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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칼럼을 쓸려고 하다가 개수대에 가득 넘쳐있는 그릇이며 접시들을 보았다.
어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먹거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광경이었다.
잠깐 망설여진다. 글을 쓸것이냐 아니면 마눌님의 수고를 덜어주는 설걷이를 할것이냐.
결정을 내렸다.
퐁퐁을 풀어 수세미로 그릇을 열심히 닦고 흐르는 물에 행군후 가지런히 포개어 놓았다. 덕분에 개운한 느낌이 든다. 역시 노동은 좋은것이여라는 생각이 들다보니 처음 서울에 올라와 자취할 때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14년전 직장관계로 지방에서 등산용 배낭 하나만 달랑 들러매고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어머니로부터 서울은 코베어 가는 동네(?)라는 언질을 사전 받았지만, 아랑곳없이 사람 사는곳이 다 마찬가지지라는 마음으로 거침없이 전철구내로 들어섰다.
p.s : 에피소드 하나
전철을 타기전 앞에 승객들이 하는것처럼 나도 티켓을 구입해 개찰구에 들어서서 표를 넣었다. 그런데 작동이 되질않아 두 번째 표를 구입하여 다시금 집어넣어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뻘개지고 난감한 표정으로 서있자 옆에 서있던 분이 표가 잘못된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럼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정답은 손으로 열림대를 열고 들어가는 것을 모르고, 부끄럽게도 표를 넣으면 그냥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줄 알았던 것이다.
가까운 건대역쪽의 복덩방에서 시세를 알아보고 돈을 탈탈 털어 200만원을 보증금으로 걸고 월 16만원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였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거주하는 곳이 반지하 방이었기에 햇볕이 들지 않는다는 것도 있었지만, 물가 - 당시 지방에서는 오뎅 하나가 100원 이었지만 서울은 500원 가격 이었다 - 며 환경등 모든 것이 생소 하였었다.
그리고 타지에서의 생활이란게 다그렇겠지만 모든 것을 나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고민이 된 것은 빨래꺼리였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 덕분에 겨울철에 빨래를 하기가 쉽지많은 않았던 것이다.
일단은 세탁소에 맡겨야할 큰 옷감들외의 속옷과 와이셔츠 등을 분류하였다.
그리고 빨래할 내용물을 세숫대야에 수돗물을 가득 담고 불리어 놓았다.
다음으로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빨래판에다가 빨래비누로 박박 소리를 내며 전투적으로 빨고 행구었다.
겨울철 찬바람 속에서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며 빨래를 하노라면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겨.’
‘그래도 손이 시리다. 주인집 할머니 보일러에도 투자좀 하시지 아끼시기는....’
‘아이고 추워라.’
행군 빨래를 몇 번을 쥐어짜고 방안 빨래줄에다가 빨래를 넌다.
뜨거운 물에 행구지 않아 솔직히 때가 잘빠지지는 않았지만, 널려져 있는 빨래의 군무가 일렬종대를 향하고 있노라면 왠지모를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래서인지 이같은 빨래가 끝나고나면 CF의 ‘빨래끝’ 이라는 멘트가 자연스럽게 터져나오곤 했다.
더러워져있던 것이 나의 작은 수고로 인해 깨끗해진 것을 보면 속이 다시원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노라면 일상의 작은 노동들의 의미가 살포시 떠올려 진다.
노동은 삶의 거름이요 생존이다.
노동은 인간의 삶을 영위하게 한다.
노동은 삶의 가치를 형성케 해준다.
노동은 또다른 삶의 보람이다.
그리고 작은 노동은 돈도 절약케 만든다.
빨래가 마르면 주인집에서 다림판과 다리미를 빌려 다림질이 시작된다.
세탁소 주인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정성껏 다린 와이셔츠를 입고 회사 출근을 하면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 이런 기분 때문인지 아직도 와이셔츠 다림질은 특별히 바쁘지 않는한, 마눌님에게 맡기기 보다는 내가 직접 다림질을 한다. 서로 맞벌이를 한다는 거창한 명분보다도 이런 작은 수고하나가 마눌님의 시간을 뺏지 않는다는 배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일상의 작은 노동들이 세월의 흐름속에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생활의 질을 높히고 편리함을 추구한다는 장점아래 세탁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등이 인간을 대신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남는 여유의 시간을 과연 어디에다 투자를 하고 있는지는 자문을 해보아야 하지않을까 여겨진다.
이번 주말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마루를 걸레질 하는등 왕년의 솜씨들을 발휘해 보면 어떨까?
문명의 이기들을 한번쯤은 뒤로하고 이마의 땀을 손으로 훔치게 하는 일상의 노동을 시도해 보면 어떨까?
그러고나면 거기서 파생되는 다음과 같은 작은 기쁨들이 함께 공유될 것이다.
삶의 또다른 의미, 가족애, 보람, 나눔, 배려 등등
우리집에는 자취시절 당시 나와 삶의 궤적을 함께 하였던 나무 빨래판이 아직도 자리를 꿰차고 있다. 마눌님이 버릴려는걸 사실은 내가 때를써서 보관해 놓은 것이었다.
이제는 세탁기가 모든 것을 다해주지만 이따끔 나는 나의 양말이며 속옷을 그때의 빨래판을 사용해 빨래를 해본다.
박박 밀다보면 빨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최고여라는 되뇌임속에 어느새 땀이 이마에 맺혀진다. 그리고 숨은 가빠져오고.
마눌님은 이런 나의 행위를 보고 주책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어찌보면 나는 이런 행위를 통해 그때의 추억속으로 그때의 기억속으로 동화되어 뛰어드는 것 같다.
배우 설경구가 자신의 작품에서 ‘나 돌아갈래’라는 독백을 외치는 것은 아니더라도, 나는 이런 행위들을 통해 그때의 힘들었던 자취생활을 잊지 않을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서울에 올라와서 당시의 초심을 되새김질하는 무의식적인 발로의 행위일수도 있고.
여하튼 이런 연유를 차지하고서라도 이같은 일상의 노동은 나에게는 또다른 삶의 넉넉한 여유를 안겨주는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