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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6일 22시 27분 등록

칼럼 13. 리틀 김구, 예준.

“白日莫虛度, 靑春不再來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 「推句集」中 / 안중근 의사의 명언 / 김예준군의 좌우명

예준이는 2년전 우리반이었다. 중학교 2학년 담임이 처음이라 동료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1학년 때 예준이 담임을 했던 동료는 예준이가 반장이 되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을 해주었다. 새학기에 학급임원 선거를 하는데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 예준이는 반장이 되었다. 예준이는 모든 선생님들의 관심과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반장이기도 했지만 공부도 항상 1등이고 게다가 똑부러지는 일처리에 두 번 손이 가지 않으니 대부분 교과 선생님이 주로 예준이에게만 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예준이에게 지나친 관심이나 기대가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일부러 반장이 하는 일도 상대적으로 한가한 부반장에게 시키고, 잘한다는 칭찬도 의식적으로 자제를 했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라는 것 이외에는 녀석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녀석이 모든 선생님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은 신기했다. 물론 예준이가 뭐든 잘하고 모자른 것이 없다는 생각에 질투를 하는 녀석들도 종종 있지만, 그것은 잠시뿐 반아이들 대부분이 예준이를 좋아했고 잘 따랐다. 무엇때문일까? 참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준이가 우리반에서 가장 공부를 못하는 아이와 정말 재미있게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았다. 그 둘 사이의 대화는 1시간 내내 이어졌는데, 대화란 어떤 공유하는 소재가 있어야 하는데 둘 사이에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참으로 신기했다. 대체로 아이들은 그룹을 형성하기 때문에 자신의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진지하고 즐겁게 오래도록 이야기 나누는 것이 드물다. 둘 사이의 대화는 그 뒤로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녀석은 어느 누구나 허물없이 대하고 대상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친구가 누구이든 그 친구에 맞는 대화의 소재를 찾아서 그에 따른 이야기를 하니 아이들은 그 녀석과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공부에 최선을 다하지만 공부에만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공부를 잘한다고 하는 아이들은 종종 공부에만 최선을 다하고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내가 지켜본 예준이는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아이였다. 공부가 학생의 본분이기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놀고 운동하는 것에도 최선을 다했다. 체육대회 때도 예준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종목에서 항상 최선을 다해 뛰었다.

