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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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해 보면 나는 자의식이 깨어 있지 않은 卵 상태였다. 공부는 해야 했고, 학교는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왜’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못했다. 그냥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 갔다. 어머니의 반복된 입원이 마음에 불안의 씨앗을 심었고 평온한 일상이 지속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생체 시계가 작동했다. 내가 아는 세상은 너무 좁고 그 너머의 세상은 낯설고 두려워 나는 경계 밖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였다.
(Me Story 중에서)
내 친구, 드가에게
나 기억하겠나. 자네의 둘 도 없는 친구 빠삐라네^^
야자수 열매로 뗏목을 만들어 바다로 뛰어든. 친구의 죽음을 말리지 못한 죄책감에 자네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지던 모습이 생생하구만.
시간이 제법 흘렀군. 이 세상의 기준으로 따지면 정확히 10년 1개월 3일이 지났어. 여기가 어디냐구. 지옥은 아니라네. 베네주엘라야. 내가 수도원에 몸을 맡겼던 콜롬비아와 인접한 데지. 나를 뼛속까지 배신한, 망할 수녀원장 덕분에 세인트 요셉 감옥으로 끌려가 5년을 허송 세월 했지.
야자열매 자루로 얽기 설기 엮은 뗏목을 보고 자네가 그랬지.
“자네 죽을 거야. 그거 알아?”
자네 말대로 거의 죽다 살았지. 첫 날은 햇볕에 타서 죽는 줄 알았고 둘째 날에는 풍랑과 스콜을 만나 익사할 뻔 했지. 칠일 밤낮을 헤맨 끝에 작은 어선에 발견되어 여기로 흘러 들게 되었다네. 어선에 발견되기 직전에 꿈인지 생시인지 나비를 보았네. 동양에서는 이런 꿈을 호접몽이라고 한다지. 하여간 가슴에 문신한 나비가 몸을 떠나 내 눈가를 어슬렁거렸네. ‘갈 때가 됐나 보다’라고 생각했지. 헌데 고 놈의 나비가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듯 하더니 휭 하니 날아가는 게 아닌가. 나를 구조한 어부의 오른 팔뚝을 보니 나비 문신이 있더라구. 색깔이며 모양이며 내 문신과 너무 닮아 깜짝 놀랐지. 난 나비가 나를 구했다고 생각하네.
여기서의 생활은 그럭저럭 지낼 만 하네. 처음엔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서 금 광산에서 광부로 2년을 보냈지. 기력이 회복되니까 왕년의 기질이 근질근질 살아나더군. 노름에 손을 좀 댔지. 내 인생 자체가 도박 아니었나. 전당포에서 돈을 조금 빌렸다가 나중에는 은행장을 만나러 갔다네. 뻣뻣하게 굴길래 한적한 시간에 은행 돈을 잠시 빌려왔다가 감옥살이를 또 한 2년 했지. 출소 후에 작은 호텔에서 지배인으로, 요리사로 지내다가 얼마 전에 일을 놓았다네.
섬을 탈출하고 변한 건 그리 없네. 말했다시피 지난 10년은 평범하게 지지고 볶는 인생이었네. 인생을 낭비한 죄를 통감하고 또 다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살아온 관성이란 게 참 무섭더군. 어쩔 때는 인생이란 게 반복되는 패턴으로 이루어진 감옥 같다는 생각을 한다네. 창살 대신에 패턴으로 사람을 죽여 놓는 거지. 눈 앞에 창살이 보일 때는 어떡하든 그것을 뚫고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보이지 않는 창살하고는 어떻게 싸워야 할 지 참 난감하더군.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자유를 얻었는데 정작 내 안에는 자유가 없더라고.
어느 날 느릿느릿 돌아가는 천장 선풍기 아래서 시큼한 맥주를 빨며 TV를 보고 있었지. 인도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하얀 소가 지나가니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길을 비껴주더라고. 소에게 길을 양보하는 사람들의 경건한 표정이 웃겨서 한 동안 킥킥거렸네. 그러다가 한 번 제대로 사레가 들렸지. 인도사람들에게 소는 神과 진배없는 존재야. 소가 떡 하니 버티고 있는 한 가던 길을 멈추거나 돌아갈 수 밖에 없겠더라구.
문제는 돌아가면 핵심을 놓친다는 거지. 자유가 그리우면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하는데 애꿎은 간수를 욕하거나 나의 무죄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원망한다는 거야. 물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일이 쉬운 건 아니야. 그 날 절벽 아래서 아가리를 벌린 채 나를 노려보던 파도를 떠올리면 아직도 속이 울렁거린다네. 자네의 얼굴과 넘실대는 파도가 겹쳐지면서 평온한 저녁나절이 악몽으로 바뀌어 버렸네. 토악질이 났네.
며칠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해변을 거닐었네. 드가, 자네의 얼굴이 바다 너머에서 고향처럼 달려오더군. 육체의 자유를 얻었을지언정 마음의 자유가 나에게 없음이 고통이었네. 나는 나에게 무고한 살인죄를 선고한 검사를 증오했네. 젊고 뜨거웠던 나를 이빨 빠진 늙은이로 전락시킨 감옥의 폭력에 절망했네. 무엇보다 자유에의 동경을 주었을 뿐 자유를 담아낼 시간을 빼앗아간 세월을 저주했지. 분노란 엎질러진 판을 스스로 수습할 엄두가 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두려움임을 알게 되었다네.
