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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3일 09시 18분 등록
 로고.jpg   심스홈 이야기 12 


 ‘우리 집 거실 이야기’

 

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나, 고등학교 들어가던 해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나는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역사적인 전쟁,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남과 북>이라는 TV 외화 시리즈에 흠뻑 빠져 있었다. 고전풍의 아름다운 의상을 구경하는 것이 좋았고, 장면마다 거국적으로 스며드는 음악에 감동하고, 특히 주인공으로 나왔던 배우 패트릭 스웨이지에 반해서.. TV 속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또 TV 속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눈물 글썽이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나 나의 심금을 울리는 일에는 방해꾼이 있게 마련. 하필이면 꼭 봐줘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시험기간이라는 시험에 들고 말았다. ‘그래, 보고나서 더 열심히 해야지’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시간에 맞춰 미리 숙제도 해놓고, 더 열심히 공부할 계획도 세워두고, 화장실도 가두고,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방영 시간이 되자 나는 마루로 나갔다. 그런데 나를 보신 아빠께서는 대뜸 ‘너 공부 안하고 왜 나왔냐’를 시작으로 ‘시험이 낼 모랜데 TV 볼 정신이 어디 있냐, 너 공부 그따위로 할 거야, 형이 그러니까 동생들이 따라하지. 당장 들어가라’며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러고서 아빠는 거실 소파에 편안히 누워 <남과 북>을 눈물 훔치며 보셨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아빠가 TV를 보는 동안 그 소음이 고스란히 들려와 나의 학업에 막대한 지장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공부하나 봐라’ 시험이고 뭐고 갑자기 모든 게 하기 싫어졌다. ‘내가 부모가 되면 저러지 말아야지. 자식의 깊은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부모가 되어야지’ 아빠의 깊지 못한 행동을 보면서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교훈을 마음에 새겼다. 아, 그건 그렇고 왜 재밌는 드라마나 결전의 그 날(국가간 대항 스포츠)은 꼭 시험기간과 겹쳐서 잠자고 있던 나의 얌전한 승질을 건드리는 걸까 ㅎ




의자만큼 위계질서가 분명한 가구도 없다고 하는데.. 우리 집도 그랬다. 커다랗고 기다란 가죽 소파는 언제나 아빠 차지였다. 우리 집 마루(우리 집에선 거실을 마루로 불렀다) 한쪽 벽면에는 아빠의 옥좌라 불리는 3인용 가죽 소파가, 베란다 쪽에는 나무를 구부리고 가공해서 만든 1인용 등나무 소파가 자리하고 있었고, 아파트에 살면 하나쯤 없는 집이 없었을 정도로 유행했던 바로크적(?)으로 생긴 바로크 장식장과 그 위에 TV가 한대 놓여 있었다.


우리 집은 누가 부르지 않아도 저녁이면 주말이면 하나둘씩 거실로 모였다. 온 가족이 거실에 나와 TV를 보거나 음식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있었던 일이며 자기 생각을 얘기하느라 대화는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TV를 볼 때도 그냥 말없이 보는 게 아니라서 늘 시끌벅쩍했다. 책을 읽고, 신문을 보고, 서로 대화를 많이 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저 푸근했던 것 같다. 온 식구가 거실에 모여 있다가 먼저 피곤해진 사람이 그 자리에서 꾸벅거리다 잠이 들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하나둘씩 ‘아빠, 들어가서 주무세요’ ‘야아, 들어가 자자. 이제 자러 가자’ 면서 다같이 일어나 헤어지곤 했다. 우리 집 거실 풍경은 늘 그랬다.


그래서인지(?) 솔직히 나는 거실에서 TV를 치우고 서재로 꾸미는 방식은 별로다. 3인용 소파 하나와 테이블(때론 없어도 된다), TV 수납장만으로 심플하고 깔끔하게 꾸민 거실, 그러니까 거실의 가장 흔한 구성인 소파+TV, 그리고 여백, 그 여백을 가족의 웃음과 훈훈한 온기로 채워가는 거실이 나는 제일 좋다.


