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산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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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막막하다. 먹먹한 까닭은 시가 가난한 이들의 로망이기에 그렇다. 시인은 생존력이 결핍된 가난뱅이다. 시집 ‘눈물은 왜 짠가’로 유명한 함민복 시인을 좋아하는 한 가지 이유도 그가 강화도 서쪽 바닷가에서 버려진 농가를 빌려 살고 있는 순박한 시인이기에 그렇다. 시가 막막한 것은 내 능력의 부족함도 한 몫 하겠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영화 ‘시(詩)’를 보고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 동안 내가 시에 대해 옹졸한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영화 ‘시’는 늦은 황혼에 시를 쓰고 싶은 할머니 양미자의 이야기다. 그녀는 이혼한 딸이 맡긴 중학생 손자와 단둘이 허름한 아파트에서 간병인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녀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꽃 모자와 레이스 머플러, 프릴 치마로 치장하고 사뿐한 걸음으로 예쁜 꽃과 대화하며 동화 속 요정처럼 산다. 그녀는 문화원의 시 강좌를 들으며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어한다. 하지만 부조리한 세상은 시에 아름다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동네 투신자살한 여학생 성폭행 사건에 손자가 가담한 것을 알게 되면서 미자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설상가상으로 알츠하이머병이 시작되고, 손자의 합의금 50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간병하는 이에게 몸을 허락하게 된다. 그녀는 속 울음을 삭이며 흐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의 현실 속에서 좌절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그녀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받아들이며 초연해진다. 배드민턴을 치던 손자가 경찰에 끌려가는데 외설적인 경찰과 배드민턴을 치는 장면은 차라리 눈물겹다. 마침내 부조리로 막힌 세상을 그녀는 한 편의 시를 써내려 가며 돌파한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시는 사라졌고 죽은 시인의 사회가 된 지 오래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사람들이 시를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시는 더 이상 운율 위로 흐르지 못하고 건조하다. 나 역시 시를 멀리한 지 꽤 오래되었다. 학창시절에는 박인환, 백석, 윤동주의 시를 거의 외우다시피 좋아했는데 이제는 바쁘다는 핑계로 일년에 한두 권의 시집을 보는 가난한 독자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시처럼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세상을 제대로 보는 용기가 있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김용택 시인의 말대로 수십만 번 혹은 수백만 번 보았을 사과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본 적은 없다. 시상은 이렇듯 평소 무심코 지나친 모든 것들을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서 떠오르고, 따라서 시인은 세상을 제대로 보는 자이다.
인생을 시처럼 살아가는 것은 진실을 본 후에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을 사는 현대인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타인의 마음에 둔감하다. 지독한 불감증의 시대다. 특히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에는 더욱 무관심하고 심지어 내 상처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시는 고통스런 현실을 살아가는 나와 타인에 대한 깊은 연민과 공감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시는 고통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가슴이 아프다는 것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다. 파란만장한 삶을 우리는 소설같다고 말하지 시 같다고 말하지 않는다. 시는 공백과 절제 속에서 고통의 의미와 삶의 아름다움을 탐색한다.
시를 읽고 쓴다는 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다. 아름다운 시를 쓰기까지 수많은 고통이 수반되듯이 우리의 삶 역시 고통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이다. 이것이 인생을 시처럼 살아야 하는 이유다. 살아오면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그리운, 기쁜, 위로해주는, 용기를 북돋아주는) 시 한편을 꺼내 읽어보자. 그리고 내 인생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한 구절의 시구로 표현해보자. 나의 삶은 시였음을.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정현종
바람을 일으키며
모든 걸 뒤바꾸며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집들은 물렁물렁해지고
티끌은 반짝이며
천지사방 구멍이 숭숭
온갖 것 숨쉬기 좋은
개벽.
돌연 한없은 꽃밭
코를 찌르는 향기
큰 숨결 한바탕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막힌 것들을 뚫으며
길이란 길은 다 열어놓으며
무한 변신을 춤추며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오 詩야 너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