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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사업자와의 처음 만남은 여름 땡볕이 쏟아지는 대전 교육장에서의 어느 오후였다. 조금은 통통한 몸매에 둥그런 안경이 수덕한 인상을 풍기는 그녀는 올해 3월 새롭게 오픈을한 신규사업자이다. 모든 신규 사업자가 그러하듯 그녀도 운영 사업체의 조기정착을 위한 바쁜 나날을 보내는 분중에 한분으로 인식이 되었었는데, 그런 그녀가 나의 조망권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병력 이야기를 듣고난후 부터였다. 담당 영업 매니저와 대화도중 우연히 그녀의 과거사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이차장님, 00사업자분 몸이 안좋으신 것 아세요.”
“어디가 안좋으신데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시는데.”
“위암 3기인 분이래요.”
위암 3기라. 그말을 듣는순간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려지면서 우리 집안 가계도의 영상이 겹쳐졌다.
나는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제사때가 되어서야 빛바랜 액자속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분이라고 해야하나. 아버님은 6.25때 형제와 함께 이북으로부터 월남을 하신분이다. 당시 월남을 하신분들이 그러했듯 우리 집도 식구들 입에 하루 풀칠하기가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연탄 장사도 하시고 쌀가게도 운영 하셨다고 한다. 짧은시간 반려자로써 살아오셨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 명절날 가끔씩 어머님은 다음과 같은 푸념을 하시곤 한다.
“너희 아버지는 마음만 좋았지 사업을 하시는데에는 젬병인 분이었지. 세상에 아줌마들이 쌀을 사러오면 달라는 대로 퍼주기만 했으니 나참... 덕분에 악역 역할은 고스란히 내몫이었지 뭐니.”
그런 아버지의 어리숙하고 주변머리 없는 성격은 고스란히 나의 유전자로 인계가 되어졌다.고된 가운데에서도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우리 가정에 먹구름이 치밀어 오른 것은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된 직후부터였다.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서 진단결과 위암말기의 판정을 받았다.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다고 하였으나 현실의 벽앞에 누구나 그러했듯, 어머님은 없는 살림살이에 아버님을 고치기 위한 방법을 백방으로 찾아 다니셨다. 항암치료가 이어지고 비싼 진통제와 약값이 기약없이 들어갔다. 하루가 다르게 뼈만 앙상하게 말라 들어가며 고통을 호소하는 아버님의 모습은 어머님을 더욱 절박하게 만들어, 당신이 믿는 주님에게로 더욱 매달리게 했다. 나를 이불 포대기에 들쳐 업고 끝없이 그분께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러 예배당으로 쫓아 다니셨으나, 아버지는 내나이 3살 부처님 오신날 전날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작은 아버지는 어머님이 염려가 되셔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골을 화장해 한강 바닥에 뿌리셨고, 어머님은 그 충격으로 잠시 정신병원에 입원 하시기도 하셨다.
그런 이미지가 교차되다 보니 왠지 그녀에게로 향한 시선이 조금은 남달라짐이 느껴졌다. 그러던중 우연히 담당 매니저와 함께 동석이된 가운데 식사를 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조금은 낯설은 자리였기에 매니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차장님. 00사장님 위암 3기인 것 말씀드렸었죠.”
난처했다. 정신이 있는 양반인지. 그게 무어그리 좋은 이야기라고. 나의 이런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해 보였다.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저는 현재 하고있는 사업을 하기전 큰 일식집을 운영 하였어요. 돈도 무척이나 잘벌었었죠. 무엇하나 남부러울것이 없었고 늦은 나이-그녀 나이 41살-에 늦동이도 낳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날 서울대 병원에서 위암3기 판정을 받게 되었어요. 저는 너무나 암울했습니다. 어머님도 위암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여동생까지 위암 판정을 받은터에 저까지 그러하였으니까요. 너무나 힘들어 자살 결심까지 하였습니다.”
그녀의 이와같은 말에 어머니의 힘들었던 당시의 영상이 또다시 겹쳐졌다. 이해가 되었다. 그마음이 그심정이 가슴속 깊이 올라오는 그무언가와 함께 조금은 이해가 되어졌다.
“우리집 5층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세상을 마지막으로 뒤로하고 뛰어 내리려는 순간 갑자기 11살 먹은 막내아들 얼굴이 떠올려지는 것 있죠. 그짧은 시간에 그녀석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거예요. 그순간 저는 죽을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그녀는 위암에 좋다는 것이면 무엇이든 찾아다녔다. 극단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행동도 하였단다.
“남자인 이차장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어떻게 이해되실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좋다는 것은 다먹었어요. 뱀도 먹었고요.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내고 있는 와중에 어떤 분이 특효라고 처방을 해준 것이 있었어요. 여자가 생리할 때 나오는 처음 액체 부분을 마시면 좋아진다고해서 정말 눈을 질끈감고 제것을 받아 마시기도 했었고요.”
그랬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생존을 위해 어떤 것이든 해야만 했다.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의 저자 마르틴 그레이도 그러하였지. 생존을 위해 아버지가 하는 말을 가슴의 화두로 삼아 그 지옥같은 수용소에서도 결국 살아 남았었지.
“우리 대부분은 죽을거야. 너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라, 마르틴. 우리 모두를 위해 살아남아!”
그녀는 수술을 포기하고 기도생활과 운동 및 자연 먹거리를 규칙적으로 병행하였다. 새벽 4시면 기상을 하여 새벽예배에 참석하고 배드민턴을 10년째 하루도 빠지지않고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녀의 이런 끈기와 노력 탓이었는지 올해초 병원에 들려 정기검진 및 내시경을 끝내고 나오는 그녀에게 의사가 다음과 같은 희소식을 전하였다.
“00씨 경과가 좋아지고 있으니 3개월에 한번씩 검진 받으러 오던 것을 이제는 6개월에 한번씩 오도록 하세요.”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살수있다는 희망의 눈물이었다.
가족과 함께 할수 있다는 환희의 눈물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의 눈물이었다.
너무나 기쁜 마음에 안되는줄 알면서도 너무나 기분이 좋았던 그녀는 그날 벗과 함께 술을 한잔 하였다고 한다.
어이가 없었다. 위암 환자가 절대 삼가해야할 술을 마셨다니. 하지만 그기분이 그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얼마나 좋으면 그러했을까. 하기야 내가 당사자라도 춤을 덩실덩실 추었을 것이다.
식당을 경영하며 돈을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그녀에게 인생관의 변화가 오게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자신의 병력을 알리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겠지만 모든이가 만류하였음에도 서둘러 식당을 헐값에 처분하고 현재 우리 사업에 뛰어들었다. 다른이에게도 좀더 베푸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일을 뒤로하고 가족과 함께 정기적으로 여행도 다녔다. 사람과의 갈등관계에서도 왠만하면 너그럽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타인들이 변했다고 한다. 얼굴도 좋아지고 인상도 바뀌어간다고 하였다. 아직도 치료가 진행중이긴 하나 아무래도 덤으로 받은 추가의 인생이라고 생각 하였기에 더욱 마음을 비웠으리라. 아직까지 친분이 없는터라 조금더 세밀한 이야기는 나누질 못하고 일어섰지만, 그날 그녀와의 대화와 점심식사는 어쩌면 지금 현실의 나에게 간접적으로 주어진 또다른 메타포어(metaphor)이기도 하였다.
가족,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건강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태도의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