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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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 ‘히로마쓰스다에償’에 숨겨진 비화秘話
2002년 6월이었다. 전주에서는 ‘제3회 지방의제21 전국대회’가 열렸다. 코아호텔에서 진행된 폐회식 행사에서 김보금 처장님이 잠깐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염태영 처장님의 말을 전하면서, 강살리기 단체들간의 무슨 연대조직을 준비하고 있고, 일본 강의날대회에 참가자격을 받을 국내 사례 5개를 공모하고 있다고 했다.
“전주천도 한 번 해보면 어때? 잘 됐잖아? 나중에 잘되면 내 공 잊으면 안 돼?”
염처장님께 여쭈었더니, 실무를 맡고 있는 ‘환경정의’라는 단체의 ‘김미선’이라는 사람의 연락처를 적어 주셨다. 전국대회가 끝나고, 기념사진들을 찍고 난 사람들은 다시 자기들이 떠나온 곳을 향해서 돌아갔다. 당시 시민행동21 환경팀장으로 일하던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연락처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틀 밤을 꼬박 세워서 보내준 양식에 맞추어 내용을 정리하고, 사진을 인화해서 덧붙여 보냈다. 며칠 후, 참가자격이 주어졌다는 결정을 통지받았다. 일본대회의 일정과 준비물, 발표를 위해 준비해야 할 패널 2개까지. 당시 시민행동21 대표를 맡고 있었던 이광철 前국회의원과 김윤덕 前도의원과 논의를 했다. 좋은 일이었다. 굳이 상까지 바랄 것은 아니었지만, 중국과 대만 등 아시아의 주요 국가들이 참여하는 행사에 전주천의 사례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참가비용까지 지원을 해주는 조건이어서 영세한 지역 활동가로서는 더없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TO가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전주천의 사례가 값진 것은 시민단체들만의 노력이 아닌 ‘전주자연형하천조성민관공동협의회’의 성과인데, 시민단체만 참가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 같아 보이기도 했다. 협의회의 공동의장인 김완주 시장님을 만나 협의를 해 볼 문제라고 판단했다. 김윤덕 대표가 총대를 매고, 내가 함께 배석을 했다.
처음 들어가 보는 시장실, 이전 손님을 배웅하고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양 팔을 벌리면서 환하게 맞는 그의 모습이 긴장을 풀어주었다. 일일이 악수를 하고, 자신의 책상 앞 테이블로 안내를 했다. 원탁의 테이블이었다. 원탁... 굳이 어디를 앉아야 할 지 정해진 자리가 없었다. 격의없는 대화를 하겠다는 뜻인가. 손님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했던 그 원탁의 테이블에 이도연 하수과장님과 이호범 담당자가 같이 배석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대강 들었겠지만 그는 김윤덕 대표의 대략의 상황을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서는 손바닥을 한 번 치고 비비면서 ‘자, 축하할 일인데, 제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내가 바통을 받아 말을 이었다. 민관거버넌스의 성과이므로, 이번 기회에서 행정에서도 같이 가면 배울 것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일본의 하천정책은 우리보다 약 20년 정도 앞서 있어서 두루 좋은 기회가 될 것이며, 민관협치의 성과가 많은 점도 장점이라고 했다. 그가 담당 과장에게 ‘그렇게 하자’고 말을 하면서, 예산담당자에게 따로 얘기를 해둘테니 많이 좀 배워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대표님도 함께 가시지요. 좋은 기회인데’
김윤덕 대표가 살짝 당황을 했다.
“저희가 여기 온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직접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우선해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한 번 더 권하더니, ‘허허’ 웃어 넘긴다. 그런 기회가 생기면 항상 대표들이 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시장의 입장에서는 그런 관행을 존중해서 건넨 인사였고, 김대표 입장에서는 그런 관행에서 벗어나자는 메시지였다고 읽었다. 아마도 시장에게는 이런 젊은 김대표의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전주시에서는 ‘이호범’주사가 가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담당 과장도 이미 시장면담의 취지를 충분히 공감했던 것 같다. 이호범 주사는 한 술을 더 떴다. 아직 진행 중인 전주천 사업과 새로 시작한 삼천의 공사 현장감독들을 동행했다. 누구보다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봐야 한다는 뜻은 그렇게 실무자들 네 명으로 꾸려졌다.
