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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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 가장 인상적인 장면 3가지>
1. 헬레니즘 시대 -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3개 대륙에 걸친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스를 완전 정복한 알렉산더는 6만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의 진격, 즉 동방원정을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와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의 대결이 펼쳐졌어. 결과는 알렉산더 대왕의 대승! 다리우스 3세는 간신히 목숨만 건지도 도망쳤다. 이 무렵 알렉산더에 대적할 만한 군대는 아무래도 지구상에 없었던 것같다. 그의 군대는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소아시아, 페니키아, 시리아, 이집트를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그는 정복한 곳마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다. 페르시아를 멸망시켰으니 동방원정의 목표는 달성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동방의 끝까지 정복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동쪽으로 행진을 계속했다. 기원전 237년 알렉산더왕은 오늘의 이란 전역을 정복했고, 1년 후에는 인도의 인더스강을 건넜어. 그러나 인도 중부 펀자브 지방을 넘으려는 순간 오랜 행군과 전쟁에 시달린 군인들이 저항하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회군하던 도중 알렉산더는 병에 걸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는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은 12년 만에 끝났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동서로 인더스강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남북으로 이집트에서 다뉴브 강까지 3개 대륙에 걸쳐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이 만들어졌다.
오리엔트는 ‘해가 뜨는 곳’이란 뜻으로 서양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다. 서양인들은 오리엔트의 우수한 문화를 매우 부러워했다. 알렉산더 대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오리엔트 문화에 흠뻑 빠져 펠스시아를 정복한 후 각 나라의 모든 문화를 혼합시키기로 결심했다. 알렉산더 자신부터 페르시아 공주와 결혼했고 귀족들도 페르시아 여성들과 결혼하도록 지시했으며 나아가 많은 그리스인들을 오리엔트 지역에 이주시켰다. 결국 동방원정은 단순히 영토만 넓힌 전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전쟁을 통해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져 그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다. 그 문화가 헬레니즘 문화다. 헬레니즘 문화가 인도에 전파돼 새로 만들어진 미술양식도 있단다. 3세기 무렵 탄생한 간다라 미술이 바로 그거야. 이 미술양식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에까지 전달됐다. 그리스문화가 퍼져 헬레니즘이 탄생했다는 서양의 주장이 있지만, 오리엔트 문화가 없었다면 헬레니즘 문화는 탄생할 수 없었다. “헬레니즘 문화 = 그리스 문화+오리엔트문화”라고 해야 진실에 가깝다.
2. 칭기스칸의 시대 - 칭기스칸
칭기스칸은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나갔다. 장차 칭기스칸이 될 소년은 여러 부족이 거칠 것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세계에서 성장했다. 추방당한 가족의 아들로서 초원에 버려져 죽음을 기다려야했었고, 공식교육도 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 칭기스칸은 개를 무서워 했고 잘 울었다. 동생은 그보다 힘도 셌고 활도 잘 쏘았고 씨름도 잘했다. 배다른 형은 그를 부려먹고 괴롭혔다. 그러나 굶주림, 갖은 수모, 납치, 노예 생활이라는 괴로운 환경에서 그는 권력을 향한 긴 계단을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칭기스칸은 해마다 자기보다 권력이 센 사람들을 물리쳐 결국 몽골 초원지대의 모든 부족을 정복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정복자들이 전장에서 물러나는 쉰의 나이에 칭기스 칸의 영기는 그를 고향에서 불러내 수백년 동안 유목 부족을 괴롭히고 노예로 부려온 문명인 군대와 머나먼 땅에서 맞서게 했다. 그는 여생 동안 영기를 따라 고비 사막과 황하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고,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과 페르시아인의 땅을 통과하고, 아프카니스탄 산맥을 넘어 인더스 강까지 이르면서 연거푸 승리를 거두었다.
