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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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가난한 자의 행복
가난하다는 것은 좋은 것일까.
돈이 없고 재산이 없다는 것은 소유하고 집착하고 더 많은 욕심을 내려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데 돈이 없고 재산이 없다고 해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돈이 없고 재산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지구의 절반이고, 대물림 되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원망하지도 못하고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21세기인 지금도 있다. 그들에게 ‘돈이 없고 재산이 없는 삶’이 자유로운 삶이라고,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일까. 행복은 육신의 삶에 있지 않고, 영혼의 구원은 이승의 삶에도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왜 이 잔인한 형벌의 땅에 보내진 것일까.
욕망은 죄악罪惡인가.
더 멀리까지 더 빠르게 달리고 싶은 자유, 평원을 내달리는 무소의 무리를 보면서 사람들은 자동차를 꿈꿔오지 않았을까. 하늘을 나는 새. 저 푸른 창공에 몸을 내던지고도 죽지 않을 수 있는 삶이 있다면, 그 새를 닮고 싶어라 하는 사람의 욕망을 죄악이라 부를 수 있을까.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그런 꿈을 이뤘고, 보수적인 사람들은 그것마저 죄악이라고 신에 대한 도전이라며 얼굴을 붉혔다. 채 백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다. 지금도 자동차와 비행기가 인류의 악이고, 신에 대한 불경한 도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욕망이 죄악이 아니라면, 그것이 지금의 인류를 만들어 온 원초적인 힘이었다면. 또 다시 묻는다. 그것은 선善인가. 그 욕망의 결과가 부른 잔인한 결과들 또한 우리가 부정할 수도 외면해서도 안되는 현실이다. 더 가지려 하고, 더 누리려고 하고 그래서 빼앗으려 하고, 안되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신이라는 이름으로 광란의 전쟁마저 서슴치 않는 그 역사와 현실 앞에 욕망이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욕망은 죄악도 선도 아니다. 그냥 욕망일 뿐이다.
돈과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나은 이들이 있다. 스스로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 남의 꿈과 자유, 우리를 둘러 싼 세계와의 공존을 생각지 못하는 이들에게 재산은 병이 될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 재산은 없는 것이 낫다. 본인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한자漢字로 ‘가난하다’라는 말이 ‘가난할 빈(貧)’이다. 글자의 의미를 보면 거기에 담긴, 그 글자를 만든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가난하다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나누는 것이다. 한 때 화폐로 쓰였던 ‘패(貝)’는 부와 재산의 상징이었다. 그 부와 재산을 나누는 것이 가난한 것이다. 시장 경제 속에 살면서, 없이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대로 산다고 믿는 사람들을 간혹 만난다. 그들은 성경에 적힌 말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라든지, ‘가난한 자는 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을 즐겨 인용한다.
가난하다는 말의 의미. 결국 나누는 것이다.
돈은 날개다. 돈이 없으면 사람은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하지 못한다. 돈이 있으되,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 재산을 나눌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지금도 굶주리고 있는 지구의 절반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면, 그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가난한 것’이 아닐까. 그런 삶이야말로 천국으로 가는 1등석을 내어주어야 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통장의 잔고를 보며, 오늘 나는 가난한 삶의 아름다움을 묻는다.
세상이 내게 묻는 것처럼,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를 먼저 따져 묻는다.
이미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천인데도, 그들의 삶을 보지 못하고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아직도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