그렇지만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인천공항에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일행들은 벌써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아직 경기도 쪽 NGO 참가자들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항상 멀리서 오는 사람들이 먼저 오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늦는다. 그러면서도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했고, 기다린 사람들도 ‘화를 내지’ 못했다. 그냥 그려러니 하고들 넘어갔다. 행정과 기업에서 참여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살짝 신경이 쓰였지만 ‘뭐 이정도야 이해하고 넘어가겠지’하고 말았다.
정작 큰 문제는 우리 쪽에서 터졌다. 기다리다가 지쳤던지 현장감독들과 함께 공항 구경을 하고 오겠다던 이호범 주사는 이제 체크인할 시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나타나질 않았다. 전화 연락도 안됐다. 김미선 팀장이 자꾸 어떻게 좀 해보라고 하는데, 안내방송을 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없었다. 따가운 일행들의 눈총이 쏟아졌다. ‘괜한 짓을 했나’ 싶으니까 은근히 부화가 치밀었다. 결국 나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소위 ‘전주팀’을 남겨놓고서 나머지 일행들은 먼저 수속을 밟았다. 출발 한 시간 정도를 남짓하고서, 얼굴이 벌겋게 혈색이 좋은 그 일당(?)들이 나타났다. 마침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던 이호범 주사는 매우 여유 있어 보였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고, 손에 뭐라도 들린 것이 있었다면 바닥에 내팽겨칠 뻔했다. 덜렁하니 혼자 남아서 말도 못하고, 얼굴만 우락부락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이호범 주사가 그제서야 상황파악을 했다. 매우 당황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보딩패스를 나눠들고 짐을 챙겨서 출국장을 향해 뛰었다. 그런데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늦었다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냐며, 아직 출발 시간이 남았지 않았느냐며 항의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 들어가도 비행기 탈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며,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늦게 나타난 일행들을 원망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고, 일단은 현실적인 해법을 찾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항공사를 찾아 갔다. 같은 이야기뿐이었다. 다음 비행기로 조정도 안 되었다. 저가로 구입한 단체 티켓이어서 일체의 환불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막막했다. 네 명이면 비행기 값만도 2백만원 가까운 돈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이호범 주사가 ‘카드’를 꺼내 들었다.
“다음 비행기로 네 좌석 예약해주세요”
한 시간 반 후에 다음 비행기 티켓은 바로 발급이 되었다. 그제서야 일행들은 한숨을 돌리고 공항 한 구석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어딜 갔었길래, 전화도 불통이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새벽에 출발하느라고 너무 피곤해서, 잠깐 사우나에서 눈을 붙인다는 것이 늦어버렸다’는 고백과 함께 ‘그냥 버스 출발하듯이 한 30분 전에만 타면 되는 줄 알았다’고 실토를 했다. 웃음 밖에 안 나왔다. 민관공동협의회를 하면서 그렇게 고집을 굽히지 않고, 과장이든 시장님 앞에서 자기 의견을 당당히 말하던 사람에게 이런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니, 또 일반 공무원 같으면 출장으로 가는 일에 자신의 카드를 꺼내들 용기내지 쉽지 않았을텐데 그 자리에서 주저없이 2백만원을 결제하는 모습에서 나는 또 다른 면모를 보았다.
모두들 처음 가는 일본행이었지만, 우리가 찾기 어려울만큼 ‘요오기 올림픽 공원’은 그렇게 작지 않았다. 다시 합류하게 된 한국 참가단에 도착 소식을 알리고, 미안하다는 인사도 전했다. 첫날 일정은 특별한 것이 없어서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다고 전달받았다. 어찌할까 하고 있는데, 이호범 주사가 갖은 만고 끝에 일본 땅에 오게 됐는데 자기가 미안하기도 하고, 또 어찌됐든 결전을 앞두고 서로 인사도 나눌겸 술 한잔 사겠다고 했다. 좋은 생각이었다. 숙소 프론트에 도움을 받아 어슬렁거리며, 일본의 첫날 밤의 여유를 부렸다. 맥주를 할까. 사케를 할까. 망설였었는데.. 정작 그 저녁에 무엇을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숙소를 나와 제법 큰 다리 하나를 건넜고, 신호등도 서너 번을 넘어 어렴풋이 로손편의점 앞에서 골목으로 꺾어들어 갔었던 기억만 아른거린다. 흔들리던 검정 글씨가 새겨진 둥그런 빨간 등과 함께.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한국에서 온 다른 일행들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도대체 어디를 갔었느냐’고 물었다. ‘자유시간이라고 해서 그냥 이 근처에서 술 한잔씩 했다’고 했더니 ‘같이 온 한국 사람들끼리 술 한잔하려고 찾았더니, 의리없이 우리끼리만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게 어딨냐’며 뼈있는 농을 던졌다. 김진홍 교수님이셨다. 지금이야 ‘강살리기네트워크’의 운영위원으로 둘도 없이 막역한 사이지만, 그때 그 까칠한 농담 한마디는 가시가 되어 박혔다. 굳이 처음부터 ‘전주사람들’끼리만 나갈 생각도 아니었고, 자유시간이라고 해서.. 나갔던 것뿐인데.. 뭐.. 좀 억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애써 변명하겠다고 하는 것도 우스웠다. ‘그러게요. 그런 줄 몰랐어요’하고 넘겼다.