칭기스칸이 이룬 업적의 규모와 범위는 어떤 수준에서 보든, 어떤 관점에서 보든, 상상의 한계에 도전하며, 아무리 설명에 능한 학자라도 그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칭기스칸의 기병대가 13세기를 가로질러 돌격하자 세계의 경계가 다시 그려졌다. 칭기스칸은 돌이 아니라 나라로 건축을 했다. 칭기스칸의 제국의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태어난 1162년 구세계는 여러 지역문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각각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 외에는 다른 문명을 거의 알지 못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중국과 유럽 사이를 여행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사망한 1227년에 중국과 유럽은 외교나 상업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칭기스칸은 귀족적 특권과 출생에 기초한 봉건제를 부수고 개인의 장점과 충성심, 성취에 기초한 새롭고 독특한 체제를 건설했다. 그는 ‘비단길’ 주변에 고립되어 잇는 굼뜬 교역도시를 점령하여 비단길을 역사상 가장 큰 자유무역지대로 조직해놓았다. 칭기스칸은 전체적으로 세금을 내렸으며. 의사, 교사. 사제, 교육기관에는 완전히 면제해주었다. 정기적으로 통계조사를 했고, 처음으로 국제적인 驛傳제도를 확립했다. 몽골은 부와 보물을 축적하는 제국이 아니었다. 대신 칭기스칸은 전투에서 얻은 물자를 널리 분배하여 다시 상업적 유통망으로 들어가게 했다. 칭기스칸은 국제법을 만들고 ‘영원한 푸른 하늘’의 법을 만민을 다스리는 궁극적인 최고의 법으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통치자가 스스로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 칭기스칸은 통치자도 미천한 목자와 똑같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복당한 모든 신민에게 종교와 관계없이 완전한 충성을 요구했지만, 영토 내에서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 법의 지배를 내세유고 고문을 철폐했지만, 양민을 습격하는 도적떼나 테러리스트 암살자들을 찾아내 죽이기 위한 대규모 원정에는 서슴없이 나섰다. 그는 볼모를 잡아두는 관행을 없애고, 대신 모든 대사와 사절에게 외교적인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관행을 수립했다. 전쟁 중인 적대국가의 사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칭기스칸은 제국을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두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제국은 그 뒤에도 150년 동안 더 팽창해나갔다. 칭기스칸 제국의 자취는 후손들이 통치를 통해 700년 동안 유지되었다.
3. 실학의 시대 -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정약용 등등
조선의 정치 이념으로 채택되어 새로운 사회를 이끌었던 성리학은 100년, 200년이 지나면서 형식화되어 현실 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이러한 때에 이론과 형식에만 치우치는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데 적극적인 실용적이고 실증적인 학문이 등장했다.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난 실학자들은 당시의 집권 세력인 노론에서도 일부 나왔으나, 대부분은 정권에서 오래전에 밀려나 향촌에서 농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생활했던 남인에서 많이 나왔다. 이들은 여러 가지 사회 모순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며 역사학, 지리학, 자연과학, 농학과 같은 다양한 방면에서 연구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실학은 사실에 토대를 두고 진리를 탐구하려 한 ‘실사구시학’으로 실증적인 방법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실생활에 활용하려 한 실천적 학문이다. 또한 실학은 조선의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각종 개혁안을 제시하였으므로 민족적 성격을 지닌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 실학자들은 사회모순을 개혁하고 상공업 육성을 통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근대 지향적 성격을 가진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학자들 중 연암 박지원은 당대 집권세력인 노론 명문가 출신이다. 하지만, 쟁쟁한 배경과 타고난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의기투합하는 벗들과 어울려 청춘을 다 보냈다. 홍대용과 박제가, 이덕무 등 18세기 지성사를 빛낸 스타들이 이른바 ‘연암그룹’의 핵심 멤버였다. 이들은 매일 밤 몰려다니며 ‘지식과 우정의 향연’을 펼쳤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사상사의 축이 바뀐 것도, 古文의 매너리즘을 벗어나 파격적인 문체적 실험을 감행한 것도 다 이 향연의 산물이었다.
