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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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1. 슬기로운 교사의 길?
<세계적으로 교과 과정이 비슷해져 가고, 교육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도 거의 유사하다(”세계일류수준“, ”학제적 교육과정“, ”지식경제“ 등). 그럼에도 나는 현재의 공교육이 미래에 예견되는 세계-처칠이 말한 ‘마음의 제국’-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학생들에게 여전히 과거 세계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미래 마인드」, 하워드 가드너
나는 항상 내가 추구해야할 최고의 가치를 “자유”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의식,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 많은 부분 억압 받았던 것에 대한 보상심리일 것이다. 집에서 4명의 형제 중 첫째였던 나는 맏언니로서 모범을 보여야했기에 해서는 안 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그런 것을 당연하다 여겼다. 학교에서도 학생으로 지켜야할 규범이 많았는데, 주로 수동적이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그런 규범들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오히려 엄마나 선생님의 적극적인 관리를 받고 싶어 했고 내가 나의 의지대로 뭔가를 하는 것이 항상 두려웠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 월드컵경기 한일전을 학교에서 시청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을 허락해달라는 안건으로 수업거부를 했던 적이 있다. 그 시절 학생의 입장에서 학교에서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하면 한일전으로 보고 점심시간을 줄이고 더 늦게까지 수업을 하면 충분히 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교의 높으신 분들에게는 어림없는 소리였다. 당시 기억에 절반이 넘는 선생님들은 우리를 응원해주고 더운데 수고한다고 물을 떠다주었던 것이 떠오른다. 그 안건이 완전히 묵살되자 우리는 운동장으로 나갔고 더불어 우리가 목소리 내고 싶던 다른 문제들 두발자유,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운동장 사용(수업이외에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것은 학생들을 피곤하게 하여 학습능력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에서 나온 방침이었다.) 등을 요구했다. 그러한 우리의 요구는 전혀 반영되지 않고 회장과 부회장에게 선동을 했다며 책임을 물었다. 그것이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이런 일을 겪어서 일까?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내가 너무나 수동적으로 살아왔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노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그런데 학교는 답답했다. 고등학생의 생각으로 학교는 상식이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 융통성이 없이 꽉 막힌 공간이었다.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타율이 행해지는 겉과 속이 다른 공간이었다. 그런 것을 인지하는 순간, 그 때부터 나는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 나는 여전히 학교에 있다. 이제는 학생의 입장이 아닌 교사의 입장으로 생활한다.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았던 나는 수업을 하고 학생들과 노는 것을 여전히 좋아한다. 하지만 학교는 여전히 답답하다. 왜 일까?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달라졌는데, 여전히 틀을 벗어나지 못한 나는 본다. 그 시절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을까. 나는 일부동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생들에게 많은 자유를 허락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큰 기준인 거친 언어와 폭력, 예의 없음 등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허용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나는 편하게 대하는 편이다. 물론 선생님과 학생과의 관계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자기들끼리의 이야기나 자신의 이야기를 나와 함께 나누어 주는 경우가 많다. 나를 스스럼이 없이 대하는 아이들이 고맙고 나는 그런 편안한 관계가 좋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상대적으로 많은 자유가 허락되었던 나와 1년 동안 생활했던 아이들이 다음해에 다른 선생님 반이 되면 문제아가 되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나도 물론 그 아이의 단점을 알고 있지만 그 단점이 그리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몇몇 아이들이 그 단점이 극대화되면서 담임선생님을 힘들게 하는 아이가 된 것이다. 다른 반이 된 아이들이 지금 담임선생님이 아닌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학교 일정을 물어보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했다. 이런 아이들이 다른 선생님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나 그 선생님이나 모두 아이들을 위한다고 하는 교육활동일 텐데, 뭐가 문제일까? 순간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다. 내가 내 가치관으로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사회화의 학습이라는 중요한 점을 가르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여 아이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교육이라는 것은 교사의 가치관에 따라 아이들의 가치관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에 교사의 올바른 가치관 형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올바른 가치관의 기준이라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볼 수밖에 없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내게 한 친구는 ‘내가 학생의 입장으로 생각하면 학생은 너와 같은 스타일의 선생님도 너와 다른 스타일의 선생님도 모두 경험해 보아야 하고 그런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관을 선택하고 형성해 나가게 될 것이야. 네가 아이들이 선택할 부분까지 관여하려는 것은 지나친 관심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했다. 그 친구의 말을 들으니 다양성을 접하게 하는 측면에서 안심이 되기도 한다. 확실하게 인식되는 것은 교사는 보편타당한 기준에 근거한 가치관을 형성하여 교육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명확한 그 보편타당한 기준이 궁금하다.
그나마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배움에 관한 다음 구절을 읽으니 위안이 된다.
“슬기로운 교사는 자기 일을 하고 거기서 멈춘다. 그는 세상이 대부분 자기 통제권 밖에 있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는 것이 배움의 도(道)를 거스르는 짓임을 안다. - 「배움의 도」, 파멜라 메츠 (도덕경 81장을 풀어씀), 자족(自足) 중 ”

내가 생각하는 큰 기준인 거친 언어와 폭력, 예의 없음 등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허용하는 편이다
내가 선수들과 함께 하는 원칙은 2가지 뿐이었습니다
자기 삶을 위한 '훈련'과 관계를 위한 '약속 이행'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보편타당한 기준? => 부처님 팔고를 이해시키는 거 !? ^^
옛날 생각나는 데... 늘 말했었죠
8고[八苦 :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
원증회고(怨憎會苦), 원치 않는 만남 : 제일 강조한 것이지요
애별리고(愛別離苦),원하는 것과의 이별 ; 큰 하나를 얻기위해서 선택과 집중을 가르쳤죠
구부득고(求不得苦), 구을 얻을 수 없는 것 : 이기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지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음성고(五陰盛苦) 육신 감각, 지각 의식, 의지에 집착하는 것즉 훈련과 노력없이 하는 과도한 욕망

연주는 프로페셔널답게 하는구나.. ^^
어떤 엄마가 되어줘야 할까?
갑자기 떠안게 된 역할이 버거웠던지
한때는 밤잠을 설쳐가며 몰입했던 고민거리였다.
근데..그게..
어느 순간 별 고민거리가 안된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니까 특별히 따로 고민할 문제는 아니더란 말이지.. ^^
만약 '어떤' 엄마가 정답인지가 정해져있다면
나는 그런 엄마가 되어줄 수 있을까?
어차피 나는 주어진 '나'로서 엄마 역할을 해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최적의 '나'를 찾아 구현해내면 자연스럽게 최적의 '엄마'도 될 수 있는 거잖아?
아무리 좋은 옷도 나와 맞지 않으면 어색하기 마련이고
아이들에게도 편안한 느낌을 주지 못할테니까..말야.
참..아침부터 말이 넘 긴가? ㅋㅋ
그러니까 요약하면, 자연스러운 '연주'의 모습, 그대로가 가장 좋은 모델이 아닐까 한다는 거지.. ^^
동으로 가까이 가면 서에서는 더 멀어지고
서로 치우치면 동과는 더 떨어져야하고
그렇다고 중간을 지키자니 이도저도 아니게 되고
결국엔 마음 끌리는 대로 가는 것이 정답이 아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