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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스홈 이야기 6
‘홈 드레싱(Home Dressing)의 탄생’
지나고 보니 내가 하는 일, 내가 만나게 되는 인연들은 다 이유가 있었다.
회사에 다닐 때,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직물 박람회인 하임텍스타일(Heimtextil)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또렷하지는 않지만 프랑스의 어느 직물회사 부스벽면에 걸려 있는 예스러운 분위기의 흑백 일러스트 작품 몇 점에 꽂힌 기억이 있다.
해체한 앤틱 의자의 모습, 다양한 각도에서 표현되어 있는 의자의 도면, 수선중인지 아니면 새로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신주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의자를 다루는 장인의 손짓과 몸짓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판화작품이 유독 나의 눈길을 끌었다.
'아, 예술이다.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은 누구일까? 어디에 가면 구할 수 있을까?'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 어느 책에선가 비슷한 그림을 발견하면서 그러한 그림들이 <백과전서>라는 책에 담겨 있는 그림임을 알게 되었다.
<백과전서>, 내가 파리에 가면 꼭 데려오고 싶은 책이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디드로와 달랑베르 등이 과학, 기술, 학술 등 당시의 여러 학문을 집대성하여 편찬한 사전으로 프랑스 역사에서 18세기 정신의 결정체라 불리울 만큼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는 책이다.
이 책에는 가구, 은제품, 세라믹, 보석, 나무, 금속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에 대한 도판이 담겨져 있는데 이 도판들은 정교한 묘사로 이름이 높아 판화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백과전서>의 많은 부분이 당시 작업장 풍경이나 작업 도구, 작업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한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도판에는 장인들이 일하고 있는 아틀리에의 한 장면이 고스란히 들어있기도 하다.
내 직업의 역사도 여기서 발견했다.
건축과 인테리어 작업에 이어 공간의 소프트웨어적인 역할을 하는 커튼이나 침구, 패브릭 소파와 의자, 쿠션 등의 소품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일, 벽지, 바닥재, 조명, 가구, 장식품 등을 조화롭게 데코레이션하여 공간에 새로운 옷을 입히는 작업, 바로 홈 드레싱(Home Dressing)의 역사가 <백과전서> 안에 너무나도 선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전창을 달아 밝은 실내,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살롱에는 고객을 접대할 수 있는 큰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는 고객에게 보여줄 천들이 가득 펼쳐져 있다. 두터운 실크 천이 발라져 있는 사방 벽에는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책장마다 각지에서 실어온 직물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뒤편 작업실에서는 여자 직공들이 한창 커튼 바느질을 하고 있고, 다른 작업장 한켠에서는 남자 직공들이 의자에 들어갈 천을 자르고 씌우는 작업을 하느라 분주하다. 바닥에는 실조각이며 천조각, 천갈이에 쓰다 남은 말총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다.
우아한 옷을 차려입은 이 아틀리에의 주인인 '타피시에(천을 전문으로 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나긋나긋한 태도로 손님을 접대한다.'
17세기 바로크 시대는 타피시에의 전성기였다. 왕권을 태양의 위치에 올려놓은 루이 14세의 방은 천장과 바닥을 빼고는 모조리 천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그와 왕족들이 사용하던 의자는 나무로 된 부분보다 천으로 된 부분이 더 많았고 침대는 아예 나무틀이 보이지 않게 천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시사철마다 온 집안의 천을 바꿔서 분위기에 변화를 주고 한 방에는 한 가지 직물만 써서 통일감을 주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어떤 일관된 콘셉트를 잡아서 집안 전체를 꾸미는 것은 요즘에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바로크 시대,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생겨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가구를 살 때 나무 값 보다 천 값을 더 치던 시대였고, 직물의 무늬가 의자의 모양을 결정할 만큼 직물은 집 안 장식의 중심이었다. 타피시에는 집 안에서 쓰이는 일체의 장식용 직물들, 즉 천을 이용하여 의자를 천갈이 하고 커튼과 침구, 쿠션에 이르는 작은 소품 등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일을 했다.