특히 연암이 중국을 유람하고 쓴 <열하일기>는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했던 ‘사람이 느낀 감정을 거짓됨 없이 이록하는 패관소품체’로 쓴 것으로 당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것으로 정조의 문체반정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리고 유명한 <양반전>에서는 수레나 선박의 이용과 함께 화폐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허생전>에서는 유통 경제의 흐름을 장악하는 것만으로도 큰 돈을 벌 수 있음을 보여주며, 상공업의 육성이 부국강병의 근본임을 역설했다.
< 이 중 가장 인상적인 역사적 사건 하나를 선택하여 왜 자신에게 그 장면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는지 그 이유를 해석할 것 (1/2 페이지 ) >
과거에는 정복전쟁을 통해 문화가 융합되고 발전되었다. 서양에서 동양으로 동양에서 서양으로의 정복전쟁은 서로의 문화로의 여행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실학자 연암은 조선이라는 작은 한정된 공간에서 중원이라는 탁 트인 넓은 공간으로의 여행을 감행했다. 연암에게 여행은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연암은 중국 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속까지 동시에 여행한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외면에 나타나는 일을 적음과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적었다. 바깥 세상의 현상과 저자의 마음이 하나로 아우러진, 매우 다면적이며 다차원적인 저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그는 늘 따뜻한 유머를 늘 잃지 않고 냉정하면서도 호의에 찬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사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듯하다. 학문적 실력이 당대를 풍미했음에도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자기만의 삶을 살았던 연암이야말로 자신의 내면의 울림을 따라 자신의 삶을 디자인했던 진정한 창조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장면이 상징하는 것을 앞으로 어떻게 자신의 개인적 역사에 긍정적으로 반영하고 싶은 지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것 ( 1 페이지) >
나는 자유를 꿈꾼다. 그 자유가 내가하는 일, 학교라는 교육현장에서 실현되기를 꿈꾼다. 학교의 구성원인 학생들을 위한, 그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육을 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잘하는 교사들은 나름 학생들을 행복하게 하는 교육을 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무엇이 문제일까? 난 그 원인 중의 가장 큰 요인을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학교에서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집안에서 부모가 행복하지 않으면, 부모가 아무리 너희들은 행복해야한다고 말해도 아이들 또한 행복하지 않기 마련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학교를 구성하는 교사와 학생, 교사가 행복해야 학생도 행복할 수 있다. 나는 교사와 학생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학교를 꿈꾼다.
실학의 시대를 살았던 연암 개인의 역사를 통해서 내가 꿈꾸는 교사와 학생 모두가 행복한 학교를 위한 프로그램? 교육문화운동?을 생각해보았다.
학교현장에서는 교사들끼리 대화를 하거나 함께 연구를 할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다. 수업과 업무에 쫓기다보면 간단한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할 시간도 없는 경우가 많다. 시간을 내봐야 한 학기에 2번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험기간이다. 연암은 개인적으로 학식이 뛰어났지만 그것이 연암 개인 안에서의 재능으로만 빛났다면 그가 남긴 사상이나 작품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암은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홍대용 등의 지식인들과 학문적 교유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고 그들의 자유로운 비판과 조언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기 위해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한 사람들끼리의 소통이라는 것은 서로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구조이다. 학생들에게 창의성을 교육하겠다는 학교는 정작 폐쇄적이고 기존의 체제를 고수하려고 하며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 곳의 구성원인 교사도 자신의 학식 정도에 매몰되어 동료들과의 교류를 통한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한다. 교사들의 두려움은 동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교사들에게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수업이나 학생지도에 있어서 다른 교사에게 조언을 하는 것도 월권이라고 생각되어 거의 하지 않는다.(간혹 선배교사가 후배교사에게 조언을 하기도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는 생각할 수도 없다,)
연암이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고 중국여행을 했을 때도 그렇고 우정,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켜갔듯, 교사도 동료들과의 우정을 통해 서로를 성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집안에 부모님의 서로 마음을 터놓고 사이좋게 지내야 분위기가 좋아지듯, 학교에서 교사들이 교육에 대한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즐겁게 지내야 학교의 분위기가 좋아질 것이다. 지금의 학교 시스템으로는 교사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학교단위에서 우선 소그룹으로 교사들간의 교유의 장을 만들어 자유로운 소통을 가능하게 할 필요가 있다. 연암이 그랬듯 우정에서 필요한 건 언어능력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교사들간에 필요한 것은 우선은 마음을 열고 자신의 그대로를 표현하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어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해지면, 그러한 장속에서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하고 그 상태에서 교육에 대한 문제를 논의를 해야 한다.
