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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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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8일 16시 42분 등록

여행을 떠나오면서, 나는 신화를 찾고 싶었다. 그리스에 가면, 아테네에, 올림포스 산에 좀 더 가까이 간다면 그들의 이야기가 좀 더 선명하게 들릴지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인간다운 신들의 이야기, 선생님께선 희랍의 신화가 초인간적인 자연의 힘을 괴물과 귀신으로 묘사한 동양의 갖가지 귀신들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라고 하셨다. 사랑이 있고, 질투가 있고, 더러 분노와 복수도 존재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한 신. 영생할 수 있고, 인간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신. 그들의 존재를 믿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어떨까. 이미 인구의 95%가 그리스 정교를 믿는(즉, 유일신을 믿는) 현재에도 올림포스의 12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여전히 신화는 존재하는 것일까.

 

인천공항을 이륙하면서부터 나는 신들이 정한 몇 가지 금기를 어기기 시작했다.

 

첫째, ‘사람은 날 수 없다’는 금기가 그것이다. 이미 백년쯤 전에 자유를 갈망해오던 인간의 도전 앞에 허물어진 금기였지만, 인간은 버젓이 신들의 눈앞에서 날았다. 중력을 벗어던지고서, 엄청나게 무거운 쇳덩어리가 보란 듯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또 한 번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나는 그 하늘 위에서 신들이나 감상할만한 하늘의 솟은 구름들과 끝없이 뻗어나간 산맥들과 강줄기 그리고 좁쌀만해진 사람들의 집과 도시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수 백 년쯤 전에 하늘을 날겠다는 인간의 무엄한 도전을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라며 불온한 사상을 의심받던 미친 과학자들의 삶들과 그들을 심판하자고 침을 튀기던 수염이 허연 늙은 사제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이 지금 내 곁에 있다면.

 

지중해 어디쯤을 날고 있었을까. 나는 창문 밖 바다 어디쯤에 눈길을 주었다. 이카로스가 떨어진 자리가 어디쯤일까. 하늘을 날았다는 사실 때문에 제 아비의 충고도 잊은 채 깃털을 붙인 밀납이 녹아 추락해버리고 말았던 그 억울한 죽음의 자리. 제 자식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그런 재주를 주신 신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을까. 왜 제 자식을 잃어버린 다이달로스는 신들 앞에 끝까지 침묵하고 말았을까.

 

둘째,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크로노스’의 기다란 낫은 이제 녹슬어 버린 것일까. 우리는 지구의 자전방향과는 반대로 12시간을 거슬러 여행했다. 그리고 이스탄불 공항에 내리면서는 우리가 출발했던 한국보다 6시간을 과거로 간 것이다. 거기에 내린 우리 일행 모두는 최소한 6시간씩 젊어진 것이다.

 

영화 ‘슈퍼맨’에서 이런 상상은 극적인 반전을 끌어낸다. 사고로 죽어버린 애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슈퍼맨은 지구의 자전방향을 잠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되돌아간 과거에서부터 다시 시간을 시작한다. 물론 이번에는 때를 놓치지 않고서 애인을 구해낸다. 발칙한 상상이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리는 스튁스강을 건너 떠나간 애인을 되찾아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모두들 피곤도 잊은 채 조금씩은 젊어진 발걸음들로 이스탄불 새벽 공기를 마셨다. 트랩을 내려오는 서쪽 하늘에 초승달과 별 하나가 선명했던, 그곳은 분명히 터키의 땅이었다.

 

셋째, ‘글을 쓰겠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전부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넘어왔던 금기였다. 개인에게 주어진 육신의 한계를 넘어, 죽고 난 이후에도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가 살았던 이야기들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허물어진 신전들의 돌바닥에 새겨진 낙서에서부터, 미끈한 대리석을 깎아 살아생전 자신들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고, 고급스런 양피지 위에 새겨진 글씨들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이야기를 쓰고 있다. 죽고 없어지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나의 이야기, 나의 삶. 나는 지금 신들의 금기와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 나의 조상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그 본능을 거부하지 못하고 있다. 나 역시 나의 이름 석자 새긴 자서전이 쓰고 싶고, 하늘의 별자리에 폼나게 자리 하나쯤 틀고 앉고 싶은 것일까.

 

우리들의 발칙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바벨탑이 무너지면서, 인간은 뿔뿔이 흩어지고, 제 각기 다른 말을 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서로를 오해하고,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신에게 도전했던 인간에 대한 벌이었다고 전한다. 서로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고, 그것이 또 서로 간에 참혹한 전쟁을 불렀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아폴론과 뮤즈는 인간의 편이었다. 28개국에서 모인 천이백여명은 춤과 음악으로 하나가 되었고, 어설픈 한국어로 ‘사랑해’와 ‘닐리리 맘보’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받았다는 신의 형벌을 잊었다.

 

아폴론 여행사, 사이프러스 은행, 포세이돈 거리, 스튁스강, 아킬레스의 샘 그리고 지금도 지혜의 여신 아테네의 어느 광장을 떠도는 헤르메스의 후예들. 헤파이스토스의 자손들의 손재주가 상점마다 진열되어 있고, 아프로디테의 딸들이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매일 4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였지만, 디오니소스의 충직한 신도들에게 인생은 즐거워 보였다.

 

비록 그들의 신전은 무너지고, 아주 이따금씩만 향이 피어오르고, 더러 땅 속에 묻혀있기도 했지만, 올림포스의 신들은 살아 있었다. 이제 그들이 인간의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 있는 한, 그들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들은 계속될 것이고, 그들의 신화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스의 하늘과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8월의 그리스 땅은 뜨거웠다. 낯선 이교도의 눈에조차 그들은 신과 더불어 자유로워 보였다. 아니, 그들의 신들이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보였다. 어쩌면 이제 신들이 인간의 이야기를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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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08.19 03:34:26 *.129.207.200
여행중에 이런 생각을 하셨군요. 글을 읽어보니, 정말이지 여러군데에서 신화의 의미를 찾으셨네요. 

고생하시면서, 여행하셨는데 소득이 있으시니 다행입니다.

저는 여행 다녀와서,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강박에 또 스스로를 볶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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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08.19 13:42:38 *.236.3.241
진철아, 국방색 모자 잘 쓰고 있냐 ㅎㅎㅎ
이래저래 해서 네 머리를 상전으로 모시게 됐지만
천생연분인 듯이 잘 어울리더라.

전주에서 그 모자 쓰고 다니면 일탈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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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0.08.19 16:08:28 *.221.232.14
응.. 나도 맘에 들어. 기회닿을 때마다 쓰고다닐 생각이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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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9 17:13:09 *.93.45.60
그리스 여행 꼭 하고 싶어지네요. 40도의 불볓이란 말이 좋네요. 전 여름이 따뜻해서 좋은데... 거긴 정말 낙원이군요. 신들과 함께사는 낙원.
진철님의 시각으로 신과 신화를 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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