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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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 대열이 폭염을 뚫고 포천을 지나 광릉수목원 근처에 다다랐을 때는
1991년 8월 어느 새벽 미쳐간다는 절박감에, 앞서 걸어가던 동료의 전투화로 시선을 돌렸다. 전투화는 규칙적인 양상으로 땅을 박차고 땅을 디디고 있었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는 형태보다는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시계 초침처럼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입안에 노래를 말아 부르기 시작했다. 무엇으로든 이 패턴을 깨야 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앞서 가던 동료가 나지막히 노래를 따라했다. 평화가 찾아왔다. 세 시간 만에 전나무 숲을 빠져 나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는 마을 어귀의 신작로 가장자리에 널브러져 부대 복귀 전의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기관총을 배낭에서 내리고 디스였는지 청자였는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동료에게 말했다. 같이 불러줘서 고맙다고. 그가 씩 웃었다. 그는 단기 사병이었고 나는 상병 말호봉이었다. 평소 지나가는 인사말 정도를 건네는 사이였을 뿐 그에게 나는 추상 같은 선임 현역병이었다. 나에게 그는? 일과를 시작할 때쯤 사복으로 출근해서 해질 무렵 젖과 꿀이 흐르는 집을 향해 위병소를 나서는 장군의 아들 정도.
“숙면을 방해한 건 아니야?”
“노래를 부르니 참을 만하더라구요”
나도 씩 하니 웃었다. 그랬다. 내 노래에 그가 화답했을 뿐인데, 그의 노래가 고갈된 내 육체의 배터리를 채워 주었다. 전나무 숲을 산책하면서 나는 잠시 착란의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 세상에 나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막막함-착란의 실체였다. 정전 시와 마찬가지로 몸의 에너지 고갈도 칠흑 같은 어둠을 불러왔다. 어둠에 잠긴 전나무 숲은 곧 내 육체의 상태였다. 어둠은 형태를 말아먹고 눈을 멀게 하는 대신 생존에 민감한 귀의 원시본능을 일깨웠다. 귀는 위협이 되는 존재를 재빨리 알아챌 수 있도록 패턴의 부비트랩을 사방에 깔아놓는다. 사물이 지닌 여러 성질 중에서 공통적인 패턴을 귀신 같이 찾아내서 기어처럼 맞물려 놓는 것이다. 초침이 ‘째깍째깍’ 돌면 싱크대 수도물은 ‘똑똑’ 떨어지고, 이따금 돌풍이 베란다 창문을 ‘휙~’ 치고 지나간다.
나는 하마터면 전나무 숲에서 익사할 뻔 했다. 나를 살린 건 규칙을 깨는 노래였다. 아니다. 나의 노래에 별 생각 없이 화답해 준 동료였다. 그가 망할 장군의 아들이었냐, 퇴근 후에는 어깨 좀 세우는 망나니였냐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날 전나무 숲에서 하필 그와 내가 나란히 걸었고 내가 노래하니 그가 노래로 화답하였다는 것, 그 또한 우리가 나눈 작은 마음을 열대야를 지새는 날이면 추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뜬금없는 추측만이 쉬 잊혀지지 않을 흐뭇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