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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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가?
‘신체변화는 정서경험에 필요 조건이다. 그러나 신체변화가 정서경험의 충분조건은 아니며 경험하는 정서의 종류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인지적 요인에 달려있다.’
- Schachter의 정서이론 중에서-
이 이야기는 화가나서 성질이 난거냐, 성질이 나서 열받은거냐 그 말이다. 더 쉽게 웃을 일이어서 웃는 것이냐 아니면 웃어서 웃을 일이 된거냐 이말이다.
왜 짐승들은 자극에 대해서 일대일의 반응을 하는데, 인간은 달리 복잡하게 반응하는가?
왜 한 대 맞으면 어떤 아이는 울고 어떤 아이는 화내고 어떤 아이는 무표정하고 어떤 아이는 웃는가?
어린아이가 머리를 한 대 ‘콩’하고 맞았을 때, 아이들은 달리 반응한다. 한 대 맞아서 아프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면 울고, 억울하게 맞았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면 화를 내고, 맞는 것에 익숙한 아이는 무감각하다. 때린사람이 자기를 아끼는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웃을 수도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자극에 대한(신체변화) 정서경험은 그 상황속에서 인지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데 이를 인지평가이론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초기에는 신체변화를 통해서 정서적인 반응을 일으키지만 후에는 인지가 정서변화를 야기한다. 갓난 아이는 화를 내는 표정을 지어도 웃는다. 그러나 맞고 나면 울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화나 때리려는 표정을 보고 울게 된다.
설명이 복잡하고 중언부언하는 것 같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예를 드는 것이 더 복잡해질수도 있지만 이해를 가능케하는 더 다양한 단서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통찰은 순차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우연한 단서에 의해서 '아~ ' 하고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 반드시 절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살다가 내가 맞닥뜨리는 어떤 일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며 용납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단지 나의 정서상 수용이 안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라고 맹세하지 말라’고 했는지 모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쩔 수 없이’ 라는 말을 참 싫어하는데, 이 또한 같은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오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하기를 권한다. 왜 그랬을까? 곧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평가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다.
이렇게 조금 더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과정없이 상대를 이해하려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갖는다. 가족이기 때문에,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직업이기 때문에, 자식이기 때문에, 부하직원이기 때문에, 선수이기 때문에... 참으려 하면 우리는 늘 ‘도저히, 더 이상은...’ ‘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어떻하란 말야...’ 가 된다.
우리의 인내심은 늘 한계로 치닫고 그 역치를 넘는 순간 분노로 폭발한다.
그렇지 않은가? ^^
위태위태한 삶속에서 끝없이 도전해야만 했던 시간들속에서...
늘 한계 끝에 서 있어야 했고,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게 되곤 했다.
“선수가 잘못해서 내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내가 화를 낼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길을 찾곤 했다.
창조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또 어느 순간에 새로운 생각이 습관으로 길들여지고 나면, 그렇게 범사가 되고나면 소중함과 성실함이라는 감사를 잊게 된다. 습관이 되고나면 자극에 대한 반응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그러면 나의 운명은 예정될 것이 아니라 결정된 것이 된다. 그렇게되면 주어진 삶에 스스로 갇히게 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변화란 주어진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반복되어지는 인과관계, 그 습관적 행동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인과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변화를 이끌어주는 창조는 그래서 늘 연관되지 않는 것들의 연관성을 통해서 나타난다.
변화를 시작하는 것, 곧 새 출발이란 주어진 세계와의 단절이 아니라 좀 더 깊이 있는 통찰에 의해서 새로운 질서를 찾는 것이다. 새로운 질서를 발견함으로서 새로운 세계로의 길을 발견한다. 그것은 습관적 인과관계의 고리를 끊는 것이며 곧 새로운 인과관계를 위한 출발이 된다. 변화의 시작이다.
도저히 용납이 안 될 때, 더 이상 길이 없을 때, 실낱같은 희망마저 보이지 않을 때
그 한계 끝에서 나는 변화를 향한 적절한 나의 대처를 위해서 묻는다.
“사랑하는가? ”
그것은 주술사 ‘돈환’이 내게 묻는 말과 같다.
