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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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많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떤 마음이 들까?
아니, “나”는 주로 어떤 마음이 들었던가?
지난 6월 서산에서 6기 오프수업을 했다. 수업 이튿날 개심사에서 내려오던 길, 우리는 스승님을 모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굽이진 산길을 걸었다. 그 주 북리뷰 과제가 니진스키의 <영혼의 절규>였던 터라 동성애에 대한 생각들도 우연히 나누게 되었다. 그 이야기 끝에 스승님께서 의미심장한 언급을 하셨다.
“‘다르다’와 ‘틀리다’를 많은 사람들이 구분해서 쓰지 못한다. 즉 ‘다르다’고 이야기해야할 자리에서 ‘틀리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스승님께서 처음 이 말씀을 꺼내실 때만 해도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들었다. ‘두 단어의 미묘한 차이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이어지는 스승님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아주 일관성이 있는 사람이 있다. 시종일관 ‘틀리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 바로 선형이다.”
평소 ‘일관성’을 중요하게, 또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칭찬으로 생각하는 나였지만 이 말씀은 결코 칭찬이 아니셨다. 스승님께서 웃으며 던지신 한 마디를 붙들고 나는 조용해졌다. ‘언제 그랬을까, 어디에서 그런 표현을 썼을까’부터 시작해서 ‘왜 그랬을까, 언제부터 그랬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채웠다.
7월 오프수업 때에도 스승님은 같은 이야기를 하셨다. 다름과 틀림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스승님의 가르침은 듣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 듯 했다. 개심사 이후 이 화두를 마음에 담고 있던 나에게도 깊이 되새길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되었다.
나와 시어머니의 관계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큰 트러블이 없는 관계이고 서로서로 조심하는 사이라는 말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효자이고 다정다감한 편인 남편과 어머니는 주기적인 전화통화를 통해 안부를 전하고 대소사를 의논했으며 함께 할 일정을 맞추었다. 나는 주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내 의견을 보태기도 하고 절충을 하기도 했다. 가끔은 남편이 먼저 결정해 놓고 나의 의견을 듣는 모양새를 취하기도 했다. 나는 때로는 모르는 채, 때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따라가곤 했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직접 전화를 드리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의례적인 안부와 서먹서먹한 몇 마디 이야기를 한동안 거친 끝에 어느새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편한 상대가 가운데 있는 지금의 형태로 자리잡았고 나도 어머니도 만족하는 우리 집만의 의사소통 방식이 되어 버렸다. 신랑도 오히려 더 편안해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자주 놀러오시는 시부모님들도 늘 남편이 집에 있을 때 오셨고 옛날에는 회사일로 요즘은 연구원 생활로 바쁜 며느리를 빼놓고도 자주 놀러 다니셨다. 아주 가끔 며느리는 어디 갔냐는 아버님의 핀잔 아닌 핀잔이 있으셨지만 그만큼 함께 하는 일정을 더 반가워하셨다.
10년이란 꽤 긴 세월이 흐르며, 또 아이들이란 혈연으로 연결되어가면서 점차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은 강해졌지만 그 시간의 깊이만큼 어머니와 나의 관계가 깊어지지는 않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정말 깊어지기 위해서는 시간외에 다른 것도 필요했다.
속마음을 툭툭 편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두 사람의 성향 탓도 물론 있겠지만 또 다른 무엇이 있었던 듯하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점차 알 것 같았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결심할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있었다. 스스로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던 나는 결혼할 사람에 대해서 몇 가지 확고한 기준이 있었고 내 생각과 달랐던 사람과 헤어진 적도 있을 정도로 이 기준들은 나에게 아주 중요했다. 참으로 다행히도 이러한 생각들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비슷한 관심사와 비슷한 선호와 취향, 거기다 내가 원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과의 결혼생활은 비교적 편안했다.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가족이 되어버린 시댁, 특히 어머니는 내가 익숙하던 친정과는 많이 달랐다. 결혼하기 전에 보이던 외적인 상황 외에 크고작은 일을 겪으며 나는 이질적인 환경에 융화되고 섞이기 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의 관점을 고수하는 편을 택했다. 내가 며느리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내 역할을 다했지만 그 외의 것들에는 사실상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물론 나의 울타리를 깨려고 드는 사람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어째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는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평온한 시간이 지났다.
