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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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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31일 16시 27분 등록

행군 대열이 폭염을 뚫고 포천을 지나 광릉수목원 근처에 다다랐을 때는 새벽 1가 다 되었다. 산책길 양 옆으로 길이 1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전나무들이 도열하여 행인들을 반기고 있었다. 마음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한 시간을 걸었다. 길은 끝나지 않았다. 두 시간을 걸었다. 길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마음이 염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좌측 전방의 전나무 가지가 1초 남짓 살랑거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 착각이려니 생각했다. M60 기관총을 언제쯤 내려놓게 될까 하는 찰나 우측 두 번째 전나무가 가지로 수신호를 보냈다. 두 그루 쯤 지나쳤을 때 이번에는 양 쪽의 전나무들이 하와이언 댄서처럼 몸통을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숲 전체가 나지막한 리듬으로 엉덩이를 흔드는 모습이 눈 앞에 펼쳐졌다. 어둠을 틈 타 은폐엄폐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분명히 봤다. 그들은 몸소 우리를 반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느낌은 뭐랄까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었다.  

 

1991 8월 어느 새벽 미쳐간다는 절박감에, 앞서 걸어가던 동료의 전투화로 시선을 돌렸다. 전투화는 규칙적인 양상으로 땅을 박차고 땅을 디디고 있었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는 형태보다는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시계 초침처럼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입안에 노래를 말아 부르기 시작했다. 무엇으로든 이 패턴을 깨야 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앞서 가던 동료가 나지막히 노래를 따라했다. 평화가 찾아왔다. 세 시간 만에 전나무 숲을 빠져 나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는 마을 어귀의 신작로 가장자리에 널브러져 부대 복귀 전의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기관총을 배낭에서 내리고 디스였는지 청자였는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동료에게 말했다. 같이 불러줘서 고맙다고. 그가 씩 웃었다. 그는 단기 사병이었고 나는 상병 말호봉이었다. 평소 지나가는 인사말 정도를 건네는 사이였을 뿐 그에게 나는 추상 같은 선임 현역병이었다. 나에게 그는? 일과를 시작할 때쯤 사복으로 출근해서 해질 무렵 젖과 꿀이 흐르는 집을 향해 위병소를 나서는 장군의 아들 정도.

 

숙면을 방해한 건 아니야?

노래를 부르니 참을 만하더라구요

 

나도 씩 하니 웃었다. 그랬다. 내 노래에 그가 화답했을 뿐인데, 그의 노래가 고갈된 내 육체의 배터리를 채워 주었다. 전나무 숲을 산책하면서 나는 잠시 착란의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 세상에 나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막막함-착란의 실체였다. 정전 시와 마찬가지로 몸의 에너지 고갈도 칠흑 같은 어둠을 불러왔다. 어둠에 잠긴 전나무 숲은 곧 내 육체의 상태였다. 어둠은 형태를 말아먹고 눈을 멀게 하는 대신 생존에 민감한 귀의 원시본능을 일깨웠다. 귀는 위협이 되는 존재를 재빨리 알아챌 수 있도록 패턴의 부비트랩을 사방에 깔아놓는다. 사물이 지닌 여러 성질 중에서 공통적인 패턴을 귀신 같이 찾아내서 기어처럼 맞물려 놓는 것이다. 초침이 째깍째깍 돌면 싱크대 수도물은 똑똑 떨어지고, 이따금 돌풍이 베란다 창문을 ~ 치고 지나간다.

 

나는 하마터면 전나무 숲에서 익사할 뻔 했다. 나를 살린 건 규칙을 깨는 노래였다. 아니다. 나의 노래에 별 생각 없이 화답해 준 동료였다. 그가 망할 장군의 아들이었냐, 퇴근 후에는 어깨 좀 세우는 망나니였냐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날 전나무 숲에서 하필 그와 내가 나란히 걸었고 내가 노래하니 그가 노래로 화답하였다는 것, 그 또한 우리가 나눈 작은 마음을 열대야를 지새는 날이면 추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뜬금없는 추측만이 쉬 잊혀지지 않을 흐뭇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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