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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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할 걸...”
“나는 저 선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개인전을 뛰는 것을 보았을 때, 기대 이하였습니다.”
얼마 전 시합에서 도움을 요청했던 팀의 코치가 한 말이다. 그는 상당한 경험이 있는 스위스의 국가대표팀을 가르쳤던 코치였다. 그는 아시아 지역의 선수들을 가르치면서 상당히 혼란스러워했다. ‘왕’ 같은 권력을 가지 코치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절대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황금가지를 지키는 기사처럼 한 순간에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해 의아해 했다.
“믿지 못하는데, 왜 구원병을 요청하는가? 한 선수가 10점 이상을 까먹어서 경기에 치명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데 모험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안전만 생각하고 싶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결과에 대한 책임을 선수의 고실점으로 돌리겠다는 것 아닌가?”
“나는 교체 멤버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한다. ”
그는 그 이유를 개인전의 성적과 경기내용으로 돌렸다.
논리적으로는 그의 대답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문제의 핵심은 중요한 시합에서 한 선수가 고실점을 한다는 것이며 그 고실점을 해결할 방법이 그에게는 없으며 그 대안이 지원요청한 교체멤버라는 것이다.
“너는 너의 판단이 안전하다고 볼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것이 너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면 너는 이 팀을 맡았고, 그리고 이 팀은 이겨야만 광저우에 갈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그것은 네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망설인다. 히든 카드가 필요하지만, 막상 카드를 내야 할 순간에는 망설인다. 나는 사람들이 싸우다 죽는게 두려워서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팔 때마다 늘 그 원인을 대상이나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태도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것은 냉철한 분석도 아니며 치밀한 대책도 아니다. 그냥 겨우 제 한 목숨 살겠다는 본능적인 이기심의 발로에 불과한 것이다.
선수를 응원하는 코치의 태도를 보면 그의 그릇의 크기를 알 수 있다.
실력이 짱짱한 상대선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
“ 나는 너를 믿는다. 이길 수 있어! 긴장하지 말고 침착하게 하면 이길 수 있어!”
라고 말하는 코치와
“야, 저거 별거 아냐, 전에 내가 뛸 때 게임도 안됐어, 편하게 해!”
하고 말하는 코치의 차이는 크게 다르다.
학문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관찰의 이론 의존성’ 이라고 한다. 결국 선수에게 하는 조언은 지도자의 능력과 경험 그리고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뛰어야할 상대선수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논리실증주의’를 자랑하며, 지식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주장하던 전통과학은 형태주의 학습의 실험적 증거와 핸슨의 이 이론 단 한 방에 무너졌다. 바로 ‘관찰의 이론 의존성’ 때문이다. 사물과 상황과 실체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학습과 기억에 따라 왜곡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긍정적 사고를 주장하고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태도를 희망하지만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어 즐기며 살아가고 싶어하면서도 그러지 못한다. 그럴 수 없는 이유,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경험 즉 자신의 삶이 자신을 가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인 스스로는 결코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하고 분석하고 관찰해도 말이다.
좀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스스로는 깨달을 수가 없다. 더 큰 경험과 시야, 그리고 능력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에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들을 스스로 느낄 때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책이나 대화와 같은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배우려고 하지만 그것 또한 관찰의 이론의존성에 제한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보이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것이다.’ 좀 더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팔자대로 살게 돼있다는 '운명론'이 대두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사람들이 변화를 해야겠다고 진짜 결심한 순간에는 이미 늦는 것이다. 모험이든 변화든 그것은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의 결과로서 존재한다, 시도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를 잃고 나서 외양간을 고친다. 막다른 골목길에 몰리고 나서야 달려 들고, 도망갈 곳이 없는 불길에 휩싸인 높은 시추탑에서 뛰어내리지만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고 그래서 더욱 두렵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는 것처럼, 모험과 변화도 힘이 있을 때 시도하는 것이며 일상 속에서 여유가 있을 때 시도하는 것이다.
그 코치는 망설이다 기회를 놓쳤고 다 이긴 시합을 망칠 뻔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시합은 그와 역으로 무모하게 도전할 것을 요구했다. 이유는 이긴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다, 그들은 그 팀과의 경기에서 지금까지 딱 한 번 이겼을 뿐이다. 그는 동일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둘 다 단 한 번 보고 단정을 지은 것이다. (이런 것을 학문적으로는 과일반화의 오류, 그리고 초기조건의 민감성, 귀인편파 오류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문제는 교체선수가 이길 수 있는가? 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대로는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잊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을 믿지 말고 선수를 믿어주기를 바란다. ” 라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그래서 변화와 모험이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희망이 없고, 가능성이 희박하고 길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늘 같은 이야기를 한다.
“ 너는 지금의 그 인생이 싫고, 뭔가 새로워지고 싶어, 그러나 그 삶에 대해서는 잘 몰라,
당연히 모르지! 살아보지 않았는데,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당연히 길이 없지! 길은 사람이 가야 나는 법이거든
그러니, 불만 갖지말고 오늘을 열심히 살든지, 아니면 길을 찾아 나서면 돼, 아무도 못하게 하는 사람 없거든.“
현실에는 불만이 많고 미래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이런 사람들은
대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거의 다 이렇게 말한다.
“ 그 때 할 걸...”