창조적인 학생을 길러야 하는 교사들은 정작 창조적이지 못하다. 아니, 자신이 창조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창조적인 존재임을 깨달아야 학생들이 창조적인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교육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교사들이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현장에 매몰되어 있다보니 지식이외의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판단하여 그렇게 되는 것같다.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내면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치는 일도 일정정도 교사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학생들은 교사에게서 그러한 것을 배우지 못하고 스스로 알아차려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내면을 탐구하는 과정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나 멀리 돌아가게 된다. 왜 교사들은 내면을 탐구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것을 하지 않거나 가르쳐야함을 의식하지 못할까? 아마도 자신 스스로가 내면을 탐구하는 여행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일 것이다. 물론 그들도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연암이 여행을 통해서 길에서 사유하고 자신의 내면을 사유했듯이, 교사도 그러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사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마련해주어야 한다. 현실에서 교사들에게 시행되는 재교육은 지식의 재교육이다. 하지만 교사와 학생 모두가 행복한 학교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교사의 내면을 탐구하는 재교육이 필요하다. 연암이 외면과 내면을 동시에 탐구해 자신다움을 창조를 했듯이, 학생들에게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기 위해 교사 스스로가 먼저 외면과 내면의 탐구를 통해 자신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고 창조할 수 있는 교사만이 창조적인 학생들을 교육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 여기에 등장하는 학교의 상황은 각 학교마다 편차가 있고 다양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개인적인 생각이니...오해없으시길...그리고 교사의 전문성 향상을 위한 움직임이 진행중이기도..^^

자유를 꿈꾸는 선생님의 제자는 자유를 꿈꾸는 것을 배우고 있을 거야.
네가 속한 울타리에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펼치고 배우고 시간의 여유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내면에 있다면, 아이들은 보충 수업을 안하고 자유롭게 컴퓨터나 나가서 본인의 하고 싶은 일을 공상하며
마음으로 학교에 앉아 있겠지.
그래서 선생님과 부모가 세상에서 제일로 어려운 역할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아직 많지 않은 나이에 얼마나 힘이 들까 안쓰럽다.
이상하게도 말을 하지 않아도 피부세포나 눈동자에서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그것을
읽어내거든. 영악한 것들....ㅎㅎ
네가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를 너의 삶에 반영하면 아이들이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클 거란 생각 믿어 의심치 않아. 이 세상의 등불같은 연주샘 화이팅 !

1917년 10월 혁명이 성공했을 때, 볼세비키 당원들과 그들을 지지했던 세력은 전체 인구의 10%에
불과했다고 한다. 고작 10%. 글도 못 읽는 문맹자들은 또 얼마였을까?
나쁜 짓을 같이 하는 것이 진짜 친구다. 좋은 말만 해주고, 좋은 길만 가라고 하는 사람의 말은 달다.
불편한 소리를 듣게 되면, 자신이 예민해지는 순간이 있으면,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이거나, 너무 크게 고함치는 소리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드럼을 치던 그녀, 전쟁터에선 모두가 그녀의 북소리를 듣게 되어 있다. 안 들으면 죽는다.
그럴 날이 올것이다. 이제 곧 그녀의 고함소리가 북소리가 될 것이고, 병사들의 눈이 말을 타고 깃발 꽂힌 창을 든 그녀를 쫒게 될 것이며, 칼보다 더 강한 그녀의 펜에 적들의 목이 평원을 나뒹굴게 될 것이다. 왕의 피를 타고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