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 조회 수 2309
- 댓글 수 2
- 추천 수 0
응애 18 - 통과 의례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꼭 한번씩은 속을 뒤집어보게 된다. 새로운 생각들이 속살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고있는 미셸 투르니에는 철학적 배경이 든든한 작가이다. 그의 소설 속에는 현존하는 철학가들과 오랜 친교로 이어온 그의 철학적 성찰까지 녹아 반짝인다. 나는 한권 또 한권 읽을 때마다 예사롭지 않은 짧은글 속에서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록달록한 수수께끼를 혼자 짜맞춰본다. 여기 저기 숨어있는 지혜를 보며 나의 무지함에 통탄을 한다. 그러나 이제 사랑의 눈으로 그를 다시보기 시작하고부터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으로도 그에게 다가갈 수 있어서 위로가 된다.
나는 요즈음 사람들이 펴낸 첫 책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첫 책을 준비하며 첫 책을 낸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어서이다. 지금은 필명을 날리지만 무명작가였을때 문전박대를 당하던 그 신세들이 우습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해서 기억에 남았다. 최근에 만났던 잘나가는 어느 출판사의 대표께서 "아, 그 테마 좋은데요..."라고 하기에 조금 더 진지하게 살펴보고 있다.
조셉 캠벨을 거절하고, 필립 아리에스를 거절하고, 니이체로 하여금 자비로 40권을 발간케 한 그 세월, 제임스 조이스는 원고지를 단 한장도 살아생전에 팔아보지 못했단다. 그런 두터운 장벽을 뚫고도 세상에 나온 책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미셀 투르니에는 신화와 역사와 지리를 녹여 소설을 쓴다. 그의 첫 책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작품을 완성하고도 그의 책상 설합에서 몇 년을 더 기다렸다. 그는 3-4년에 한권씩 책을 내고 탈고를 하고도 오래동안 책을 묵힌다. 아마 숙성되는 때를 기다려주는 것이리라.
무인도에 홀로 떠내려와서 방드르디를 만나기 전까지 로빈슨은 그가 배우고 익힌대로 인습을 따라 시간표를 만들고 규율을 정하고 그의 좌표를 설정한다. 그 섬의 총독으로 그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선 일인기업가가 되었다. 그는 몸이 이끄는대로 난파선에서 먹을 것을 가져오고 소금기를 뽑아내고 씨앗을 심고 또 가꾸고 열매를 거둔다.
그러나 토인들에게 잡혀와 산제물이 될 뻔한 인디언 흑인 혼혈아 방드르디를 빗나간 화살 덕에 구해내게 된다. 우연이 그의 인생을 뒤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방드르디는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며 미친듯이 웃어대는 문명 저편의 사람이다. 담배를 몰래 피우기 위해 저장고에 들어간 방드르디가 로빈슨의 모든 재산을 폭파하고 만다. 한 순간에 작은 불씨 하나가 모든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백인이며 기독교인이며 중상류층 식자의 눈으로 보는 역사와 지리를 그는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고 싶었나보다. 그는 소설을 쓸때는 먼저 발로 써내려간다. 꼼꼼하게 답사를 하고 몇 번이고 다시 현장에 가본다. 그래서 그의 책에는 유용한 정보 또한 가득하다. 그의 책을 읽으며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 라는 것이 떠올라 그 단어에 사로잡혀 있다. 아니 통과의례를 분석하여 내게 결핍한 것을 채워보고자하는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최근에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와 짧은 이야기글, 콩트를 많이 쓰고있는 투르니에에게 중요한 것은 이니시에이션, 곧 성년이 되는 경계이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만 할 위기가 그의 글에는 거의 분명한 주제로 나타난다. 나는 점점 더 이 첫 고비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처음, 첫 경험에 부딪쳐서 길을 잃고 기운을 잃고 무너져내리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맛은 라일락 꽃잎처럼 씁쓸하다. 그러나 남는 맛이 오묘하다. 첫사랑은 또한 초라하기도 하다. 눈이 멀어야 시작을 할 수 있다. 때로는 운명의 힘에 떠밀려 쓸쓸하게 길을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속의 용감한 왕자는 무지의 베일을 걷어내고 그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아 자기 발로 힘차게 나아간다. 그 끝은 죽음일 수도 있지만 착한 소설에서는 아름다운 공주를 구출해서 마침내 영웅이 되는 것으로 끝이난다.
사람들이 가고 또 갔던 그 통과의례들이 지금 내앞에 성스러운 두루마리 처럼 펼쳐져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