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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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맞은 지 벌써 한 달이 되었다. 미끈거리는 아파트 베란다에 큰일을 보는 대신 흙에다 발톱을 박고 일을 보는 쾌감을 즐긴지 며칠이 지났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무언가 계획하고 오늘부터 꼭 해봐야지 마음먹으면 벌써 잘 시간이다. 마음먹은 일은 내일의 새로운 계획이 되고 만다. 늘 실행하지 못한 계획은 나를 불안하고 또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가는 시간들은 어스름한 해질녘 엄마 손을 놓친 채 골목길을 기웃거리는 어린아이 마음과 같았다. 집 뒤편에 있는 푸른 벼들은 마치 폴짝 뛰어내리면 팔을 벌려 나를 안아줄 것만 같았다. 잃었다 만나 꼭 껴안은 엄마 품처럼 말이다. 드넓은 초원같이 보이는 곳이라 마구 달려보고 싶다. 하지만 엄마는 늘 너는 거기서 뛰어내리면 다친다고 위협을 주니 바라 볼 수밖에……. 데크에 앉아 푸른 논을 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의 편안했던 보금자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환경 때문에 어찌해야 할 줄 모르고 지난 시간들이었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에 영역표시를 해 놓으면서 이제서야 ‘이곳이 내가 살 곳이구나!’ 하며 적응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 온 것 같이 느껴졌다. 이곳이 내가 살아갈 곳이고 살아야만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나만의 명상의 시간이었다.
요즘 나의 의지에 관계없이 조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집의 구조를 따라 많은 층계를 오르내리다 보니 무릎도 삐거덕 거린다. 내 나이는 사람으로 치면 중년을 지난 시간이다. 온 몸에는 검버섯이 피어 백설기 같았던 나의 미모는 젖소처럼 바뀌었다. 눈썹에 서리가 내린지는 꽤 되었다. 어금니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딱딱한 사료를 아그작 거리며 씹어 먹는 일이 힘들어졌다. 처음에는 변하기 시작한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지기 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손님이 와서 너무나 기뻐 팔짝 팔짝 뛰고 나면 금세 숨이 차 오른다. 오랜 대화에 끼지 못하고 앉아서 졸기 일쑤다. 마음도 하루에 몇 번이나 가라앉아 이를 끌어올리기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세월이 만들어 놓은 흔적들은 거울보기 놀이와도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래도 나는 나만의 삶을 살아온 싹싹한 개였다. 인간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도움을 주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감에도 야생동물의 고유한 모든 능력을 발휘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 개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나의 모습을 많이 잃은 것 같다. 마치 집안에 들어와 며칠째 나가지도 못하고 기운을 잃은채 겨우 날고 있는 파리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이런 나의 모습에 정이 떨어진다. 자신이 싫어하는 나를 누가 좋아해 주겠는가. 나를 스쳐간 많은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그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의 변해가는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또 앞으로 살아갈 맛도 나는 것이다. 역시 명상의 시간은 나를 돌아 볼 수 있는 시간과 이로인한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바뀐 환경이 몸의 습관을 따라주지 않아서 일까? 요즘 유난히 피곤했다. 몸을 위해 게을리 했던 스트레칭을 했다. 엄마가 하는 걸 유심히 보아왔기에 할 수 있는 자세였다. 엄마는 이 자세를 요가에서 ‘고양이 자세’ 라며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내가 하면 ‘개 자세’가 된다. 뒷다리에 힘을 줘 쭉 뻗고, 머리를 숙인 채로 엉덩이를 높이 들어 어깨 근육을 단단히 끌어 당겼다. 그런 다음 머리를 들고 엉덩이를 내려 척추와 뒷다리를 폈다. 긴장이 발가락까지 고루 퍼져나가도록 뒷발을 주먹처럼 모아 쥐는 동작까지 하고 나니 몸이 시원해졌다. 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자세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하는 운동이 나의 몸에서 쓰지 않았던 근육들을 깨웠다.
방울이와 잘 지내다가도 그녀의 생생함을 보면 이내 질투심으로 마음이 울적해지기도 한다. 그녀는 밥도 우적우적 잘 씹어 먹고 층계도 날아다닌다. 몸에 기름이 흐르고 매사에 자신감이 너무 넘쳐 가끔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무언가 실수를 하더라도 도전해 보는 방울이의 용기가 부럽다. 뭐 항상 결론은 ‘나도 왕년에 그랬네요. 너도 얼마 안 남았어. 시간이 너를 곧 그리로 데려다 놓을 거야. 세상은 공평하거든’ 이런 생각을 하지만 그러다보면 내 몸과 마음이 더 망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흠칫 놀라기도 한다. 마음을 예쁘게 먹어야지. 몸과 마음을 관리 하고 경영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도 않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인데 말이다. 데크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을 맡겼다. 그 바람은 나의 마음을 데리고 벼에도 내려앉았다 나무에도 걸쳐 있기도 하고 또 자유롭게 날아 다녔다. 마음을 쫓아다니다 보니 나지막한 동산이 감싸 안고 있는 높지 않은 산도 보였다. 많은 비 때문에 논으로 물을 대는 수로를 타고 힘차게 달려가는 물소리도 들렸다. 순간순간 마음의 방향을 잃을 때 명상은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나의 마음을 걷어 들여 제자리로 데려다 준다. 밥을 제때에 먹을 수 있어 감사하고, 비를 맞지 않고 잘 수 있어 감사했다. 나를 보살펴 주는 엄마와 친구 방울이가 있어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운 듯한 느낌은 정신의 탄력을 유지해주는 것 같아 기분 좋은 하루였다.
(데크에 조용히 앉아 마치 명상하고 있는 듯한 우리 집 강아지 오리오를 보며 그의 입장에서 컬럼을 구성해 보았습니다.)

가정은 쓸데 없는 시간놀이라고 한다. 그래도 웬지 그녀를 생각하면 '가지 않은 길'이 떠오른다.
그녀가 가지 않은 길에 섰다면
미코노스의 골목길에서 만난 똥강아지는 배는 불렀을지언정
어제보다 오늘이 미혹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가지 않은 길에 섰다면
태풍 곤파스는 설계도면위의 콤파스로 기억될지언정
당진의 두메산골 하늘 위를 용케 피해갔을까
모를 일이다
그녀가 나무 데크에 앉아 애견 오리오와 한가로이 저녁 나절을 보낼 때
운명의 여신이 그녀의 빈구석을 놓치지 않았음을 그녀는 알까
그녀는 알 것이다
오리오의 끈적한 콧잔등에 이어 멍한 눈빛을 따라 그녀를 스친 돌개바람이
어제의 바람이 아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