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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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어색한 두손, 달콤한 초코파이.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데 관심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 다이애나 루먼스
건수는 작년 우리옆반 아이로 나에게 한문을 배웠다. 건수네 반 수업을 하는 내내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문시간의 건수는 거의 졸린 눈을 반쯤 뜨고 나를 바라보는 아이였다. 왜 이렇게 잠을 자냐고 밤사이 뭘 했냐고 물으면 당연하다는 듯 투명스럽게 ‘게임했죠’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수는 나에게 공부에 흥미가 없는 보통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러던 우리가 2학기가 끝나갈 무렵에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작년에 모닝페이지반을 운영하면서 학교도서관에서 수업을 했는데, 도서도우미였던 건수는 방과후에 늦게 까지 남아 자발적으로 도우미 활동을 하면서 멀찌감치서 우리수업을 지켜보곤 했다. 방과후에 수업을 하는 터라 도서관에는 모닝페이지반 아이들과 나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혼자 책을 뒤적이는 건수가 있었다. 수업을 하면서 간식을 먹는 경우마다 건수에게 권했는데 건수는 한번도 흔쾌히 내가 주는 간식을 먹은 적이 없다. ‘건수가 이거 먹어.’라며 간식을 전하는 내 말에 항상 ‘저는 그거 제일 싫어해요.’라는 퉁명스런 말이 되돌아 왔다. 또는 가끔 수업을 하다보면 건수가 우리쪽을 쳐다보는 경우가 있어서 ‘이리와서 같이하자’라고 제안을 하면 어김없이 ‘저 바빠요’라는 말로 나에게 응수했다. 그런 건수의 반응들이 서운하기보다는 안쓰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함께 먹고 싶고 같이 하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다. 과연 나혼자만의 착각일까 궁금해졌다. 어느날 수업시간에 건수를 보았는데 건수가 눈을 뜨고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숙제가 무엇이었냐고 묻기도 했다. 이때부터였을까 이제야 우린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 듯했다. 그리고 2학기가 끝날 무렵 건수에게 무심코 내년에 모닝페이지반 생기면 같이하자라고 말했다. 건수의 반응은 역시나 ‘흠. 봐서요’
그리고 올해 새학기가 되어 모닝페이지반 학생을 모집했는데 건수가 신청을 했다. 그리고 함께 수업을 하는데 1학기가 지나는 내내 건수는 수업에 거의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을 하는 내내 건수의 반응은 항상 퉁명스러운 태도로 일관되었다. 그런데 한번은 수업하는 장소가 바뀌었는데 그 교실을 못 찾아서 수업에 빠졌다. 그 다음날 수업을 못 들어서 너무 안타깝다는 건수의 반응을 보고 많이 놀랐다. 그리고 언젠가 함께 하는 아티스트 데이트로 일요일날 홍대카페에서 수업을 했는데, 경기도 광주에 사는 녀석이 그곳까지 찾아왔다. 나도 함께 수업을 하는 아이들도 모두 건수가 여기까지 온 것이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모닝페이지반 수업을 하면서 건수는 공부이외에 하고 싶은 일을 물으면 ‘게임’, 미래의 꿈을 물으면 ‘프로게이머’라고 대답했다. 학교이외의 시간을 모두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는 아이였다. 부모님 모두 새벽에 일을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시고 형제가 없는 건수에게 게임은 혼자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였다. 게임에 빠져 지내는 건수에게 사람과 소통은 어렵고 서툰 일인 것이 당연했다. 얼마 전 건수에게 어떻게 자발적으로 도서 도우미를 하고 모닝페이지반을 하게 되었는지 넌지시 물었던 적이 있다. 그냥 재미있을 것도 같고 그걸 하면 집에 늦게 가니까 게임을 하는 시간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하. 녀석도 자신이 변화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변화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았던 것이다. 비록 아직은 서툴지만 자신이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그 길로 들어섰으니 건수는 멋지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선생님들은 건수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다행인건 건수 담임샘은 그런 건수의 속마음을 알고 애정을 갖고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학교는 아침에 등교시간보다 1시간 일찍와서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 초코파이를 준다. 건수는 거의 매일 일찍 와서 초코파이를 받아 자기가 먹지 않고 담임샘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초코파이를 두손으로 얌전히 건네는 것이 아니라 멀찌감치서 한손으로 던져놓고 가곤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매일 일찍 오던 건수가 1교시가 시작해서야 온 적이 있다고 한다. 부모님이 새벽에 일을 나갈 때 깨워주고 가서 일찍 올 수 있는 것이었는데 피곤해서인지 늦잠을 잤던 것이다. 수업이 시작하고서야 교실에 들어선 건수는 퉁퉁 부운 눈을 하고 검은색 비닐봉지에 전날 담임샘이 가져오라던 화장지(교실에서 사용할 화장지를 아이들이 번갈아서 1개씩 가져오곤 한다)를 들고서있었다고 한다. 담임샘은 지각해서 미안하다며 대신에 화장지를 3개 가져왔다고 내밀며 ‘저 무단지각인가요’라고 걱정스런 말을 건네는 건수를 차마 무단지각으로 처리할 수 없어서 담임의견서를 빼곡히 써서 질병지각으로 처리해주었다고 했다(무단으로 표시가 되면 고등학교 입학할 때 필요한 내신점수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그날 이후에 어김없이 1시간 일찍 등교해 초코파이를 받는 건수는 이제는 어색하지만 두손으로 담임선생님에게 초코파이를 건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