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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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애 19 - 무지한 스승
프랑스 사람을 애인으로 두고 있으니 프랑스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된다. 어제 밤에는 자크 랑시에르와 긴 시간을 함께 지냈다. 외국어를 이해하기에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묻는다. 물론 원서를 읽지 못한다. 번역문은 집중력이 두배 세배 더 필요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마담 뚜와 뮤슈 뚜가 통번역을 잘해주고 있어서 한국어를 여러 번 잘 읽어 이해가 되면 그다음에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끼어들 수 있다. 사실 오늘처럼 깊이있게, 그리고 또 자주 만나다 보면 언젠가는 그의 생각의 진수를 알고 심도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도 찾아오리라 기대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1987년 <무지한 스승>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물론 이 책이 그의 첫 책은 아니다. 그는 철학과 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글쓰기를 논문부터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교육정책의 논란에 대해 그의 입장을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무지한 스승을 통해 지적 해방과 지능의 평등을 말하고자 했다.
무지한 스승이란 무엇인가? 무지한 스승은 학생에게 가르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다. 그는 어떤 앎도 전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앎의 원인이 되는 스승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스승의 앎이나 학식을 전달하고 설명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지능이 쉼없이 실행되도록 강제하는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스승은 학생더러 구하던 것을 계속 구하라고 명령함으로써 학생이 스스로 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승의 의지와 학생의 지능이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곳에서 지적 해방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 책을 좀 더 풀어보자. 랑시에르는 자코토를 통해 그의 이론을 풀어간다. 1818년 조셉 자코토는 어떤 지적 모험을 했다. 그는 네델란드 루벵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그의 수업은 순식간에 학생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네델란드어를 몰랐고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몰랐다. 그는 페늘롱이 쓴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프랑스어-네델란드어 대역판을 교재로 선택했다. 통역을 통해 그는 이 책의 반 정도를 읽은 후에 이것을 쉼없이 되풀이하고 외운 부분이 아닌 나머지 반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읽으라고 시켰다. 그런 후에 학생들에게 그들이 읽은 내용 전부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프랑스어로 써보라고 했다.
학생들은 프랑스어 철자법과 동사변화를 전혀 익히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수준의 글을 써 낼 수 있었다. 이 실험은 스승의 본질적인 행위가 설명하는 것, 곧 가르친다는 것이 지식을 전달하는 동시에 그들의 정신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믿고있던, 오랜 세월 성실한 선생들의 추론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했다. 자코토의 실험, 지적 모험의 결과였다.
만약 선생이 학생의 지능을 믿어주고 그의 고유한 지능을 쓸 수 있도록 강제한다면 설명하는 스승이 없이도 학생들은 배울 수 있다. 자코토는 사실 그 자신도 출구를 몰랐던 숲을 가로지르라고 학생들에게 명령했을 뿐이다. 학생들은 아이들이 모국어를 배울 때처럼 관찰하기, 기억에 담아두기, 되풀이하기, 검증하기, 알려고 하는 것과 이미 아는 것을 연관시키기, 행하기, 행한 것에 대해 반성하기를 통해서 앞 못보고 더듬어 가면서 이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스승은 다시 말한다. 사람이 저마다 자기 안에 발휘되지 않고 잠들어있는 지능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라고 한다. “네가 하는 것을 계속하라, 사실을 배워라, 그것을 따라하라, 네 자신을 알라, 이것이 자연의 진행방식이다.” 결국 학생을 해방하지 않고 가르치는 자는 바보를 만든다. 해방된 자는 그가 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그는 이러한 배움을 빈자들에게 알리는 일에 헌신했다. “무언가를 배우라. 그리고 모든 사람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하라.”
그러나 19세기에 조세프 자코토의 보편적 가르침은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죽어 페르-라세즈 묘지에 묻혔고 그의 무덤위에 제자들이 지적 해방의 신조를 새겼다.
“ 나는 신이 혼자서 스승없이 스스로를 지도할 수 있는 인간 영혼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비석은 오래 살아남지는 못했다.
나는 우리 연구원 과정 중에 북리뷰의 “내가 저자라면...”을 쓸때 참 막막했었다. 무엇인가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 것 같은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차츰 공부가 쌓이면서 나의 말로 나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낯선 신화와 역사와 철학을 따라간다는 것 만으로도 숨이 차 올라서 헉헉 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숨막히는 마감 시간을 무사히 넘기고 나서 차근차근 다시 읽어보니 저자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고 나름, 그에 대해 대답을 해주고 싶은 말들이 생각이 났다. 과정이 중반을 들어서면서 부터는 차츰 차츰 이렇게 대화를 해나갈 수 있으니까 공부가 재미있기까지 했다.
일년이 빠르게 지나갔고 이제는 과거가 된 5기 때의 북 리뷰를 요즈음 다시 읽으며 조금씩 오탈자를 고쳐놓고 내가 저자라면...을 보완하고 있다. 작년보다 확실히 여유있게 읽을 수 있고 이제는 본 문을 읽지 않아도 몇 마디 주관적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잘쓰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우선 자기의 생각을 키워낸다는 것이 책을 쓰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덕목인 것 같다. 읽어야 쓰고 또 써야 쓰니 쓰는 일은 정말 쓰디쓰다. 그러나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고, 통째로 외우고, 그 과정에서 알아낸 것을 나의 말로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지적 모험이며 나를 해방시키는 공부이다. 게다가 적당한 때에 잠시 부지깽이로 앞 뒤와 양 옆을 흔들어 줄 의지의 스승이 계시니 나는 최고의 아카데미아에서 지금 이 순간 무더위를 즐기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