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2010년 7월 4일 12시 19분 등록

 응애 17 - 얼어붙은 심장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냉동실은 -20도를 유지하며 잘나갔다. 냉장실은 섭씨 24도에서 머물러 있으며 콩을 갈아 만들어둔 콩물과 우유의 맛을 변화시켰다. 콩물과 우유는 변하지 않고 싱싱하게 남아 우리가족의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무슨 까닭에서 인지 몸통이 심통이 났나보다.

며칠 전에 냉장고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냉장실의 문을 열면 소리가 사라지고 닫으면 또 다시 웅웅 소리가 났다. 센터에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안의 내용물들이 순환을 막고 있을지 모르니 배치를 다시 해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고장을 신고하는 이 대화는 녹음이 된다고 했다. 정리를 다시하고 기다렸더니 이번에는 온도계가 24도에 머물러 있다. 조정을 다시해도 그대로 30까지 갔다가 24로 내려오고는 한다. 이번에는 네이버에게 물었다. 네이버에 비슷한 사례들이 있어서 종합해보니 아무래도 기사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날은 무덥고 숙제들 사이에서 가족들은 바쁘고, 그러나 기사는 약속을 잘 지켜서 나타났다. 그는 냉장실을 열어 한가운데 놓인 판을 걷어내더니 드디어 냉장고의 심장을 열었다. 정밀하게 반듯한 코일로 쌓인 심장을 들여다보더니 그곳에 얼음이 가득차 있다고 했다. 가끔 물이 흘러내리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그것이 궁금하다고 대답했다. 그는 뜨거운 물을 좀 끓여달라고 말했다. 왜요? 여기를 좀 녹여야 해요.

기사는 냉장고의 내장을 다 비우고 그 열선, 오로지 심장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꽁꽁 얼어붙은 그의 마음을 달래고 뜨거운 물을 가까이 올려두고 흠뻑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얼어붙은 이 심장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눈물은 바닥으로 흘러내렸을 텐데...혹시 그런 느낌이 없었느냐고 묻는다. 심장 아래로 두개의 싱싱 칸이 더 있었으니 나는 냉장고의 눈물을 알지 못했다. 둔한 주인을 만나 그렇게 조용히 눈물만 흘리던 그 심장이 더는 참지 못하고 문 밖으로 울음소리를 내보냈다. 나는 그냥 기계음이라고 만 생각하고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얼어붙은 심장, 나도 살면서 몇 번이나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순간을 만났다. 고요한 밤에 철길 위를 걷다가 마주오는 사람을 만났을 때나, 호젓한 산책길에서 살모사를 보았을 때다. 그러나 오랜 시간 고통을 홀로 감내하다가 바야흐로 얼어붙어 버린 심장에게는 미처 그 눈물을 읽지 못했고 고장이 나는듯한 소리도 듣지 못했다. 어쩌면 마침내  얼어붙은 나의 심장이 이제는 영원한 결별을 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밀려왔다. 다시 심장이 급하게 얼어붙는다.

어디서부터 진단을 시작해야 하나? 어디를 열어보아야 하고 어디를 풀어줘야 할까? 뜨거운 물은 또 얼마나 필요할까? 흘러 내린 눈물이 시내를 이루고 또 흘러 내려 강물 따라 가고 있을까?  아니면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얼음 덩어리로 남아 어딘가에 쌓이고 있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펼쳐진다. 꼬꼬생이다. 이쯤에서 드디어 얼어붙은 심장을 버리고   부드럽고 따뜻한 심장으로 바꾸어 달아야 하는게 좋지 않을까 . 진정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조차도 우물쭈물 하고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또 꼬리를 문다. 이번에는 꼬꼬걱.

살면서 무엇인가 고장이 나면 나는 항상 그 원인이 궁금했다. 왜냐하면 내가 또 무엇을 잘못했을까 반성을 하며 과거를 되돌아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긴장을 한다.  그러니 심장이 약해지고 움츠러들었을 것은 뻔하다. 내가 당연한 일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나의 심장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일이 없었을까?

다행히 기사는 일을 잘 마무리했고 발길질로 깨진 싱싱칸의 뚜껑까지 갈아주었다. 고양이도 아닌데 사실 네발을 모두 다 쓰며 냉장고를 여닫은 것도 후회가 되었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들은 이제 떼어져서 나갔고 흐르는 눈물은 고이 닦아 말갛게 되었으니 심장이여 이제는 노여움을 풀고 평화롭게 살아가시라. 이렇게 냉장고의 심장과는 화해를 했다.

다만 내 손가락 끝으로 방향을 지시한 돈만 또 다른 기계를 통해 기사의 계좌로 날아갔다. 푸른 연기를 흩날리며. 이제는 돈도 심장도 내가 직접 어루만질 수 있는 시대는 다 지나간 것 같다. 다만 이런 새로운 시절에 좋은 인연을 만나 나의 얼어붙은 심장도 새롭게 정화되기를 빌어본다.

IP *.67.223.107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