타피시에한테는 가구를 주문할 수도 있었는데 이미 생각해둔 디자인이 있으면 원하는 대로 직접 주문할 수 있었다. 요즘도 잡지나 책을 보고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직접 목공소나 가구 디자이너에게 의뢰하듯 당시에도 가구 디자인을 구하고 자신의 취향에 따라 맞춤제작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타피시에는 가구 장인이 만든 의자와 직조공이 만든 천을 가장 아름답게 조화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바느질을 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쿠션 안에 말총을 잘 넣는 사람도 아닌 천과 의자틀과 쿠션의 형태를 잘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천갈이와 커튼을 만드는 수공예 기술보다는 미적으로 아름다운 지점을 찾아내 데코레이션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소파부터 테이블과 침대까지 집에 들어갈 모든 가구들을 직물에 맞춰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계절마다 천갈이를 하는 일부터 벽에 바를 직물까지 집 안의 장식을 모두 관장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무엇보다 타피시에가 가장 즐거운 작업으로 손꼽는 것은 개인의 집을 데코레이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정통 타피시에의 본업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어떤 공간보다 집이라는 공간을 꾸밀 때가 가장 보람 있다. 세상에는 어느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듯 다양한 스타일과 여러가지 아이템을 조화롭게 구성하여 그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새로운 맞춤옷으로 갈아입히는 이 일이 나는 좋다. 집이라는 삶의 터전에서 그들의 꿈을 현실화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는 뿌듯함이 있다.
'나의 집, 실크 패브릭은 아니어도 핸드프린팅의 손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오랜 전통의 패브릭 회사 '브런스위그 힐'의 벽지가 한쪽 벽면에 발라져 있고, 자연광을 들이는 전창의 혜택은 누리지 못해도 을지로 조명숍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마음에 들지 않는 핑크색과 보라색 알들을 모조리 걷어내고 나의 취향대로 맞춤 제작한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침대 한 켠에서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다. 발품을 팔다팔다 지쳐 포기할 때쯤 우연히 들른 앤틱숍에서 착한 가격에 건져낸 기필코 대물림하리라 마음먹고 있는 견고한 앤틱 책장에는 패브릭과 침구류, 쿠션 등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백과전서>의 타피시에 아틀리에와 흡사하다.
책장 뒤편에는 미싱을 비롯한 각종 원단과 부자재, 책상과 책장이 자리한 아담한 나의 작업실이 있고, 4인용과 6인용 식탁의 중간 사이즈로 맞춤한 테이블 위에는 책과 잡지, 참고 자료, 여기저기 낙서한 종이들, 샘플책자와 다양한 원단 스와찌들이 쌓여 있다.
그림 속 타피시에처럼 격식을 갖춘 우아한 차림새는 아니지만 나 역시 아침에 출근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앞치마를 두르는 것이다. 줄자, 연필, 지우개 등 그날그날 필요한 자질구레한 도구며 핸드폰, 심지어는 계산기까지 주머니에 담고서 일을 시작한다.'
옛 역사 속 장면을 그대로 불러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은 아니지만 나의 공간도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에 묘사된 타피시에의 아틀리에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무에서 유가 나오는 법은 없다. 당시의 기술과 열정은 기나긴 시간을 통과하여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역자만 들어도 머리에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내게 내 일의 역사만큼은 재미난 이야기로 다가왔다. 역사 이야기만 나오면 뒤로 물러서기 바쁘던 내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역사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 되어주는 동시에 삶의 지혜가 된다는 사실도 기억해냈다.
예전엔 다소 따분하다고 느꼈던 역사를 인정하고 내 직업의 존재에 관련된 장면을 조금이나마 살펴보니 역사를 앎으로 인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음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유에서 또 다른 유가 생긴다.
홈 드레싱의 역사, 내 일의 역사를 탐닉한다는 것이 즐거운 놀이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