‘이 길에 마음을 담았느냐?“
*** ***
마음을 담은 길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보아라
그리고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 가지를 물어 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 없는 것이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돈환의 가르침>>
IP *.131.127.50
‘신체변화는 정서경험에 필요 조건이다. 그러나 신체변화가 정서경험의 충분조건은 아니며 경험하는 정서의 종류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인지적 요인에 달려있다.’
- Schachter의 정서이론 중에서-
이 이야기는 화가나서 성질이 난거냐, 성질이 나서 열받은거냐 그 말이다. 더 쉽게 웃을 일이어서 웃는 것이냐 아니면 웃어서 웃을 일이 된거냐 이말이다.
왜 짐승들은 자극에 대해서 일대일의 반응을 하는데, 인간은 달리 복잡하게 반응하는가?
왜 한 대 맞으면 어떤 아이는 울고 어떤 아이는 화내고 어떤 아이는 무표정하고 어떤 아이는 웃는가?
어린아이가 머리를 한 대 ‘콩’하고 맞았을 때, 아이들은 달리 반응한다. 한 대 맞아서 아프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면 울고, 억울하게 맞았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면 화를 내고, 맞는 것에 익숙한 아이는 무감각하다. 때린사람이 자기를 아끼는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웃을 수도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자극에 대한(신체변화) 정서경험은 그 상황속에서 인지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데 이를 인지평가이론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초기에는 신체변화를 통해서 정서적인 반응을 일으키지만 후에는 인지가 정서변화를 야기한다. 갓난 아이는 화를 내는 표정을 지어도 웃는다. 그러나 맞고 나면 울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화나 때리려는 표정을 보고 울게 된다.
설명이 복잡하고 중언부언하는 것 같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예를 드는 것이 더 복잡해질수도 있지만 이해를 가능케하는 더 다양한 단서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통찰은 순차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우연한 단서에 의해서 '아~ ' 하고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 반드시 절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살다가 내가 맞닥뜨리는 어떤 일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며 용납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단지 나의 정서상 수용이 안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라고 맹세하지 말라’고 했는지 모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쩔 수 없이’ 라는 말을 참 싫어하는데, 이 또한 같은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오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하기를 권한다. 왜 그랬을까? 곧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평가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다.
이렇게 조금 더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과정없이 상대를 이해하려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갖는다. 가족이기 때문에,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직업이기 때문에, 자식이기 때문에, 부하직원이기 때문에, 선수이기 때문에... 참으려 하면 우리는 늘 ‘도저히, 더 이상은...’ ‘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어떻하란 말야...’ 가 된다.
우리의 인내심은 늘 한계로 치닫고 그 역치를 넘는 순간 분노로 폭발한다.
그렇지 않은가? ^^
위태위태한 삶속에서 끝없이 도전해야만 했던 시간들속에서...
늘 한계 끝에 서 있어야 했고,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게 되곤 했다.
“선수가 잘못해서 내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내가 화를 낼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길을 찾곤 했다.
창조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또 어느 순간에 새로운 생각이 습관으로 길들여지고 나면, 그렇게 범사가 되고나면 소중함과 성실함이라는 감사를 잊게 된다. 습관이 되고나면 자극에 대한 반응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그러면 나의 운명은 예정될 것이 아니라 결정된 것이 된다. 그렇게되면 주어진 삶에 스스로 갇히게 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변화란 주어진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반복되어지는 인과관계, 그 습관적 행동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인과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변화를 이끌어주는 창조는 그래서 늘 연관되지 않는 것들의 연관성을 통해서 나타난다.
변화를 시작하는 것, 곧 새 출발이란 주어진 세계와의 단절이 아니라 좀 더 깊이 있는 통찰에 의해서 새로운 질서를 찾는 것이다. 새로운 질서를 발견함으로서 새로운 세계로의 길을 발견한다. 그것은 습관적 인과관계의 고리를 끊는 것이며 곧 새로운 인과관계를 위한 출발이 된다. 변화의 시작이다.
도저히 용납이 안 될 때, 더 이상 길이 없을 때, 실낱같은 희망마저 보이지 않을 때
그 한계 끝에서 나는 변화를 향한 적절한 나의 대처를 위해서 묻는다.
“사랑하는가? ”
그것은 주술사 ‘돈환’이 내게 묻는 말과 같다.
‘이 길에 마음을 담았느냐?“
*** ***
마음을 담은 길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보아라
그리고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 가지를 물어 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 없는 것이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돈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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