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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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3. 리틀 김구, 예준.
“白日莫虛度, 靑春不再來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 「推句集」中 / 안중근 의사의 명언 / 김예준군의 좌우명
예준이는 2년전 우리반이었다. 중학교 2학년 담임이 처음이라 동료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1학년 때 예준이 담임을 했던 동료는 예준이가 반장이 되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을 해주었다. 새학기에 학급임원 선거를 하는데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 예준이는 반장이 되었다. 예준이는 모든 선생님들의 관심과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반장이기도 했지만 공부도 항상 1등이고 게다가 똑부러지는 일처리에 두 번 손이 가지 않으니 대부분 교과 선생님이 주로 예준이에게만 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예준이에게 지나친 관심이나 기대가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일부러 반장이 하는 일도 상대적으로 한가한 부반장에게 시키고, 잘한다는 칭찬도 의식적으로 자제를 했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라는 것 이외에는 녀석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녀석이 모든 선생님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은 신기했다. 물론 예준이가 뭐든 잘하고 모자른 것이 없다는 생각에 질투를 하는 녀석들도 종종 있지만, 그것은 잠시뿐 반아이들 대부분이 예준이를 좋아했고 잘 따랐다. 무엇때문일까? 참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준이가 우리반에서 가장 공부를 못하는 아이와 정말 재미있게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았다. 그 둘 사이의 대화는 1시간 내내 이어졌는데, 대화란 어떤 공유하는 소재가 있어야 하는데 둘 사이에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참으로 신기했다. 대체로 아이들은 그룹을 형성하기 때문에 자신의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진지하고 즐겁게 오래도록 이야기 나누는 것이 드물다. 둘 사이의 대화는 그 뒤로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녀석은 어느 누구나 허물없이 대하고 대상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친구가 누구이든 그 친구에 맞는 대화의 소재를 찾아서 그에 따른 이야기를 하니 아이들은 그 녀석과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공부에 최선을 다하지만 공부에만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공부를 잘한다고 하는 아이들은 종종 공부에만 최선을 다하고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내가 지켜본 예준이는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아이였다. 공부가 학생의 본분이기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놀고 운동하는 것에도 최선을 다했다. 체육대회 때도 예준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종목에서 항상 최선을 다해 뛰었다.
하지만 내가 녀석에게 가장 후한 점수를 준 것은 교내 음악제 때 일이다. 나도 처음 하는 행사라 많이 부담되고 잘하고 싶은 마음에 음악제이지만 뭔가 튀는 것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댄스공연, 내가 춤을 배워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공연하기로 했다. 남학생이라 처음엔 쑥스럽다고 난리였지만, 내가 직접 춤을 추면서 가르쳐주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잘 따라와 주었다. 그런데 춤을 가르치면서 예준이가 춤추는 것을 보는데 웃음이 나왔다. 녀석은 우리반에서 춤에선 가장 꼴찌, 그야말로 뻣뻣한 통나무, 초절정 몸치였다. 맨앞에 서서 즐거워하며 열심히 따라 추는 데 어쩌면 그리도 안쓰럽게 보이던지, 그제야 녀석에게서 인간미를 느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정도로 안 되면 자기도 쑥스럽고 좌절이 되어서 못하겠다고 할 법도 한데, 예준이는 3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앞에 서서 연습을 했다. 그리고 공연할 즈음이 되었는데 깜짝 놀랐다. 여전히 뻣뻣했지만 모든 동작을 잘 따라하고 있는데 실력이 중간이상이었다. 내가 본 몸치 중에 최고였기에 사실 예준이의 춤실력이 늘 것이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의 성실함이 해낸 것이다. 그렇다. 예준이는 이렇게 자신의 한계에 머물지 않고 주어진 역할에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항상 승승장구하던 예준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아마도 자기 인생에서 큰 실패의 경험을 하게 된다. 예준이는 반에서는 항상 1등 전교에서도 5등 밖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니 당연하게 특수목적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본인도 주변사람들도 했다. 예준이는 인문과목, 특히 영어를 좋아하고 잘해서 외국어고등학교를 목표로 공부를 했다. 아마도 2학년이 되었을 때부터 목표였다. 그래서 외고입시를 위해 아주 유명한 학원도 다녔는데 영어자격시험 성적이 제일 우수해 학원광고에 등장할 정도여서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고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 예준이가 외고 시험에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그것도 가장 자신있던 영어시험 점수의 비중이 높은 1차시험에서 불합격이었다. 예준이가 걱정이 되었다. 이런 실패의 경험이 녀석에게 훌륭한 경험이 될 것인데 이 과정을 슬기롭게 겪고 넘어서길 바랬다. 그래서 예준이에게 함께 모닝페이지를 쓸 것을 권유했고 나의 취지를 잘 이해해주어 함께 하게 되었다. 모닝페이지를 함께 하면서 1주일에 한 번씩 만나 책에 나오는 ‘해야 할 일’도 함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신의 창조성을 가로 막는 것이 무엇이 있나하는 질문에 첫 번째는 부모님과 동생이 집안팎의 행동이 다르다고 하는 것, 둘째는 친구들이 장난으로 외고에 떨어졌다고 놀리는 것에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예준이는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항상 반듯한 아이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예준이에게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느끼면서 살아가길 바란다고, 세상의 시선보다 자신의 시선에 당당한,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백범일지>를 읽는 데 너무나 당연하게 예준이가 떠올랐다. 녀석이 존경하는 인물은 부모님, 창조주, 선생님, 애국자와 독립운동가이고 그중에 백범 김구를 가장 닮고 싶다고 했다. 예준이의 꿈은 통일문제 관련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백범의 인간됨과 그의 행적과 사상을 만나는 내내 예준이가 백범을 닮고 싶어 했던 마음이 이런 것이었겠구나 생각하며 깊이 공감했다. 나도 어느새 예준이처럼 백범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문득 예준이라면 우리나라의 21세기 김구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 예준이는 그 실패의 경험이 성공의 에너지로 쓰인 것같아요. 외고엔 떨어졌지만 나중에 거창고등학교에 합격해서 지금 다니고 있어요. 거창고에서의 생활에 대한 기대감에 부푼 녀석의 밝은 얼굴빛이 아직도 기억나는 것을 보면 잘 생활하고 있겠죠 ㅎㅎ
제가 만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이런 기회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안타깝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