대회의 발표시간은 누구에게나 3분이었다. 다만 한국에서 참가한 다섯 개 팀은 예산과 본선에서 각각 3분씩을 더 주었다. 통역에 필요한 시간을 고려한 것이었다. 통역 자원봉사를 붙여주는 것 말고는 달리 뭐 특별한 배려도 없었다. 지금이야 PPT 발표가 기본이지만, 당시에는 PPT 발표는 대학이나 용역사들이 하는 것이었고, 그냥 패널을 이용한 구두발표가 일반적이었다. 3분의 시간에 한두 가지 질문과 답변까지를 고려하면 핵심적인 내용만을 발표해야 했다. 이호범 주사가 ‘발표준비는 잘 했냐’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누가 비행기 시간도 까먹는 자기 같은 줄 아나?’ 아직도 풀리지 않은 뒷감정이었지만 속으로만 뱉고 말았다. 조금 있다가 또 묻는다. ‘못 미더우냐’고 되물었더니, 행정에서는 대외적으로 무슨 발표같은 것이 있으면 계장, 과장은 물론이고 어떤 경우에는 국장이나 부시장 앞에서 사전발표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NGO들이야 그냥 담당자에게 맡겨두고 ‘잘 되었다’고만 하면 끝이었지만, 말 한마디 실수에도 언론에 말발에 오르는 행정기관이니 오죽할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나더러 행정 공무원하라고 하면, 아마 답답해 미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차례의 결제과정에서 이리 깎이고 저리 다듬어지면 실수는 없겠지만, 새로운 뭔가를 해보려는 생각이나 자율성도 깎이고 둥글게 다듬어질 수밖에 없을테니까.
화장실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아무리 노파심이니 이해하라고는 하지만, 10분 걸러 한 번씩 물어대는 이호범 주사의 간섭도 피할 겸, 주변에 방해를 받지 않고 혼자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화장실만한 곳이 따로 없었다.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부담과 긴장이 많이 되었기 때문이었고, 항상 그럴 때마다 오줌이 마려운 버릇 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다녀와야 했다. 아무튼 아예 화장실에 죽치고 앉았다. 머리 속에 그림과 사진들을 떠올려 놓고, 순서를 정하고, 각자의 컷마다 시작할 머리말들을 잡아 두었다. 일단 머리말을 잡고 들어가면 나머지 몸통은 죽이어져 따라올 것이니까. 그렇게 내용을 세 가지로만 압축했다. 더 하고 싶어도 시간도 없을뿐더러 듣는 사람의 집중을 방해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앞 뒤로 인사말과 고맙다는 말을 챙겨 넣었다. 대부분 일본인인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한국인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처음 시작하는 인사말은 일본어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싶었다. 간혹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접하면서, 그들이 한국말로 ‘안..녕..하시무니까?’라고 인사를 건네면 너무 고마웠던 기억이 있었다.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왠지 글로벌 할 것 같았다.
넥타이 없는 반팔 와이셔츠에 검정색 바지. 좋다. 순서가 돌아오고 진행자가 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우리는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였다. 함께 간 삼천사업 현장감독인 정과장이 미리 준비한 리플렛을 한 장씩 심사위원들 앞에 돌렸고, 전주천 사업감독인 윤이사는 발표용 패널의 설치를 도왔다. 이호범 주사가 뒤에서 분위기 조성과 총연출 그리고 시간체크를 해주기로 했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서너 차례 따로 입을 맞춘 통역자원봉사자는 나보다 한 발 짝 왼편 뒤에서 내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하이오 고자이마스, 와타시와 신상데스네” 심사위원들과 참가자들의 눈을 한 사람, 한 사람 맞추어가면서 천천히 필름을 돌렸고, 약 1분의 여유를 남겨두고 발표를 마무리 했다.