별일이 아니면서도 큰 차이로 느껴졌던 것은 어머니가 음식하기를 아주 싫어하고 외식을 좋아하시는 점이었다. 때로는 겉치레라고 느껴질 만큼 친인척간의 대소사를 중시하는 친정에서, 또 종종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먹이고 또 음식을 들려 보내는 것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시는 엄마와 살아왔고 선생님인 언니가 사돈댁에서 각종 김치와 밑반찬을 가져다 먹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나에게 가족 간의 만남에서도 번거롭다며 외식을 고집하시는 시어머니가 너무도 낯설었고 때로는 이상했다. 김치 담그는 것이야 일상사이고 철따라 각종 엑기스를 내고 메주와 청국장을 띄우고 간장과 고추장을 담그고 두부도 만들어 먹는 조금은 유난스러운 친정어머니가 어느새 나의 ‘어머니’의 기준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자면 깨끗하지도 않고 돈만 든다며 집으로 오라고 하시던 친정어머니와 늘 당연하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는 시어머니가 은연중에 내 마음속에서 비교되었고 그 두 분의 차이는 취향과 선호에 따른 ‘다름’이 아니라 ‘옳음’과 ‘그름’의 차이로 나 혼자 판단하고 구분했다는 것을 이제야 느끼게 되었다.
두 분이 살아온 환경이 달랐고 현재의 상황이 달랐고 장점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만의 잣대로 장점과 단점을 비교하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런 어머니의 딸인 나 또한 음식 만드는 데 솜씨가 없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전혀 없고 이제껏 김치를 얻어먹는 형편이면서 말이다.
그동안 나는 왜 친정에서는 직접 해주시는 맛있는 것을 잘 먹고 또한 얻어올 수 있어서 좋고 시댁에서는 외식을 선호하는 덕택에 설거지며 뒷정리 같은 힘든 일을 안 해도 되고 음식에 관심없는 며느리를 탓하지 않으시니 너무 좋다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을까. 왜 미리 판단하고 선을 긋고 넘어가지 않았을까.
이것이 바로 나의 한계였다. 비단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만이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많은 경우와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동일한 모습이었다. 점차 철이 들면서 부드럽게 표현하고 때로는 내심을 잘 숨기면서 무난하게 지내왔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나의 모습이 결국 나에게 돌아와 스스로 ‘부적응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게 잘 살고 있어 보일지라도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부적응자’.
그 부적응을 혼자만의 상처로 되씹고 싶지 않아서, 그 부적응을 보다 ‘창조적’으로 만들고 싶다는 갈망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 아닐까.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인생의 폭과 깊이를 결정한다는 아픈 진실을 늦게나마 깨달았다.
‘다른 것’을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고 받아들이는 마음, 그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연구원 생활을 한다는 것, 스승님을 모시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은 기존의 나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깰 수 없었던 심지어는 미처 인식하지도 못했던 나 자신의 작은 마음과 좁은 시야와 편협한 생각을 깨고, 실천하지 못하는 수많은 결심들을 하나하나 행동으로 옮겨가는 수련의 과정이 아닐까.
이로써 이 힘든 일 년의 기간이 진정 나에게 또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바꿀 의미 있는 연단의 시간이 될 것임을 굳게 믿는다.

검은색 머리, 검은색 눈동자, 여자아이를 그렸다.
왜 검은색일까... 빨간머리 앤도 있고, 노랑머리도 있었을텐데...
8살 하영에게는 사람이라면 검은 머리가 당연하다고... 굳어져가고 있구나..
유럽에 머문적이 있었다. 경계가 없었다. 국경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곳이었다.
매일매일 다양한 피부, 다양한 말, 다양한 머리, 다양한 눈동자 색깔...
그들에게 하느님의 모습 또한 다양할 터인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모습을 닮았다는 하느님 조차도
백인. 노인, 남자... 왜 하느님 어머니는 안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