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확
- 조회 수 2623
- 댓글 수 6
- 추천 수 0

‘제대로 된’ 홈 드레싱(Home Dressing)을 위한 재료
옷을 입을 때도 그렇고, 음식을 만들 때도 그렇고, 어떤 분야건 간에 우리에게는 늘 믿고 의지하는 몇 가지 아이템이 있기 마련이다.
진짜 멋쟁이는 신발과 가방을 보면 안다고 했던가. 나의 외할머니는 옷에 많은 돈을 쓰진 않으셨지만 구두만큼은 지극히 자신만의 취향이 있으셨다. 늘 앞코가 약간 뾰족하고 아무 장식이 없는 편안한 굽의 구두를 신으셨는데 모양은 하나인데 색깔이 서너 개라서 어린 손녀의 눈에는 마치 색깔이 변하는 요술구두마냥 신기하게 비쳐졌다. 한복 치마 밑에서는 보일 듯 말 듯 우아하게 보였고, 양장 주름 스커트 아래에서는 알 듯 모를 듯 전체적인 옷차림을 은근히 돋보이게 하는 데가 있는 구두였다. 발볼이 좀 넓은 편이라서 맘에 드는 구두를 찾기가 쉽지 않았던 외할머니에게 그 구두는 실용성과 심미성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완소 아이템이었다.
‘사먹느니 만들어 먹는다’가 모토인 나의 엄마는 매년 6월(? 우리 엄마 말씀에 의하면 어쨌든 매실이 새파랄 때)이면 매실원액을 한 40키로 정도 담가서 일년 내내 쓰신다. 생선조림에도, 나물무침에도, 비빔국수에도, 그 어떤 음식에도 양념 대신, 배탈을 만났을 때도, 소화불량에도, 감기로 인해 열이 날 때도 약 대신, 거짓말 약간 보태서 정말 안 들어가고 안 쓰여지는 데가 없다. 매실엑기스는 우리 집 만병통치약이자 사시사철 제철 식재료다. 가족의 건강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시는 엄마에게 절대 빠트릴 수 없는 그야말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은 일년 내내 배앓이 한번 하지 않고 건강히 잘 지낸다. 단음식을 즐기지 않는 나 역시 이 무더운 여름철, 얼음 한가득 채워 마시는 매실주스에 중독된 지 이미 오래다.
집 꾸미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내게도 즐겨 사용하는 재료와 아이템, 그리고 약간의 노하우(?)가 있다. 그러니까 조금 부풀려서 얘기하면 내가 이것들 없이 집을 꾸민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난 될 수 있으면 식탁과 의자는 세트로 구입하지 않는 편이다. 은근히 획일적이고 규칙적인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아서 특히 의자는 짝짝을 좋아한다. 단단한 천연 원목을 그대로 사용하여 나무가 가지고 있는 편안함과 묵직한 기품을 그대로 살린 식탁만을 구입하거나 가구 제작소에 의뢰해 천연 원목을 가공하여 만든 저렴한 가격의 합판으로 사이즈도 자유로운 맞춤 테이블을 만들어서 식탁으로 활용한다. 여기에 가지고 있는 의자를 커버링 하거나 모양도 제각각, 성격도 가지가지인 다양한 디자인의 의자를 선택해서 매치하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살지말자고 늘 다짐하지만 내가 일편단심 편애하는 벽지가 있다. 국산임에도 불구하고 수입벽지가 부럽지 않을 만큼 색상이 참 예뻐서다. 단색 컬러지만 밋밋하지 않고 질감과 두께감이 느껴져 시공한 집마다 만족도가 상당히 높았다. 각종 프린트 패턴과 자극적인 칼라의 포인트 벽지가 난무할 때도 언제나 차분한 분위기로 나의 감각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수입이라고 해서 무조건 비싸지 않고 국산이라고 해서 모두 저렴하지 않다. 나는 이 둘에 대한 선입견을 일찍이 벗어버렸다. 그들이 지닌 강점만을 보기로 했다. 적당히 비치면서 하늘하늘한, 바닥에 다소곳이 떨어지는 자태가 상당히 매혹적인 프랑스 태생의 칼라린넨을 자연스럽게 주름 잡아 속 커튼으로 만들고, 여기에 아무리 긁어도 손자국이 남지 않는, 바닥에 착지하는 모양새가 참 안정적인 대구 출신의 면벨벳으로 겉 커튼을 제작해서 창문을 연출하면 아주 아늑하면서도 품위 있는 거실이 된다.
나는 다양한 그림과 액자로 공간에 변화를 주는 것도 좋아한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 어린 시절의 모습, 가족의 풍경을 담은 사진 등을 모아 벽면을 장식해 가족만을 위한 갤러리로 꾸민다. 그렇게 하면 심심했던 공간은 어느새 추억을 되새기게 하고 행복한 웃음을 짓게 하는 의미 있는 곳으로 변신하곤 했다.
마음에 드는 거울을 찾기가 의외로 쉽지 않을 때 난 다양한 몰딩을 가지고 액자 프레임을 이용해 맞춤 거울을 짠다. 몰딩을 들고 유리 가게에 가서 거울을 짜달라고 하면 그 곳의 사장님이 알아서 잘 짜주신다. 섬유장(섬유의 길이)이 길고 섬세하여 아주 부드럽고 마치 솜털처럼 가벼운 느낌을 주는 이집트산 면 침구 세트, 소파와 함께 놓는 3단 오렌지색 티 테이블, 큰 돈 들이지 않고 공간의 느낌을 생동감 있게 바꾸어주는 변화(?)쿠션 등이 바로 내가 홈 드레싱에 애용하는 재료들이다.
이 모든 것들은 나와 내 집을 방문하는 이들의 시험대를 무사히 통과한 것들이다. 내가 집 꾸미는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했고, 일부는 중간에 우연히 만나서, 몇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늘 같으면서도 새로운 모습으로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이 재료들은 내 마음속 한켠에 늘 자리 잡고 있어서 유행에 상관없이 내 보물 상자에서 꺼내어 기분 좋게 쓸 수 있는 것들이다.
나는 이 재료들을 가지고 나의 취향에 맞게,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조금씩 바꾸고 응용하면서 활용해 왔다. 나의 집에 필요하다면 다른 집에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재료로 이것저것 만들고 여기저기에서 찾아서 보여주었다. 내가 만들어서 보여주면 이런 거 너무 필요했다고, 열심히 품을 팔아서 보여주면 이런 걸 찾고 있었다며 반가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자신감을 얻곤 했다. 또 여기엔 나의 집에 찾아온 이들이 알려준 팁들도 많이 섞여 있다. 집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면서 나는 그들에게 때때로 아주 훌륭한 조언들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제시하는 재료들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다른 전문가들에 의해 이미 검증된 것들이기도 하고 더불어 굉장히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의 경험과 적잖은 시행착오 끝에 집이라는 공간에는 어떤 재료가 어울리고, 그 재료들은 어디에 가면 구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집주인과 그의 공간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썩 괜찮은 재료들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조금이나마 가지게 되었다.
이 재료들을 가지고 각자의 공간에 맞게 조금씩 바꾸고, 조화시키고, 응용해서 지금 당장, 아니면 언제라도 당신의 집, 한번 제대로 꾸미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