몇 가지 질문이 있었지만, 한두 가지로 요약해서 요점만을 말했다.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과 법정소송인 대부분의 한국 사례들과는 좀 달라보였던 탓인지 협의회 운영과정에서의 애로점을 묻는 질문과 ‘쉬리’가 어떻게 생긴 물고기인지도 물었다. 막 일본 시장에 영화 ‘쉬리’가 개봉된 탓에 적당한 일본어를 찾지 못했었는데도, 그들은 이미 ‘쉬리’를 알고 있었다. 1분 정도의 시간을 더 쓴 것 같았는데, 진행자는 멀리서부터 저 무거운 패널을 들고 일본까지 날라 온 낯선 이방인에게 자신의 재량을 베풀고 있었다. 눈치 빠른 통역자원봉사자가 내가 머뭇거리는 잠시, 자신이 직접 쉬리에 대해 설명을 했다. 종이 울렸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수다” 인사를 꾸벅하고, 이호범 주사가 있는 뒤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 편을 먹었다. 담배를 핑계 삼아 전주에서 온 일당(?)들은 행사장 밖을 향했고, 저마다 모니터한 참가자들 분위기며, 발표 내용 감상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같은 목표를 위해 허심하게 하나가 되어본다는 경험이 사람들을 이렇게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기분 좋았다. 잠시 동안 우리는 담배도 나누어 피고 커피도 권하면서 서로를 잊고 웃음을 섞어가며 수다스러운 계집아이들처럼 떠들어댔다.
출발이 좋았다. 한국에서 온 또 하나의 사례와 함께 십여 개의 사례가 본선에 올랐다. 본선에서는 별도의 질문없이 발표만 진행을 했다. 심사위원들의 1차 공개투표가 이루어지고, 몇몇 사례들에 대한 짤막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무대를 보고 행사장 왼쪽에 자리를 잡은 우리 일행은 한 순간, 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들을 하고 있었고, 그런 네 명의 남자들 때문에 통역을 맡은 자원봉사자는 더욱 신경이 예민해졌다. 곧 이어 2차 투표가 진행되었다. 결과가 묘한 상황이 되었다. 통상 그랑프리상으로 주어지는 ‘히로마쓰스다에 상’에 전주천을 포함해서 세 개의 사례가 올라가게 된 것이다. 그것도 한국 사례가 두개, 일본 사례가 하나였다. 다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더러 심사위원들의 곤혹스러운 표정들과 진행자의 당황스러움 그리고 더욱 흥미진진해지는 참가자들의 반응들이 뒤섞이면서 대회는 더 뜨겁게 달구어졌다.
잠시의 정회가 있었다. ‘박혜숙’ 교수님의 호출이 있었다. 그녀는 일본의 미애대학의 인문학 교수이면서, ‘환경정의’와 인연이 되어 사실상 한-일 교류의 산파 겸 중매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현실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여기는 일본이고, 지금 우리는 일본 강의날대회에 참석하고 있다고. 아무리 공개투표에 공개심사를 하고, 대회 자체가 축제라고는 하지만 한편으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 일본인들이라며, 눈앞의 결과보다는 멀리 한-일간의 교류를 먼저 고려하자는 당부까지 잊지 않으셨다. 옳으신 지적이었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오면서 대학의 교수로 몸담고 있으면서 몸에 베인 그 신중함에서 지혜로움을 읽을 수 있었다.
다시 대회가 시작되었고, 심사위원 중 한 분이였던 박혜숙 교수님이 여러 심사위원들에게 제안을 내었다. 한국의 사례 1개와 일본의 사례 1개를 공동의 그랑프리로 선정하자는 것이었다. 잠시의 소란거림이 있었다. 통역자의 말을 통해야 했기 때문에 한 템포 늦게야 그 긴장감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잠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돌아와야 했다. 무대 앞에 낯익은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우리 팀의 통역 자원봉사자였다. 순간, 나는 왜 그녀가 지금 이 순간에 저 자리에 있는지가 의아했지만, 곧 상황을 이해했다. 지금 그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판단한 이호범 주사의 부탁으로 ‘전주천’에 대한 참가자들의 관심을 보내달라는 호소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참가자들과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점점 더 재미있다는 표정들이었고, 결국 박혜숙 교수님의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최종 투표에서 ‘전주천’이 히로마쓰스다에 상 수상사례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후끈 달아오른 대회의 분위기와는 달리 아주 차가운 눈길들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를 바라보는 한국인 참가자들이었다. 불편한 표정들뿐이었고, 마지못해 던지는 ‘축하한다’는 말 속에 뭔가가 단단히 뒤틀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찝찝했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감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발 없는 말은 우리보다 더 빨랐다. 이호범 주사는 수상 소식을 곧바로 본국에 알렸고, 2002년 7월 16일자 전북일보에 크게 실렸다. 전주시 홈페이지에는 팝업창이 떴고, 전주시는 수상소식을 널리 알렸다. 축하할 일이었다.