그러나.. 거실에 나오면 습관적으로 TV를 틀어놓게 되고, 푹신한 소파에 누워 하루 종일 TV 리모콘만 돌리는 경험을 무수히 반복하고 난 뒤 거실에서 과감히 TV와 소파를 치웠다는 분들도 많다.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고 다른 무언가를 시도해 볼 생각조차 들지 않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은 아이들 공부 때문에 거실에 TV를 두지 않는 경우도 많고, 거실에 서재의 기능을 더하고, AV시스템과 오디오를 들여 놓아 가족 개개인의 취미를 한 데 모을 수 있는 공간으로 다양하게 꾸미기도 한다. 가족 구성원의 필요에 따라, 취향에 맞게, 공간을 활용하는 것은 참 똑똑한 아이디어이자 빛나는 생활의 지혜라는 생각이다. 단 거실을 서재로 꾸밀 때 천정까지 닿도록 거창하게 만들어서 각종 전집과 백과사전으로 가득 채운 책장은 반대다. 좀 나지막한 책장을 들여놓으면 공간에 숨통도 트이고 아이가 책을 골라 보거나 제자리에 정리하기도 쉽다. 책도 각자 취향대로 꽂아두고 개인 소품도 진열해 두면 자연히 모두의 거실, 모두가 모이는 거실이 될 수 있다.


그동안 이건 좀 아니지 싶은 거실 구경을 많이 했다. 돈 많이 들여 천정에까지 닿도록 거창하게 만들어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으로 가득 채운 책장뿐 아니라 벽면을 가리는 대형 TV나 AV 시스템 같은 것을 놓기 위해 과도하게 치장한 장식장이라는 괴물, 거실에 주인처럼 들어앉아 있는 거창한 소파 세트, 굳이 없어도 될 듯한데 가구와 소품으로 가득 채워놓아 마치 가구 전시장처럼 되어버린 거실들 말이다.


큰 소파세트로 거실이 가득 차 있다면, 그 때문에 답답함을 느낀다면, 그 중에 한두 덩어리를 과감히 없애기를 바란다. 소파는 꼭 풀세트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3인용 하나만 놓을 수도 있다. 둘이서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쿠션 세트, 그러니까 간이식 짝퉁 소파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 이런 것을 사용하는 것도 무지하게 센스 있어 보인다.


또 소파를 놓을 공간이 있더라도 굳이 소파 형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소파 하나만으로도 거실이 꽉 차 부담스러운 경우를 많이 보았다. 차라리 없애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여름에는 대나무자리, 겨울에는 파일이 짧은 카펫이나 러그를 깔아 놓고 아주 커다란 테이블을 거실 중앙에 과감히 배치하는 거다. 소파가 없는 마루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서류와 책을 쌓아두고 노트북을 켜 공부를 할 수도 있다. 또 한켠으로 치우면 나란히 누워 뒹굴며 책 읽는 편한 거실이 될 수 있다. 집집마다 크고 넓은 테이블을 하나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마 가족의 꿈도 커지고 사이도 깊어지고 마음자리도 넓어질 것이다.


식탁은 주방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집안 가구 배치가 한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공간 활용도도 높아진다. 주방이 협소하고 거실에 좀 여유가 있어 거실 창가 쪽으로 식탁을 끌어냈더니 다이닝룸이라는 느낌보다는 가족을 위한 또 하나의 거실처럼 느껴졌다.


대부분의 거실 꾸미기는 TV와 소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만 거실의 주인공인 가족들의 필요를 고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주로 편안하게 책을 볼 것인가,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으로 쓸 것인가, 가끔 식사를 하기도 할 것인가, 또 하나의 작업 공간으로 활용할 것인가, 가족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변을 모아 꾸미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나는 집을 꾸밀 때, 어떤 형식이나 장식으로 가득 채우지는 않는다. 공간이라는 것이 가족 구성원들의 편리에 따라, 집주인의 취향에 맞게, 속편하게 모양도 변하고 씀씀이도 변해가는 것이 좋을 듯해서다. 필요한 것만을 두고, 가급적 여백을 남기고, 손을 쓸 수 있는 빈 자리를 남겨 두어서 집주인이 살아가면서 천천히 그것을 채워가고 바꾸기도 하는 재미를 느끼도록 해 주고 싶다. 너무 지나치게 거실을 장식하려 애쓰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집이 반짝거리는 것이 좋긴 하지만 먼지 하나 없이 쓸고 닦아서 아이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도 좀 아니라는 생각이다. 집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거지 사람이 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거다. 나도 예전엔 화려한 것이 눈에 더 들어오고, 반듯한 것이 마냥 좋았는데 나이 들어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거실은 꼭 이래야 한다는 편견만 없어도, 고정관념을 버리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편하게, 예쁘게, 게다가 편리하기까지 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남의 시선과 평가를 신경쓰지 말고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데만 집중해 꾸미면 우리 집 거실은 훨씬 즐겁고 유쾌한 공간이 될 수 있다.