하지만 내가 녀석에게 가장 후한 점수를 준 것은 교내 음악제 때 일이다. 나도 처음 하는 행사라 많이 부담되고 잘하고 싶은 마음에 음악제이지만 뭔가 튀는 것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댄스공연, 내가 춤을 배워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공연하기로 했다. 남학생이라 처음엔 쑥스럽다고 난리였지만, 내가 직접 춤을 추면서 가르쳐주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잘 따라와 주었다. 그런데 춤을 가르치면서 예준이가 춤추는 것을 보는데 웃음이 나왔다. 녀석은 우리반에서 춤에선 가장 꼴찌, 그야말로 뻣뻣한 통나무, 초절정 몸치였다. 맨앞에 서서 즐거워하며 열심히 따라 추는 데 어쩌면 그리도 안쓰럽게 보이던지, 그제야 녀석에게서 인간미를 느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정도로 안 되면 자기도 쑥스럽고 좌절이 되어서 못하겠다고 할 법도 한데, 예준이는 3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앞에 서서 연습을 했다. 그리고 공연할 즈음이 되었는데 깜짝 놀랐다. 여전히 뻣뻣했지만 모든 동작을 잘 따라하고 있는데 실력이 중간이상이었다. 내가 본 몸치 중에 최고였기에 사실 예준이의 춤실력이 늘 것이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의 성실함이 해낸 것이다. 그렇다. 예준이는 이렇게 자신의 한계에 머물지 않고 주어진 역할에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항상 승승장구하던 예준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아마도 자기 인생에서 큰 실패의 경험을 하게 된다. 예준이는 반에서는 항상 1등 전교에서도 5등 밖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니 당연하게 특수목적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본인도 주변사람들도 했다. 예준이는 인문과목, 특히 영어를 좋아하고 잘해서 외국어고등학교를 목표로 공부를 했다. 아마도 2학년이 되었을 때부터 목표였다. 그래서 외고입시를 위해 아주 유명한 학원도 다녔는데 영어자격시험 성적이 제일 우수해 학원광고에 등장할 정도여서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고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 예준이가 외고 시험에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그것도 가장 자신있던 영어시험 점수의 비중이 높은 1차시험에서 불합격이었다. 예준이가 걱정이 되었다. 이런 실패의 경험이 녀석에게 훌륭한 경험이 될 것인데 이 과정을 슬기롭게 겪고 넘어서길 바랬다. 그래서 예준이에게 함께 모닝페이지를 쓸 것을 권유했고 나의 취지를 잘 이해해주어 함께 하게 되었다. 모닝페이지를 함께 하면서 1주일에 한 번씩 만나 책에 나오는 ‘해야 할 일’도 함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신의 창조성을 가로 막는 것이 무엇이 있나하는 질문에 첫 번째는 부모님과 동생이 집안팎의 행동이 다르다고 하는 것, 둘째는 친구들이 장난으로 외고에 떨어졌다고 놀리는 것에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예준이는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항상 반듯한 아이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예준이에게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느끼면서 살아가길 바란다고, 세상의 시선보다 자신의 시선에 당당한,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백범일지>를 읽는 데 너무나 당연하게 예준이가 떠올랐다. 녀석이 존경하는 인물은 부모님, 창조주, 선생님, 애국자와 독립운동가이고 그중에 백범 김구를 가장 닮고 싶다고 했다. 예준이의 꿈은 통일문제 관련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백범의 인간됨과 그의 행적과 사상을 만나는 내내 예준이가 백범을 닮고 싶어 했던 마음이 이런 것이었겠구나 생각하며 깊이 공감했다. 나도 어느새 예준이처럼 백범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문득 예준이라면 우리나라의 21세기 김구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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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06.06 23:09:17 *.34.224.87
좋구나,..연주야...모닝페이지를 통해
아이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참으로 예쁘구나..
지난주엔 가장 늦어서 의아하게 하더니
이번주엔 가장 빨라서 의아하게 하는구나...ㅎㅎㅎ.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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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연주
2010.06.07 20:24:43 *.171.205.225
모닝페이지라는 도구가 저에게는 잘 맞는 것같아요~
아이들과 소통하는 데도 그렇구요~^^ 나중에 오빠의 아이들에게도 시켜보면 좋을듯...저의 노하우를 전수해 드리죠~ㅎㅎ

지난주 포함 2주정도...최대의 고비였죠~ 이제 산 하나는 넘어서 한숨돌리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산도 힘들지만 마음의 산이 더 넘기 힘들더군요~
아..이런 빠른 페이스...계속 유지하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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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2010.06.07 09:29:01 *.236.3.241

고딩 1학년인데 참 멀리 보는 눈을 가진 친구네~~
그럼 쥬니에겐 연주가 고능선 처럼 평생의 스승이
되는건감 ㅎㅎ
사람 농사만큼 흥미진진한 일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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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연주
2010.06.07 20:29:09 *.171.205.225
제가 예준에게 고능선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영광이죠 ㅋㅋ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흔들림없이 말할 수 있는 녀석이 참 부러웠어요~
아이들에게 제가 더 배우고 있죠...녀석들이 제 스승이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사람농사...재미있어요...허나 그 재미를 누리기 위해서 제공해야 하는 것들이 좀 부담이 되기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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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7 11:11:49 *.106.7.10
마음이 자유롭게 키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가장 힘든 것이 바로 그거다.
의젓한 아이들을 보면 한순간 부럽다가도 의젓한 아이였던 나의 과거가 생각나 쓴 웃음 짓기도 하지 ^^;;