‘김미선’ 팀장으로부터 불편한 전화를 받은 것은 한국에 돌아온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그녀는 전주팀에 대한 한국 참가단에서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별의 별 이야기들이 다 섞여 있었다.
‘처음 공항에서 출발시간에 늦을 때부터 알아봤다’
‘시민행동21이 뭐하는 단체냐, 시민단체 맞냐, 상에 눈이 어두워서 공무원들까지 데리고 와서 그렇게 추한 꼴을 보여야 했느냐’
‘바다 건너 일본사람들 앞에서 한국인들은 마치 ‘상’에 욕심내는 사람들처럼 비쳐지지 않았겠느냐. 부끄럽다.’
‘자기들끼리만 어울려 다니며 저녁도 따로 먹고, 그러더니 결국 상이 목적이었구만.
‘전주시 홈페이지 봐라. NGO들의 순수행사의 취지와 목적에 맞는거냐’
전화를 받는 내동 심기가 불편했다. 아니 매우 억울했고 어떤 대목에서는 화가 치밀기도 했다. 일일이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당사자도 아닌 김미선 팀장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저 쓴 웃음이 나왔다.
전화가 한통 더 걸려왔다. 염태영 처장님이었다. ‘어찌된 일인지를 물었다’ 일일이 다 전한 말씀은 아니지만 심려를 끼치게 되어서 죄송하다는 말씀만을 드려야 했다. ‘내가 신팀장을 잘못 보지 않았다면,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시간이 좀 걸릴 거’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거버넌스’는 아직도 그렇지만 그들에게 여전히 낯선 이름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전주시 공무원’들과 동행한 나의 행보가 어떻게 비쳐졌을까. 나는 그들로부터 사업추진 과정에서 민관협치에 어떤 애로점이 있는지를 단 한 번도 질문 받지 못했다. 그들은 NGO 살림살이에 A2 사이즈의 발표형 패널이 사치라고, 행정으로부터 돈을 받으면 누군들 그렇게 못하겠냐고 말했다. 소박한 다른 팀들의 패널에 비해, 기획사에서 일하는 원규형이 좋은 일로 일본까지 가게 되었는데, 자신이 해줄 것은 없다면서 성심껏 직접 제작해 준 패널이었던 것이다. 그런 패널이었기에 들고 다니기 정말 불편했지만 돌아오는 날까지 직접 들고 다녔던 것이었다. 그런 패널마저도 그들에게는 불편하게 비쳤던 모양이었다.
이호범 주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청 민원실 앞에서 만나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시며,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그냥 듣기만 했다. 굳이 옳다, 그르다. 맞다, 아니다를 따져 묻지 않았다. 단지 내가 얼마나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는지 만을 확인했다. 그리고서는 염처장님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지금은 억울하지만, 얼마쯤 후면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며, 어깨를 토닥이고 올라갔다. 전주시 홈페이지의 팝업광고가 내려졌고, 더 이상의 홍보는 없었다.
<강살리기네트워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오해를 풀고, 혹시라도 빚을 졌다면 내가 진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다.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몸으로 지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3-4년 생활하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주천의 사례가 어떤 사례인지를 알게 될 일이었다. 그 해 <제1회 강의날대회>가 경기도 양평에서 열렸다. 준비위원으로 함께 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6년 전주에서 <제5회 강의날대회>가 유치되었고,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소유역들의 우수사례들을 모아 책으로 엮기도 했다. 9년이 시간이 걸렸다.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낼 수 있기까지.
‘Perception is Reality’라는 말이 있다.
인식되는 것은 진실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언뜻 들으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상식적으로 진실과 그에 대한 인식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떠한 사실을 받아들일때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따라 그 사실을 해석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보는 사람마다 인식이 다를 수 있다. .. 사람들간의 오해도 이러한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사회는 사람들이 느끼고 인식하는 것에 기초하여 관계가 규정되고 일들이 벌어진다. 사람들의 인식이 진실과 거리가 있는 경우에도, 그러한 잘못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상호작용이 벌어지는 것이 사회의 속성이다. ...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이라 해도, 주위에서 모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실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사회생활에서 나를 규정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내가 아닌, 상대방이 인식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 CEO 안철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에서 p220-221