오디오룸 만들어 고상하게 음악 듣고, 홈 시어터 갖춰서 멋있게 영화보고, 사방이 책으로 둘러싼 지적인 공간에서 책을 읽는 그럴싸한 거실 풍경, 우리 집에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 와서 없는 장면 만들어 낼 수도 없고, 그저 모여서 TV보고, 이야기 나누고, 맛있는 거 먹고, 오후가 되면 서서히 따뜻해져 책을 읽다 낮잠 자기 좋은 소파가 있고, 그래서 제일 편한, 이게 바로 우리 집 거실의 적나라한 표정이다.


‘한 사람의 얼굴이 그 사람을 드러내고 숨기는 것처럼 한 집안의 거실은 그들의 삶을 보여주고 또 감추기도 한다’  어느 책에선가 보고 혹시나 해서 적어놓은 글귀인데.. 집이란 역쉬 ‘집주인의 작품’이란 TV속 어떤 프로그램에서 어느 전문가가 한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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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0.09.03 12:36:04 *.131.127.50

'집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거지 사람이 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집은
머무는 시간이 아주 짧은 집,
하지만 얼마나 오래 머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머무는 동안이 느낄 수 있는 편안함, 안전함, 같은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집을 가꾸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됐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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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5 23:05:31 *.40.227.17

백산 오라버니~ ^^

늘.. 하던 일이라.. 일에.. 좀 식상해 있었거든여..
근데여.. 집에 관한 이야기하면서.. 다시금 느끼고..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 거이가 있는 거 같아여..
아적꺼정은.. 말로 글로 표현하기에는.. 무쟈게 딸리는 저의 깊이..ㅎ

그래두.. 분명한 건.. 일이 점점 재밌어지고.. 다시 흥분되기 시작했어여..
좀 힘에 부칠때도 있는데여.. 그저 감사한 마음이에여.. 더 마음 써서.. 잘 해야 겠어여..^^

요즘 좀.. 버거웠는데.. 오라버니.. 힘 주시는 말씀에.. 불확이 에너지 충전 만땅! 했어여..
무쟈게 감사드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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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9.03 22:19:31 *.67.223.107
불확아 역쉬 그대는 불을 확 질러....
가구 배치를 바꾸고 싶게하고
또 턴테이블을 질러버리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솟아나게 하는구나.

고마, 진공관 앰프로 질러버릴까?
"집주인의 작품" 이라.... 고마,  사는것 같이 함 살아볼까?... 우히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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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5 23:12:38 *.40.227.17

좌샘~ ^^

좌샘께서.. 승질을.. ㅋㅋㅋ
진공관 엠프.. 설마.. 직접 조립.. 만드시겠다는 거이는 아니시져.. ^^

턴 테이블.. 축음기 말씀하시는건가여ㅋ.. 오호~.. 넘 분위기 있으세여.. ^^
전 턴 테이블하면.. La Vie En Rose 가 떠올라여.. 루이 암스트롱 아저씨의 목소리가 받쳐주는..
이 음악은 왠지 LP로 들어줘야 할 것만 같은.. 포도밭 나오는 영화 OST로 대신하구 있어여.. ㅋㅋㅋ

제가 음악 좀 좋아하긴 하는데여.. 뭐 거창하게 그런 형편은 못 돼서여..
지금은 티볼리 오라디오가 대신하고 있는데여.. 소박하니.. 얘가 참 괘한아여.. 정이 마니 들었어여..^^
황인용 아저씨.. 헤이리에서 음악실 아직 하고 계신지 모르겠어여.. 여기 추천해 드려여..

선생님의 구여운 댓글에 유쾌하고.. 정담은 마음.. 느껴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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