때로는 어른들과 주변의 기대가 아이에게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예준이는 의젓한 아이구나. 작은 시련을 이겨내며 마음과 정신까지 의젓한 아이기 되기를 정말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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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연주
2010.06.07 20:33:08 *.171.205.225
녀석에게 모범답안이 세팅되어있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들이 자신도 모른 채 숨막혀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녀석을 믿기로 했답니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충분히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석에게 그런 작은 시련이 좋은 약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아요...녀석은 지금 이순간에 집중하는 아이더라구요...ㅎㅎ 너무 팔이 안으로 굽는 발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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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2010.06.07 11:33:29 *.219.109.113
예준이는 지금 잘 적응하고 있는거니?

아들만 둘을 기른 나로서는 이런 컬럼을 읽으면 걱정이 앞선다.

아이가 시험 하나의 실패로 인생을 다 포기하고 살고 있을까봐 말이야.

그런 아이에게 모닝페이지로 힘과 용기를 끌어내는 연주는 진자 선생님 맞다.

앞으로도 모자른 아이들에게 더 사랑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해주면 좋겠어.

무단히 참고  공을 들이면 동물이나 아이들이나 바뀌기 마련이다.

희망의 전도사같은 선생님이 연주였으면  나 역시 자랑스러울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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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연주
2010.06.07 20:39:41 *.171.205.225
그 시기에 그런 시험을 통해 실패의 경험을 한 아이들이 꽤 있는데, 어떤 아이는 보기 안쓰러운 정도로 실패를 자기 인생 전체의 실패로 받아들이더군요...그런 현상은 간혹 부모가 아이의 실패를 자기 인생의 실패로 받아들이는 경향에 기인하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다행이 예준이는 그 실패의 경험이 성공의 에너지로 쓰인 것같아요. 외고엔 떨어졌지만 나중에 거창고등학교에 합격해서 지금 다니고 있어요. 거창고에서의 생활에 대한 기대감에 부푼 녀석의 밝은 얼굴빛이 아직도 기억나는 것을 보면 잘 생활하고 있겠죠 ㅎㅎ

제가 만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이런 기회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안타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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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0.06.07 14:03:57 *.53.82.120
몇주간 아이들이야기로 이어지는 너의 칼럼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사람들에 관해 이만큼의 깊이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
부끄럽게도 대답은 '아니다' 였다.

아이들을 보는 따사로운 시선과 관심이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너의 글에서
내가 그리도 그리워하던 '사랑넘치는' 스승의 모습을 읽는다.
어깨너머도 그 따스한 시선을 훔쳐 배울 수 있는 나 느끼고 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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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연주
2010.06.07 20:46:46 *.171.205.225
"사랑넘치는 스승의 모습"이라니....너무 과찬이십니다.
저때문에 상처받았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완전 부끄러워요~
온전한 사랑을 나눈다는 것...사람의 일이라...교사도 사람이라...노력은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수양이 필요하죠 ㅎㅎ
예전엔 선생님...스승...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담스러웠죠...너무 진지하게만 생각해서..어깨의 무거운 짐을 진듯...
이제는 그 무게를 좀 내려 놓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그냥 그 상황을 즐기기로 하니 좋더군요.
저는 학교는 놀이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애들하고 노는 것은 재밌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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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06.10 04:29:05 *.123.110.13
전에 이야기했던 아이구나. 외고 시험에 떨어졌어? 음....아쉽기는 하네. 요즘 외고 들어가기가 어렵지. 

보통 어른들처럼 아이들도 편이 갈리지 않아? 어른들이 돈버는 대로, 모인다면 아이들은 등수대로. 

그런데도, 예준이는 허물없이 고루고루 지내는 것을 보면, '된 아이'다. 배려심도 필요할 것 같아. 공부 잘하는 아이가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 다가오면, '잘난척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할텐데. 그런 상대의 걱정마저 가늠하고, 소재를 풀어나가야 하니까...대단한 아이야. 

지난번 모임에서 너의 이야기에 마음이 아팠다. 선생님이 이런 재목에 투입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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