드가. 지금 이 순간 자네가 너무 그립군. 그 절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갈라섰지만 자네를 생각하면 평온함이 바람처럼 밀려온다네. 나는 자유의 바람 뒤에 숨어 나를 옭아매온 '두려움'이란 소를 죽이려 하네. 이제서야 알겠네. 자네는 그 소를 진작 알고 있었던 거야. 지쳐서가 아니라, 굳이 험난한 모험을 택하지 않아도 되었던 거지. 자네는 그 소를 얼렀던 거야. 바람과 함께 자네의 등을 떠밀 수 있도록 자네 편으로 만들었던거야.
다시 절벽 위에 섰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진정한 자유를 맛 보기 위해 놈의 멱을 단숨에 따려 하네. 끈적끈적한 피가 흐르고 있을 녀석의 경동맥을 찬찬히 살펴 보고 있네. 규칙적인 맥박에 맞춰 나의 심장이 조응하고 있음이 느껴지네. 몇 날 몇 일을 새워 칼은 벼려 두었네. 자네와 해후하는 날, 우리의 자유도 해후하기를^^
※ 동기 연구원 신진철이 추천한 영화 「빠삐용」이 칼럼을 구성하는데 주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밝힙니다.

"Hey, Bustard.. I'm still Here"
시간이 되었다. 일곱번째 파도를 타야한다.
그가 끝내 망설이는 루이를 남겨둔 채,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
그는 새가 되었다. 세차게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는 파도 속으로 그가 몸을 던졌다. 미리 던져둔 코코넛 덩어리를 붙잡았다. 그 좁디 좁은 뗏목에 목숨을 의지한 채로, 그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마지막 한마디.
"Hey, Bustard.. I'm still Here"
Finally, he could live free man.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함정이었다. 간수와 포상금을 노리는 인간 사냥꾼들에게 탈옥과 자유를 꿈꾸는 죄수들은 불나방처럼 여겨졌다. 이미 잘 짜여진 각본대로 그들이 걸려들뿐이다. 돈을 건네고, 적당히 쫒기는 척 탈옥을 감행하고, 총을 쏘지만 맞지는 않는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것은 함정이었다. 강자락 끝에 도달한 일행에게 잔금을 받고 허겁지겁 자리를 떠나는 간수. 이제 먹이감을 풀어 놓았으니 다음 몫은 인간사냥꾼들의 차지다. 또 속았다. 배는 밑창에 구멍이 났고, 루이의 발목은 부러졌고, 더는 어디로 가야할 지 세상의 끝에 내팽개쳐졌다.
첫 번째 탈옥시도에 2년의 독방, 루이의 코코넛 선물이 발각되면서 불지 않으면 빛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서서히 죽어갔다.늘 다섯이면 돌아서야 했던 좁은 독방은 열걸음이 되어갔다. 어금니가 통째로 뽑히면서 그는 살고 싶어졌다. 눈물나게 살고 싶었다. 간수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살지 못하였다. 루이의 이름 적힌 메모지를 끝내 씹어 삼키며 돌아선다.
두 번째 탈옥에서 잡혀 돌아온 빠삐, 그는 다시 5년의 시간을 보내고.. 햇볕아래서 기침한 번 남기고 죽어가는 동료의 눈을 감긴다.
'Pappi...I am free...'
그의 육신이 상어들에게 보내어진다.
그리고선 그는 끝내 죄수들의 막장, 악마의 섬까지 흘러든다.
더 이상 희망과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악마의 섬, 간수들이 있을 필요조차 없다. 자유. 평등, 박애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국기만이 영화의 뚜렷한 배경으로 삽입된다.
조국 프랑스에 빚을 갚았다고 말하는 검사 .. 씨벌놈...
믿고 찾아들어간 수녀원조차도 그를 외면하였다.
끌려가는 그에게 원장수녀가 말한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의 말처럼 그대가 무죄라면, 하느님이 함께 하실겁니다. ...씨벌년..
함께 가자고 루이에게 말한다.
루이는 허둥지둥..
빠삐.. 나 할 말이 있어.
너는 죽게 될 거야.. 가지 않을래
그는 루이가 이미 무슨 말을 망설이고 있는지를 안다.
또 다른 코코넛 뗏목을 절벽위에 남겨둔 채, 돌아서는 더스틴 호프만..
파란 바다와 하늘 속에 한 점이 되어가는 스티브 맥퀸...
좆같은 세상...
야이..씨벌놈들아..
나 아직 살아 있다. 이 개쉐끼들아....
내가 왜 그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지...
스티브 맥퀸, 더스틴 호프만... 영화 빠삐용
주제가 Free as the wind...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영화 속 더스핀의 말처럼 스티브가 먼저 죽었다. 영화밖에선)
* 지난 번 상현의 칼럼 '미션'을 보고서.. 나는 '빠삐용'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꼭 줄 사람이 생길거라 믿고, DVD 하나를 더 샀다.
* 댓글 내용 중 다소 점잖치않은 용어는 극중 대사의 일부 또는 독백이 된 부분이므로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