모습일테지. 올빼미도 내가 좋아하는 동물이지. 녀석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고 있자면 형용하기 어려운 열정에 사로잡힌 나를 보는 것 같단 말이야.
자네의 말 중에 ‘정확성이 진실은 아니다’는 명제는 심금을 울리는 말이었어. 화가라면 심상에 비친 장미를 그려야 하지. 매일 똑 같은 장미를 그리는 건 창조자의 자세가 아니야. 나 또한 신의 반열에서 모든 미술 장르에 도전하고자 했고 그렇게 했지. 내가 남긴 작품이 5만 점 정도라고 하는데 내겐 젊음을 사르며 맞바꾼 자식들이야. 어떤 이는 "남성 예술가는 효과적이고 우수한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여성의 힘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브레통이란 작자의 말로 내 에너지의 근원을 설명하는데......사실 나 그렇게 마초 아니거든. 차라리 아름다움을 쫓는 제우스로 나를 여겨줬으면 좋겠어.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화가의 잠자리채에 때로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걸려든 거지.
떠날 때가 왔나보군. 크레용을 쥔 손에 힘이 빠지고 있어. 화가로서 예술가로서 나의 일생은 성공적이었어. 한 점 후회 없는 삶이었지. 하지만 나의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구만. 내가 열렬히 사랑했고 사랑하는 여인들, 육신의 자식들에게 나는 좋은 가족은 아니었네. 결과적으로 그들의 생의 에너지가 나의 팔레트가 되었네. 화폭 안에서는 전지전능한 神의 반열에 올랐지만, 관계에서는 침몰하는 배였을지 모르겠네.
마음이 아프구만. 하지만 돌이키고 싶지는 않네. 예술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네. 붓을 통해서 완벽을 추구할 뿐이지. 신이 예술가의 숙명을 연민으로 안아 주실 것으로 믿네. 생활인으로서 나에 대한 평가는 겸허하게 받아들일 것이네. 불 같은 생의 이면에 도사린 죽음이 늘 두려웠지만 이제는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네. 예술가는 작품으로 기억되는 것이니까. 곧 봄새.
보이지 않는 화폭 너머로 늘 오라버니를 지켜보던 콘치타
이 생의 기억을 안고 이제 너에게로 간다
※ 이 글은 피카소가 생애 마지막 날, 먼저 간 동료이자 라이벌 마티스와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꾸며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