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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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애 28 - 신탁 1 : 네 자신을 알라 !
그때는 그랬다. 희랍인의 자유와 신에 버금가는 숭고함, 자신의 삶과 닮은 도시 이스탄불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토해내는 오르한 파묵, 연구원 1년 동안 입에 달고살았던 조셉 캠벨의 신화와 마무리해야할 나의 신화....이러한 생각들을 하며 나는 희랍 문명, 오스만 터키 문명에 뒤섞여 나자신을 펄펄 끓여 한번 녹여보고 싶었다. 마침 17년 학교생활을 접어야하는 갈림길에서 한번은 교복도 찢고 밀가루도 뿌리고 친구들의 속마음도 앙케이트 노트에 담아 간직하는 그런 졸업여행의 분위기도 즐기고 싶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곳에서 모든 것을 끝내는 신비한 융합을 고대하기도 했다.
그리이스는 과연 그리이스 다웠다. 나무 그늘도 없이 온통 흰색 대리석위에 조상의 얼을 그모습 그대로 펼쳐놓고 사는 사람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신이 튀어나오고 역사가 튀어나오고, 그 야릇한 문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이미 아는 이야기는 또 다른 목소리로 울려퍼지고, 알지 못하는 이야기는 모두 받아적게 하면서 탐구는 계속되었다. 어딜가나 한번은 그 이름을 들어본듯한 사람이 등장하여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 해대고, BC와 AD의 경계마저 사라져 무더위만 면면히 기억하는 무지한 여행자인 나. 이방인으로서 이방의 대지와 처음만나 내가 느끼는 것은 이 흙과 돌만 남은 땅이 이상하게 밟으면 밟을수록 우유빛으로 반짝이는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돌과 흙과의 만남으로 나의 그리스 터키 여행은 시작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여행을 가기로 결정을 하고 친구와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갔다. 마침 대영박물관에서 가져다 놓은 작품들을 <그리스의 신과 인간>이라는 주제로 전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형 올림포스도 보고 올림픽의 명작들과 그리스인의 삶과 죽음의 의례들을 일별했다. 물론 공부가 끝난 뒤에 박물관 야외정원의 원추리와 능소화를 즐기며 담소했다. 그림을 공부한 친구와 심리학을 공부한 내가 함께 만나는 곳이 바로 자연이니 우리에게는 당연한 귀결이다. 어쨌든 신화와 역사책 몇권을 챙겨들고 벼락공부를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반드시 대청소를 하는 나의 오래된 관습에 의해 며칠동안 바빴다. 이 삼복더위에 대청소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살림을 살아본 사람은 다 알것이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끙끙, 작년 여행이후로 어질러놓은 것을 정리하고 다시 밀짚모자를 챙겼다. 청소는 밤을 새며 진행되었고 결국 떠나는 날에야 겨우 끝마쳤다. 그러니 몸은 지쳤지만 떠나는 기분은 빵빵했다. 어지러움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귀신이 회동하는 자정 5분전에 비행기가 출발하는 것은 야행성인 내게는 익숙한 리듬이다...게다가 12시간 후에는 다시 이스탄불-아테네를 거쳐서 수도원으로 간다며? 그 수도원은 중세의 봉쇄 수도원이었기에 여자들은 바지 위에 다시 치마를 입고, 생살은 가능한한 다 감추라던 경고문도 이미 읽었기에 아예 정장을 하고 떠났다. 그렇게 긴 시간 공중부양을 하고 낯선땅 꼬부랑 글자들 속에서 헤매고 또 비행기를 타고 또 다른 꼬부랑 글자들 속에서 드디어 한국말을 잘하는 한국인 안내자를 만났다. 김순자 선생이다.
창이 깨끗하고 넓은 버스를 타고 마라톤 평원을 지나고 헤라클레스와 디오니소스가 태어났고 오이디푸스가 비극을 겪어낸 테베를 지났다. 다시 한시간을 더가서 파르나소스산을 마주하게 되었다. 해발 942미터에 위치한 ‘아르호바’라는 마을이 나타났다. 빨간지붕에 흰벽, 올리브 나무들, 졸던 눈을 활짝 뜨게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꼬불꼬불 산길 위, 벼랑 끝 세상같지만 여름엔 델포이를 찾는 관광객으로 넘치고 겨울엔 파르나소스 산으로 스키가는 사람들로 붐빈다는 잘나가는 마을이란다. 이곳에서 8km 더가면 우주의 배꼽, 델피가 나온다.
델피는 더웠다. 열에 뜰떠서 반쯤 홀린듯 마음에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다시는 여름에 집을 나오나봐라!” 한때는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게다가 니이체의 정오의 시간을 두 눈을 부릅뜨고 기다려보기도 했었는데...찬양하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태양은 가득히"...이런 날은 아랑 드롱도 반갑지 않다고 나무그늘을 찾아들었으나, 그 넓은 땅 델피를 통틀어 나무는 몇그루 보이지 않는다.
양떼처럼 몰려다니며 차칸양을 하기엔 너무 더워서 그만 길잃은 양을 하기로 했다. 아버지를 잃은 왕따의 슬픔을 노래하며 혼자 신탁을 받으러 돌아다녔다. 아폴론에게로... 퓌티아에게로..... 그리고 박물관으로... 결국은 박물관 앞 카페에서 아이스커피 한모금으로 평온을 되찾았다. "네 자신을 알라...네자신을 알라....네 자신을 알라....." 델피의 신탁은 여행 내내 내마음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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