IP *.131.127.50
“나는 저 선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개인전을 뛰는 것을 보았을 때, 기대 이하였습니다.”
얼마 전 시합에서 도움을 요청했던 팀의 코치가 한 말이다. 그는 상당한 경험이 있는 스위스의 국가대표팀을 가르쳤던 코치였다. 그는 아시아 지역의 선수들을 가르치면서 상당히 혼란스러워했다. ‘왕’ 같은 권력을 가지 코치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절대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황금가지를 지키는 기사처럼 한 순간에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해 의아해 했다.
“믿지 못하는데, 왜 구원병을 요청하는가? 한 선수가 10점 이상을 까먹어서 경기에 치명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데 모험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안전만 생각하고 싶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결과에 대한 책임을 선수의 고실점으로 돌리겠다는 것 아닌가?”
“나는 교체 멤버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한다. ”
그는 그 이유를 개인전의 성적과 경기내용으로 돌렸다.
논리적으로는 그의 대답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문제의 핵심은 중요한 시합에서 한 선수가 고실점을 한다는 것이며 그 고실점을 해결할 방법이 그에게는 없으며 그 대안이 지원요청한 교체멤버라는 것이다.
“너는 너의 판단이 안전하다고 볼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것이 너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면 너는 이 팀을 맡았고, 그리고 이 팀은 이겨야만 광저우에 갈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그것은 네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망설인다. 히든 카드가 필요하지만, 막상 카드를 내야 할 순간에는 망설인다. 나는 사람들이 싸우다 죽는게 두려워서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팔 때마다 늘 그 원인을 대상이나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태도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것은 냉철한 분석도 아니며 치밀한 대책도 아니다. 그냥 겨우 제 한 목숨 살겠다는 본능적인 이기심의 발로에 불과한 것이다.
선수를 응원하는 코치의 태도를 보면 그의 그릇의 크기를 알 수 있다.
실력이 짱짱한 상대선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
“ 나는 너를 믿는다. 이길 수 있어! 긴장하지 말고 침착하게 하면 이길 수 있어!”
라고 말하는 코치와
“야, 저거 별거 아냐, 전에 내가 뛸 때 게임도 안됐어, 편하게 해!”
하고 말하는 코치의 차이는 크게 다르다.
학문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관찰의 이론 의존성’ 이라고 한다. 결국 선수에게 하는 조언은 지도자의 능력과 경험 그리고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뛰어야할 상대선수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논리실증주의’를 자랑하며, 지식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주장하던 전통과학은 형태주의 학습의 실험적 증거와 핸슨의 이 이론 단 한 방에 무너졌다. 바로 ‘관찰의 이론 의존성’ 때문이다. 사물과 상황과 실체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학습과 기억에 따라 왜곡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긍정적 사고를 주장하고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태도를 희망하지만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어 즐기며 살아가고 싶어하면서도 그러지 못한다. 그럴 수 없는 이유,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경험 즉 자신의 삶이 자신을 가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인 스스로는 결코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하고 분석하고 관찰해도 말이다.
좀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스스로는 깨달을 수가 없다. 더 큰 경험과 시야, 그리고 능력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에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들을 스스로 느낄 때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책이나 대화와 같은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배우려고 하지만 그것 또한 관찰의 이론의존성에 제한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보이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것이다.’ 좀 더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팔자대로 살게 돼있다는 '운명론'이 대두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사람들이 변화를 해야겠다고 진짜 결심한 순간에는 이미 늦는 것이다. 모험이든 변화든 그것은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의 결과로서 존재한다, 시도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를 잃고 나서 외양간을 고친다. 막다른 골목길에 몰리고 나서야 달려 들고, 도망갈 곳이 없는 불길에 휩싸인 높은 시추탑에서 뛰어내리지만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고 그래서 더욱 두렵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는 것처럼, 모험과 변화도 힘이 있을 때 시도하는 것이며 일상 속에서 여유가 있을 때 시도하는 것이다.
그 코치는 망설이다 기회를 놓쳤고 다 이긴 시합을 망칠 뻔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시합은 그와 역으로 무모하게 도전할 것을 요구했다. 이유는 이긴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다, 그들은 그 팀과의 경기에서 지금까지 딱 한 번 이겼을 뿐이다. 그는 동일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둘 다 단 한 번 보고 단정을 지은 것이다. (이런 것을 학문적으로는 과일반화의 오류, 그리고 초기조건의 민감성, 귀인편파 오류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문제는 교체선수가 이길 수 있는가? 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대로는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잊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을 믿지 말고 선수를 믿어주기를 바란다. ” 라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그래서 변화와 모험이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희망이 없고, 가능성이 희박하고 길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늘 같은 이야기를 한다.
“ 너는 지금의 그 인생이 싫고, 뭔가 새로워지고 싶어, 그러나 그 삶에 대해서는 잘 몰라,
당연히 모르지! 살아보지 않았는데,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당연히 길이 없지! 길은 사람이 가야 나는 법이거든
그러니, 불만 갖지말고 오늘을 열심히 살든지, 아니면 길을 찾아 나서면 돼, 아무도 못하게 하는 사람 없거든.“
현실에는 불만이 많고 미래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이런 사람들은
대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거의 다 이렇게 말한다.
“ 그 때 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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